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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나의 경영론] 믿고 맡기고 키운다

[CEO 나의 경영론] 믿고 맡기고 키운다

신세계 본사 사무실 서재 앞에 앉은 구학서 회장.

학군단 8기인 구학서(65) 회장은 군 복무 시절 다른 소대장처럼 병사의 조인트를 까거나 기합을 준 적이 거의 없다. 대신 훈련을 마치면 부대원 전원에게 통닭을 배달시켜주거나 인생 고민을 들어주는 식으로 병사를 다독이곤 했다. 기강을 잡는 건 병 출신인 선임하사에게 맡겼다. 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잘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용한 성격에다 평소 숫기가 없던 그라 소대장을 맡고 나서 어떻게 통솔할지 고민하다 짜낸 묘책이었다. 구 회장은 당시 소대에서 꼭 지켜야 할 큰 원칙만 자신이 정하고 세세한 사병 관리는 경험 많은 선임하사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구학서 회장은 “CEO가 직접 모든 일을 챙기면 직원이 신경 쓰여서 일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CEO는 장기적인 전략 수립 같은 큰 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인 전술은 각 부문의 책임자에게 맡기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이런 차원에서 CEO마다 강조하는 ‘현장 경영’을 남들과 다르게 실천한다. 구 회장도 백화점과 이마트의 매장을 둘러보고 할 말이 많지만 꾹 참는다. 점장이 잘 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장에 들르면 괜히 간섭하게 마련이고 그러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점장을 바꾸면 된다는 생각이다. 현장을 찾는 건 매장 입지 선정, 건물 공사, 매장 오픈 때뿐이다. 그래서 구 회장은 가급적 매장에 들르지 않는다.

구 회장은 자신의 이런 지론을 ‘코칭 경영론’이라고 부른다. 신세계 하면 떠오르는 윤리 경영론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경영론이다. 그는 비교적 늦깎이로 신세계에 합류해 유통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신세계를 한국의 간판 유통회사로 키워냈다. 외환위기 때 부동산을 미리 사뒀고 좋은 입지를 선점하는 탁월한 안목도 돋보이지만, 아랫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주고 키우는 코칭 경영론이 먹힌 덕도 크다.



아랫사람 키우는 경영철학그는 직원에게 호통치거나 잘못했다고 무안을 주는 일이 거의 없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논리적으로 아랫사람을 설득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스스로 “앞에 나서 이끌기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전문 경영인이라면 코치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아랫사람이 권한과 자율성을 가져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한다고 본다. 그러고 난 후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유통업은 숫자가 바로 나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평가하기도 쉽다. 그렇다고 그가 숫자로만 사람을 평가하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지혜와 윤리의식이 있는지 살핀다”고 말한다. 이 역시 유통업의 특성상 다른 업종보다 쉽게 가릴 수 있는 잣대다.

(위)1978년 삼성물산 회장실 과장 시절(뒷줄 왼쪽에서 둘째), (아래)1983년 도쿄 삼성 관리부장 시절(왼쪽에서 셋째).

그는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 회장은 과·부장 시절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이병철 전 회장을 직접 자주 봤기 때문에 많이 배웠다고 회고한다. 그는 두 가지 예를 들었다. 사장단회의 때마다 신세계 이야기가 단골로 나왔다. 사장마다 개선책이나 고객 불만을 한마디씩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이 전 회장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백화점 영업 대신 건물에서) 세 받는 것보단 낫나?”라며 묵직한 한마디 정도만 던졌다. 유통업의 실적 가이드 라인을 넌지시 제시한 것이다(물론 현재 신세계의 자산수익률은 임대 수익률보다 훨씬 높다). 구 회장은 “회장 자신까지 사장들처럼 들은 말을 쏟아내면 신세계가 산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고 해석한다.

구 회장으로선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 전 회장 방에 누가 들어가든지 짧은 물음과 침묵이 이어졌다. 말 시키는 방식이 독특했다. 밑도 끝도 없이 “얘기해봐라”고 말하고는 침묵이 이어진다. 보고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마련이다. 뭘 얘기하란 말인가. 분명히 용건은 있지만 그걸 말하진 않는다. 그런데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다르다. 이 전 회장의 관심사가 뭔지 미리 챙긴다. 그게 딱 맞아떨어지면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이 전 회장은 “이 친구가 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구나”라고 여긴다.

이 전 회장은 아랫사람이 어떻게 하면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할지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라 저래라 시키면 나중에 잘못 돼도 회장이 그렇게 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핑계거리만 생긴다는 얘기다. 이 전 회장은 보고가 마음에 들면 “니 한다고 했지, 그럼 해봐”라는 식으로 일을 시켰다. 결국 윗사람의 뜻인데 일을 하는 과정은 아랫사람이 주도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형식이 된다. 구 회장은 “당시에는 이 전 회장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지만 임원이 되고 CEO 자리에 오르면서 되새기게 됐다”고 떠올린다.

구 회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이 회장은 경영이란 ‘자본주의의 착각’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고 전했다. 자기 소유가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말이다. 그게 시장경제나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각이란 말하자면 주인의식과 비슷하다. 자기 회사라는 착각에 빠져 일하면 회사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아무리 유능한 CEO라도 아랫사람의 일까지 도맡아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아무리 강요한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때 나온다. 그런 측면에서 CEO는 아랫사람이 착각에 빠질 수 있게 약간의 코칭만 하면 된다는 논리다.

1969년 학군단 야영훈련 때 모습(왼쪽 첫째).
구 회장은 아랫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우는 게 많다고 말한다. 이렇게 지시하려고 했는데 저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좀 더 나은 지시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은지 언제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영은 ‘자본주의의 착각’특히 아랫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먼저 충분히 듣고 모든 일을 그들이 하는 것처럼 코치하는 식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면 만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시만 내리는 CEO가 많은데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는 듯 보이지만 아랫사람의 능력을 키울 수 없고 스스로의 결정이 틀릴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코칭 경영은 신세계의 실적에서 꽃이 피었다. 맡겨놔도 실적은 최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신세계는 지난해 매출 11조253억원, 영업이익 9927억원, 당기순이익 1조760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매출은 2009년보다 10%, 영업이익은 8% 늘었다. 당기순이익은 무려 89% 급증했다. 모두 창사 이후 최고 기록이다. 특히 당기순이익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이 애초 목표였던 1조원을 밑돌았고, 당기순이익도 삼성생명 주식 500만 주를 팔아 이익을 남긴 덕을 많이 봤지만 나름대로 대단한 수치였다.

이런 실적에도 요즘 다소 부진한 주가에 대해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일본 백화점은 14년째 실적이 뒷걸음 쳐서 1982년 수준으로 돌아갔다지만 신세계 실적은 4분기에 잠시 고삐를 늦춘 걸 빼면 떨어질 이유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세계와 이마트의 분리, 무상증자 등의 호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대표이사에선 물러났지만 회사의 성장에 관심은 여전했다. 백화점 수가 부족하다는 말에 “그게 신세계의 약점이지만 장점이기도 하다”고 맞받았다. 서울 강동지역 등 아직 진출할 여지가 많아 성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의정부나 서울 영등포에 새로 문을 연 것도 이런 포석에서였다. 구 회장은 현재 오너 경영인이 전면에 나섰지만 전문 경영인에게 여전히 많이 맡기는 전통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특히 “머지않아 신세계에 여성 CEO도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승률 기자 nam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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