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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똑똑해져도 사람이 그대로면…

TV가 똑똑해져도 사람이 그대로면…

스마트폰의 열풍은 이제 완전히 궤도에 올라갔다. 그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TV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고성능 CPU에 네트워크 기능까지 결합한 TV가 스마트폰 신드롬의 뒤를 이을 주자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스마트 TV’라는 말 자체부터 어쩌면 불안불안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보상자’가 해야 할 비약의 정도보다 이를 바라보며 성장한 현대인이 각오해야 할 변화가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마트TV는 간단히 설명하면 웹을 결합한 TV로, 스마트폰과 함께 화려하게 떠오른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기기다.

IT(정보기술)의 진화 과정은 인터넷이 가능한 모든 정보를 디지털로 바꿔 흡수하면서 가능한 모든 곳에 침투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터넷은 신문과 책을, 음성과 영상을 빠르게 흡수했고, PC에 이어 스마트폰을 점령했다.



시청자 ‘참여’는 양날의 검웹은 아울러 콘텐트 소비자를 생산자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변화에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총체적 혼돈을 맞았다. 특히 신문으로 대표되는 활자매체의 타격이 컸다. 글을 쓰고 취재해 뉴스를 알리고 어젠다를 설정하는 행위 자체에 장벽이 허물어졌다. 누구나 기자나 평론가나 수필가가 쉽게 될 수 있도록 한 웹 혁명의 1막은 그렇게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다음에는 TV로 웹이 스며들거나, TV가 웹을 구현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이를 이루려는 시도가 뒤따랐다. 우리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런데도 왜 아직도 TV에서는 웹이 자리 잡지 못했을까? TV는 어떻게 IT 혁명으로부터 온전할 수 있었나?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콘텐트를 비교해야 한다.

UCC(사용자제작콘텐트)가 유행이다. UCC와 파일 공유 사이트는 디지털 영상 정보를 무한 반복·복제하면서 DVD나 CD와 같은 매체를 궤멸시키는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콘텐트는 스튜디오나 방송사에 대(大)자본이 투하돼 만들어진 ‘프로의 작품’이다.

음악과 영화는 모두 MP3와 동영상 파일의 무한 복제가 몰고 온 유통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그 창조의 과정과 권위 자체가 야유받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변화를 잘 활용하는 이들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기만 한다.

인터넷에서 무명인 누군가가 특종 기사를 뽑고 촌철살인의 칼럼을 쓸 확률은 꽤 되지만, 어느 누군가가 갑자기 3D 영화 ‘아바타’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릴 확률은 0에 가깝다. HD급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디카를 용돈으로 살 수 있고, 유튜브와 같은 무료 영상 공유 서비스는 지금 바로 전 세계적 유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누구나 영화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은 정비됐지만 결국 누구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우리가 허리를 펴고 등을 기대며 바라보는 저 화면 너머는 ‘퀄리티 미디어’, 우리로 치자면 방송 3사가 여전히 왕인 것이다. 그럴듯한 인터넷 TV인 IP TV만 봐도 그렇다.

다만 그간 방송사가 독차지하던 콘텐트 유통 무역업을 통신사라는 거간꾼과 잠시 나누었을 뿐 ‘콘텐트가 왕’이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활자매체가 포털과 검색엔진에 흡수돼 재정리되는 기사, 일반인이 자신만의 기사를 써대며 권위에 도전하는 ‘권위의 재편’에 시달리는데, 시청각 미디어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시청각 미디어가 활자만큼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활자는 독자의 지각과 상상력의 보조를 받아 독자의 체험으로 맺힐 수 있기에, 찰나적이고 소모적 내용이라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모호해질 수 있다. 하나 시청각 미디어는 그렇지 못하다.

만들어낼 수 있는 딱 그만큼만 인지되는 것이다. 게다가 수동적인 상태에 있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시청자의 지각과 상상력에 의해 보조받는 트릭은 좀처럼 쓸 수 없다. 트위터처럼 한마디 던져놓고 대중에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일은 시청각 미디어로서는 불가능하기에 부러울 뿐이다.

3분의 방영 타임을 위해 1시간을 촬영하는 것이 방송이기 때문이다. 스마트TV를 제약하는 요인은 좋은 콘텐트를 위해 투입해야 하는 자본과 시간 말고도 더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TV는 알아서 프로그램을 편성해 내보내준다. 반면 스마트TV는 이용자에게 계속 콘텐트를 선택하는 ‘참여’를 요구한다.

▎1969년 7월 21일 서울의 한 다방에 아폴로11호 달착륙 방송을 시청하러 사람들이 모여있다.

▎1969년 7월 21일 서울의 한 다방에 아폴로11호 달착륙 방송을 시청하러 사람들이 모여있다.



사적인 웹 문화도 걸림돌TV 시청자는 수동성에 길들여졌다. 지친 하루를 보낸 뒤 오랜 습관에 따라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든다. 그리고 ‘바보상자’가 뿜어내는 극소량의 정보와 그 위에 당의정처럼 입혀진 엔터테인먼트에 젖어든다. 소파의 안락함과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이 수동적 선택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어버린다.

전국에 동시에 내보내진 방송 프로그램은 다시 우리 일상에서 대화에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지상파 방송은 DMB로, 인터넷으로 유비쿼터스가 되면서 영향력을 더 키웠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보편적 매체가 뿜어내는 이야기는 제아무리 웹2.0의 시대라도 사실상 웹의 맥박과도 같은 실시간 검색어마저 점령해 버린다.

오랫동안 이렇게 길들여진 시청자가 스마트TV 이용자로 변신하는 건 간단치 않은 일이다. 물론 유튜브에는 괜찮은 사용자 제작 콘텐트가 수도 없이 있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그 자체가 스토리의 줄기가 되지는 않는다. 이 멋진 사용자 제작 콘텐트는 무언가에 의해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해줄 누군가가 모호하다.

대개의 인터넷 영상 소비는 웹의 문자정보를 통해 엮어진다. 블로그, 카페, 게시판과 같은 웹은 그러한 재야의 동영상에 맥락을 주고 우리에게 소개해 왔다. 유튜브는 이러한 맥락 없이는 편성될 수 없는 일이다. TV 방송의 편성이란 원래 ‘누워 계시면 알아서 대령하겠다’는 일이지만 유튜브와 같은 웹의 동영상은 시청자 스스로의 적극적 편성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멋진 한 장면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장면이 일관된 전체를 이루어, 일상에 지쳐 소파에 누워 있는 시청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TV 앞의 수동적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왕이나 부릴 수 있는 총체적 동원력이 없으면 빼앗기 힘든 것이 시청자의 일상적 관심이다.

지금까지 웹과의 결합을 표방한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가 나왔지만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TV에서 검색창이 깜빡인다. 무엇이든 입력할 수 있고 무엇이든 찾아줄 수 있다고 한다. 이 자유는 부담이 된다. 자유는 곧 선택의 힘이다. 그렇지만 TV 앞에서 우리가 해본 선택이라곤 재핑이라고도 하는 ‘채널 전환’뿐이었다.

객관식 문제만 풀어본 이에게 주관식 문제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피곤에 지친 아무개씨에게 딱 어울리는 특정 영상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왜 지금 이 특정 영상을 봐야 하는지의 맥락을 TV에서 어찌 찾아야 할지 좀처럼 쉽지가 않다. 피곤에 지친 아무개씨가 기존의 웹에서와 같이 가족과 함께 카페나 블로그나 DC인사이드의 게시판을 같이 보다가 이 영상을 발견해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평소 웹 서핑 습관을 스마트해진 TV가 판단해 알아서 틀어줘야 할까? 혹시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자신의 취향을 들킬까 껄끄럽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스마트한 모든 것은 하나같이 PC, 그러니까 개인적인 컴퓨터의 분파였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고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도 마찬가지다.

화면을 작게 만들거나 키보드를 떼어내는 등 성형은 가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집단이 아닌 개인의 감각 기관의 연장, 뇌의 보조 수단으로, 인간 개인의 강화·확장 작전인 것이다.



방송사·영화사 권력 잃을 수도흑백 TV 시절 이장님댁에 모여서 보던 레슬링까지는 아니라도 TV 시청에서 엿보였던 집단적 의례는 TV가 있는 모든 가정에서 여전히 관찰된다. 가족에게 리모컨을 건네면서 어떤 채널을 틀지에 대해, 아니면 그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작은 화제를 형성해 간다.

이는 개인 고유의 능동성을 서로를 위해 잠시 제거하고, 서로를 위해 겸손하게 작은 소통을 해오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증거다. 이것이 TV를 둔 현대 가족의 풍경이다. 혼자라면 몰라도 온 가족 아니 아내 또는 동거인과 나란히 앉아 함께 e-메일을 확인하거나,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함께 읽거나, RSS 구독을 함께 하는 일.

아무리 이상한 메일이나 블로그나 수상한 링크 따위가 하나도 없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딘가 부끄럽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바로 이 모든 웹의 문화가 퍼스널, 즉 PC를 위해 형성됐기 때문이다. 부부끼리 리모컨으로 서로의 계정을 원 클릭으로 스위칭해 가며 서로의 메일을 52인치 대화면으로 읽는 것은 의외로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생각해 보면 결정적으로 유용한 장면도 있다. 아이와 함께 검색을 해가며 필요한 영상 자료를 통해 학습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홍보 팸플릿처럼 이상적인 풍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는 끊임없이 웹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아니 거꾸로 웹은 끊임 없이 TV를 점령하려 진군할 것이다.

정보가 전달되는 모든 창을 자신의 분출구로 삼으려는 웹이 지닌 특성이 빗나간 적이 없기도 하지만, 웹과 결합된 TV에는 지금까지 시청자가 인지하지 못한 명백한 효용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만끽 중인 수동성을 방해받지 않으면서, 이를 위화감 없이 통제하고 나아가 이를 능동성으로 이어줄 수 있는 장치의 모습이다.

TV를 보고 있지만 이와 연관된 정보를 적시적소에 보여줘 호기심을 자극해 웹으로 끌어당긴다거나, 채널 선택 및 검색 등 최소한의 행동 패턴 및 시청 패턴을 파악해 이를 통계적으로 활용하는 대가로 ‘나만의 채널’을 제공받을 수도 있다. 바보상자 앞에서 흘려보내는 사람들의 관심을 일거에 획득할 수 있는 셈이다. 관심이란 결국 기회, 즉 돈이니까.

이것이 바보상자의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끊임없이 웹TV·스마트TV는 등장할 것이다. TV 앞의 수천만 개의 눈망울, 그 가치를 누구도 흘려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콘텐트는 왕이지만 ‘플랫폼은 신’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여기에 인터넷과 웹을 비롯한 정보 혁명론의 근간이 있다. 이 믿음은 늘 실현되는 순간 신화가 됐다.

아이튠즈와 앱스토어는 콘텐트가 플랫폼의 발 밑에 놓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플랫폼과 결합한 TV가 길들여야 할 콘텐트는 금방 찍어낼 수 있는 장난감 같은 앱이 아닌, 콘텐트 집단 체제로서의 방송이다. 지금까지 플랫폼에 점령됐던 다른 콘텐트와 TV의 방송이 다른 점은 단 하나. 방송은 플랫폼이 약속한 대규모 전달력도 자금 회수 메커니즘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파와 광고라는 자체적인 완결적 보호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각국 방송국 간의 프로그램 무역 거래가 별도로 이루어져 방송 가능 범위와 시청 가능 지역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관례가 강하다. 예컨대 웹상의 방송국인 훌루 같은 서비스는 미국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제3자가 등장해 플랫폼을 자처해도 콘텐트가 동의해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플랫폼 성공신화 속에서도 결국 TV의 콘텐트는 여전히 왕인 것이다. 콘텐트야말로 인류를 매혹시켜 온 창조력과 동의어다. 창조된 새로운 무언가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인류의 숙명. 이것이 콘텐트 사업의 믿는 구석이다.

특히 문자 콘텐트와는 달리 그것이 영상 미디어라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자본이 투하돼야 한다. 이는 일종의 뉴 미디어 동화비용인데, 예컨대 3D 등 그 미디어의 차원이나 신규성이 올라갈수록 비싸진다. 문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이 획득한 일종의 추상화 능력이다.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이와 같은 인류의 체득 능력 위에 워드프로세서와 웹이 천군만마가 되어 주니 문자 콘텐트에서 창조의 민주화가 쉽게 일어난 것이다. 영상 미디어에도 기술적 도구는 주어졌다. 그러나 문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에게 주어진 창조 도구의 능력은 물론이고 이를 구사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치가 함께 동반 상승해야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아직 그렇게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 약함을 인정하고 개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 패러디, 리믹스, 매시업과 같은 파생 창조물들이다. 그러나 양념이라면 모를까 TV의 메인 메뉴로 활약하기에는 주객전도다. 그렇다면 이 강한 콘텐트의 힘을 둘러싸고 플랫폼 간에 한판 교전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세간의 관심이다.

아직은 방송사와 영화 스튜디오가 영상 콘텐트를 소유하지만, 결국 신문처럼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이다. 플랫폼의 힘으로 이를 붕괴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 마치 모든 활자매체를 다 흡수한 바로 그 검색 로봇이 이번에도 기능하리라고 응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창조의 민주화 일어날까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존 국내 IPTV의 가장 큰 한계가 검색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플랫폼에 콘텐트를 믿고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검색 사업자가 붙어 있지만 TV에 쏟아지는 검색 결과물은 방송이 아닌 웹의 결과물이다. IPTV에서 보고 싶은 콘텐트를 쳐도 엉뚱한 웹페이지만 화면에 뿌려주고 마는 것이다.

제3자 플랫폼은 검색 대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웹페이지가 아닌 방송사의 콘텐트를 넣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제휴가 가능할까? 검색 로봇의 성능이 아닌 개별 교섭력이 요구되는 순간이다. 미래의 TV를 체험해 보는 손쉬운 방법은 집의 TV에 PC를 연결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무선 키보드로 조작해 보는 것이다.

홈시어터 PC라는 장르까지 형성된 이 구성만으로도 스마트TV가 약속하는 대부분의 가치는 사실상 미리 만끽할 수 있다. 오히려 웹하드나 P2P와 같은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는 영상의 보고도 되어버린다는 면에서는 현존하는 어떠한 스마트TV보다도 콘텐트 수급에 대한 극단적 미래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어딘가 불편할 것이다. 뒤로 기대어 보는 TV와 웅크려 하는 PC 사이에는 웹을 보는 일 자체에 대한 각오와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텐 풋 UI(사용자 인터페이스)’란 말이 있듯이 화면과의 거리감은 다른 상호작용을 기대하게끔 한다. 또한 TV 리모컨(또는 무선 키보드)은 다른 여느 입력 기기와는 또 다르다.

자신이 입력하는 동안 누군가 그 과정을 함께 보게 된다는 점, 화면에 각종 창이 가리면 함께 보는 이들 중 누군가는 성가시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 입력 실수라도 하면 답답해 하는 누군가로부터 리모컨을 뺏기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 생소하다.

아이들과 노인의 미디어인 TV를 혼자 독차지하며 마치 스마트폰에서 하듯 이것저것 깔아보며 ‘세팅 놀이’를 하려 한다면 다른 가족의 소외감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스마트 TV의 딜레마다. 친구들과의 파티 타임에 인터넷의 동영상을 바로 검색해 당겨와 볼 수 있다는 체험 자체는 흥미진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일상이다.

일상의 TV는 가족의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가족은 TV가 아무리 첨단 LCD라도 바보상자로서 먼저 인지하려 든다. 기꺼이. 지난 10년간 수많은 스마트TV, 인터넷TV가 명멸해 갔다. 신규 참여자는 선행자의 한계였던 네트워크 속도나 UI 등 사용자 체험을 개선하는 일에 집중했고, 그 과제를 풀었다며 이번에는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주인이 스마트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스마트TV는 시청자가 스마트해져야 하는 TV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TV의 성공 여부는 TV와 함께했던 ‘바보의 시간’을 버리고, 고독하고 스마트한 시간을 과연 얼마나 보내고 싶어하게 될는지, 그리고 그 의지와 각오는 어느 정도인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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