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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다, 맛있다’ 하루 10만 개 팔려

‘싸다, 맛있다’ 하루 10만 개 팔려

이영덕(62) 사장은 1993년 7월 7일 서울 종로구청 앞에서 한솥도시락 1호점이 문을 열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25㎡(약 8평) 규모의 작은 가게 앞에 사람들이 100m도 넘게 줄을 섰다. 밥은 식당에 앉아서 먹는 것이지 들고 가서 먹는 것(take-out)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때도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한 그릇에 980원 하는 콩나물밥을 비롯해 대부분 메뉴 가격이 2000원대였던 1호점은 첫날 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1000개 가까이 팔린 것이다. 이 사장은 “우리나라가 발전하면 도시락은 반드시 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아무도 걸어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매일 20~30m씩 줄을 서며 하루 500개 이상씩 팔리는 첫 점포를 보고 지난 20년간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솥도시락은 국내 최초로 밥을 패스트푸드로 바꾼 기업이다. 1993년에 처음 시작해 지난해 말 기준 450개의 매장을 운영한다. 2500원에서 5000원 정도면 한솥도시락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많이 팔리는 메뉴는 2000~3000원대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로 불리는 햄버거, 샌드위치보다 값이 싸다. 이 사장은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본 결과 패스트푸드로 한국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은 3000원 정도”라고 말했다. 한솥도시락은 창업 이후 지금까지 평균 판매가격이 20% 정도밖에 상승하지 않았다.

소비자물가는 당시에 비해 거의 두 배가 됐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가격이 내린 셈이다. 그렇다고 품질이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솥도시락은 깨끗하고 건강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멜라민 파동이 있기 전부터 중국산 식자재를 국산으로 전환했다.

또 매주 납품되는 식자재의 검수를 통해 제품의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HACCP(유해요소 중점관리 기준)를 통과한 공장에서 생산된 안전한 식자재를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공급받고 있다.



“소비자의 마지노선은 3000원”이 사장은 일본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형편 덕분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은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갈등이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상 일본으로 귀화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대학을 한국으로 진학했다. 외교관이 되고 싶어 법대에 진학했지만 재일교포가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꿈은 좌절됐어도 한국에서의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다.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물론 당시 한국이 정치적 자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사회가 빡빡하고, 꽉 막혀 있어 숨 한번 크게 쉬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면이 있었어요.”모국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40년간 한국에 살고 있다.

매력에 너무 깊이 빠진 탓일까? 이 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 20년간은 놀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단속(斷續)적으로 무역업을 했지만 사업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돈벌이를 위해 하던 사업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양국에 걸친 그의 인생은 좋은 사업기회를 찾게 해줬다.

그가 본 것은 도시락업. 1977년 말 일본에서 패스트푸드 도시락이 처음으로 개발됐다.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던 일본에서도 핵가족화와 여성인력의 사회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집에 가정주부가 있어도 음식을 밖에서 사먹는 경우가 흔했다. 이른바 가정식 대체 시장이 늘어났다.

이후 사다 먹는 도시락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 일본에는 매장 2000~3000개를 가진 도시락업체가 3개나 된다. 이 사장은 도시락을 한국에서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80년대부터 이런 생각을 했지만 시장이 성숙하지 않았다. 88년 올림픽이 기점이 됐다. 그는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현재 일본 최대 도시락 업체인 혼케가마도야 역시 재일교포가 경영하고 있었다. 이 사장은 이 회사와 기술제휴를 하고 자매결연을 했다. 2년간 경영수업도 받았다.

1호점의 폭발적 반응과 달리 매장은 꾸준했지만 더디게 늘었다. 창업한 지 4년이 지난 97년 10월에야 겨우 100호 매장을 열었다. 박한 마진에 폼 나지 않는 사업이지만 이 사장은 확신이 있었다.

“도시락업이 일확천금을 가져다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고객과 점주들에게 이익이 되게만 해주면 결국에는 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은 있었죠.” 목표는 소비자가 만족하는 도시락이었고 그 결과는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가격을 낮게 유지해 많은 사람이 찾게 하고 해마다, 계절마다 메뉴를 개발하면서 그는 수년간 적자를 감수했다. 어쩌면 고독한, 그리고 힘든 사업을 유지하던 그에게 뜻밖의 도약대가 찾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그것. 경기가 어려워 저가 시장이 성장한 탓도 있겠지만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모든 원자재 값이 오른 그때 이 사장은 판매가를 유지하기 위해 납품업체에 “적자를 보더라도 가격을 올리지 마라”고 요청했다. 대신 “1년 뒤 물량을 두 배로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도박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가격을 올리지 않고 신의를 지킨다면 반드시 보답이 온다고 믿었다. 경영을 도박처럼 할 순 없었다. 한편으로는 가격 인상안도 준비했다. 납품단가를 올리는 대신 제품가격도 올리는 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 점주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공급가를 올리는 게 불가피하다면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우리는 판매가격을 올리지 않겠다.” 점주들의 이런 의견에 이 사장은 용기를 얻었고, 납품업체의 불만도 잠재워졌다. 가격을 고수했던 한솥도시락은 99년 3월에 200호점을 돌파했다. 이 사장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적자 보더라도 가격 올리지 마라”하지만 한솥도시락은 그 후에도 계속 낮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본사는 마케팅, 경영지도, 점포개발, 메뉴개발만 합니다. 일체의 음식 생산과 유통은 외주업체에 맡기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나은 품질로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기업이 나오면 언제든지 바꾸기 위해섭니다.” 이 사장은 “내가 공장을 짓거나 내 지분이 들어가 있으면 더 싸게 만드는 공장이 나와도 바꿀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웃으며 말했다. 생

산뿐 아니라 전국 450개 점포에 유통도 외주업체가 맡는다. 이 업체는 물건을 공급하는 것뿐 아니라 수금도 대행하고 있다. 한솥도시락 본사 직원이 60명뿐인 이유다. 이 사장은 “2012년까지 1000호점은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맞벌이가 늘어나고, 핵가족, 1인가족이 늘어나면서 한솥도시락은 이 사장의 예상대로 탄탄한 성장을 하고 있다.

물론 도시락 파동이 있을 때마다 한솥도시락의 제품력과 가격 경쟁력은 다시 부각된다. 이 사장은 “일본의 20~30대 주부 중 40%가 집에 도마와 칼이 없다는 통계가 있다”고 말했다.

도시락 외에 다각화할 생각을 묻자 “외식업은 흔히 말하는 인간력이 중요하다. 시스템으로 해결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내 능력의 한계가 있어서 밥 외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세계 최대 체인인 맥도널드가 제2, 제3의 브랜드가 있느냐?”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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