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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믿으면 백지수표도 써준다

한번 믿으면 백지수표도 써준다

모두가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한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 오너에게 백지수표 한 장을 써준 사람이 있었다. 평소 존경했고 믿었던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차용증 한 장 안 받고 백지수표를 썼을까.

“평소 제가 존경하던 분이셨죠. 사업하다가 곤경에 빠져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분이 어음을 빌려 달라며 찾아오셨죠. 절망 속에서 찾아왔을 때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누라는 빌려줘도 어음은 안 빌려준다는 말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과감히 백지수표를 써 주었습니다. 한번 믿기로 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자는 철칙이 있었죠.” 배포 크게 백지수표를 쓴 주인공은 신정택 세운철강 회장이다. 그는 공무원을 하다 연 매출 7000억원 규모의 철강회사 CEO로 변신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연임하며 지역 경제발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신 회장은 한 가지 목표를 잡으면 결과가 어떠하든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끝을 보는 기질을 갖고 있다. 옆에서 보면 무모하다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달린다. ‘백지수표’에서도 보듯이 작정하면 누가 뭐래도 그 길로 간다. “어떤 역할이든 책임지겠다는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와 결혼했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회사 일이든, 상공회의소 일이든 상대방이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배신하거나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다. 전적으로 상대를 믿고 끝까지 함께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공무원 하다 사업 뛰어들어의리와 신뢰, 목표에 대한 강렬한 집념. 신 회장의 인생과 사업을 관통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그의 사는 방식이 우직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 회장은 가난했던 시절 도시로 나가 성공해야겠다는 꿈을 늘 갖고 있었다. 판사가 된 큰형의 영향을 받아 공무원이 되었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관공서에서 자재담당 업무를 맡았다.

당시 시골 농가를 대상으로 양철 지붕 개량 사업을 맡게 되면서 철강 사업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고 철강 사업에 뛰어든다. 당시 국내 1위 철강업체였던 연합철강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면서 본격적으로 철강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영업을 잘해 회사 안에서 인정받았죠. 하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포항제철판매 사장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오기가 생겨 보름 동안 매일 비서실에 가 사장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 정성이 통해 사장을 만나게 됐죠.”

당시 포항제철판매 박종태 사장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니 정규 대리점을 내주기는 곤란하다”며 “주문판매점을 일단 열고 어느 정도 실적이 올랐을 때 정규 대리점을 내주겠다”고 했다. 철강 500t을 팔면 판매점을 내주겠다고 제안한 것.

신 회장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거래처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한 군데도 팔지 못했다. 그러던 참에 기회가 왔다. 연합철강 제품 생산 공정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거기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자 철강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그 덕에 신 회장은 철강 500t을 다 팔고 정규 대리점을 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기로 했다. 당시 국내 대리점은 제품을 가져와 그대로 팔았다. 유통 마진을 따먹는 단순한 소매업이었다. 하지만 일본 등 철강 산업이 앞선 선진국에서는 달랐다. 단순 판매가 아니라 한 공정을 거쳐 제품을 업그레이드해 비싼 값에 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 회장은 선진국처럼 하면 큰돈을 벌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존 제품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요했다. 그는 고민 끝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1989년 김해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94년에는 창원공단 내에 가전제품 전용 공장을 짓고, 96년에는 울산에 자동차 제품 전용 가공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창원공장은 백색가전 제품 공장이 밀집한 곳에 있다. 이들 업체에 신속하고 경쟁업체보다 싸게 냉연철판을 공급했다. 업계에 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울산공장은 현대자동차에 철판 소재를 공급한다. 때맞춰 좋은 제품을 보내기 때문에 회사 간 신뢰가 높다고 신 회장은 강조했다.

사업은 탄탄대로였다. 지금은 포스코 냉연스틸서비스센터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물량을 유통하는 1위 업체다. 신 회장의 뛰어난 영업 능력, 과감한 시설투자, 강한 추진력이 낳은 결과다. 자동차와 전자제품, 조선 기자재 등에 사용되는 냉간압연강판과 아연도철판 부문은 20년 넘게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2010년 세운철강의 매출액은 7200억원. 올해 매출 목표는 8500억이다. 매출 1조원과 연간 철강 100만t 판매 달성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신 회장은 “직원들이 열심히 뛰고 있어 올해 목표는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경제 이끌어온 리더신 회장은 2006년부터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직을 연임하고 있다. 그는 5년여 동안 부산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평한다. 부산 상공인 또한 신 회장의 역할을 높게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을 연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 활동은 동남권 신공항 건설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정부가 인정하도록 한 일이다. 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타당성 건의를 한 결과다. 공장 용지가 부족해 부산을 떠나는 기업이 많았다. 이들을 잡기 위해 강서 지역 그린벨트를 풀어 300만㎡(약 1000만 평) 규모로 강서국제산업물류도시를 조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또 지역항공사인 에어부산을 설립해 조기에 안정화시켰다. 에어부산은 취항 10개월 만에 탑승객 100만 명 돌파, 1년 반 만에 흑자를 냈다.

신 회장은 2006, 2007년 세계한상대회를 부산에 연이어 유치했다. 그 결과 한상과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이는 지역 기업들이 외국시장을 개척하는 데 교두보가 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부산의 문화적 부문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롯데 신격호 회장과 만나 1000억원을 들여 세계적 수준의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한다는 MOU를 체결했다. 장소만 확정된다면 바로 공사가 시작된다.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위한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는 부산시와 롯데그룹이 공동으로 맡는다. 건립은 롯데그룹이 담당해 문화관광 명소로 키워 나갈 계획이다.

신 회장은 상공위원들의 화합을 위해 애쓰고 있다. “신뢰가 제일 중요하죠. 우리 지역 상공인이 화합했기 때문에 옛 부산상공회의소의 위상을 되찾았다고 봅니다. 그건 제 자부심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리더십이라는 게 거창하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희생 그 자체죠. 리더가 몸소 실천해 구성원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편하게 있으면서 남에게 따라오라 하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죠.”

그가 사회공헌활동에 열심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범을 보여 지역 경제인의 동참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최고의 사회공헌은 인재육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기업인은 교육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들이 부산지역 630여 개 초·중·고와 1사 1교 결연을 맺어 인재를 육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기업인으로서 인재양성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그는 스리랑카 명예영사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스리랑카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2만 달러의 이재민 돕기 성금을 냈다. 이후 스리랑카 대사관에서 명예 영사를 제안했다.



새벽 5시 반, 등산으로 일과 시작그가 가진 직함은 명함 가득하다. 그만큼 스케줄도 빡빡하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할까. 신 회장은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등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해외출장 등 특별한 일이 아니면 빼먹은 적이 없다. 등산으로 몸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산경제 발전의 희망은 바다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 바라보는 바다를 생산성 있는 바다로 바꿔야 합니다. 땅덩어리가 좁다고만 하지 말고 바다 끝까지 부산 땅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제지도는 그만큼 넓어지는 겁니다.”

신 회장은 “기업인이 바다를 활용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며 “부산 상공인이 갈 방향은 관광 컨벤션, IT 등 부가가치 높은 제조업 서비스”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산은 항구도시이자 물류 중심기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며 “한국 제2 도시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상공회의소가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대·중소기업 간 화합도 강조했다. 그는 “나라 경제성장이 바로 중소기업의 성장과 직결된다”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잘 안고 갈 때 우리 경제에 활력이 넘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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