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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나의 경영론>>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은 지킨다

CEO 나의 경영론>>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은 지킨다

배영호 사장이 과천 코오롱그룹 본사 입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코오롱그룹 전체 매출의 40%가량을 올리는 코오롱인더스트리의 배영호(67) 사장은 13년 차 CEO다. 코오롱의 대표적 장수 CEO로 올해로 임원 생활만 22년째다. 1970년 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이롱에 입사해 영업·생산 부문을 두루 거친 그는 그룹에서 ‘소방수’로 유명하다. 몸담은 부서나 회사마다 흑자로 돌려놓거나 성장 기반을 탄탄히 다진 경력 때문이다.

1981년 담당 부장으로 발령 난 타이어코드사업부는 당시 가동률이 50%도 되지 않는 만년 적자 부서였다. 전체 판매 물량의 70% 정도가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에 몰려 있는 천수답 구조가 문제라고 판단한 그는 그 무렵 세계 1위 업체인 굿이어를 뚫어 부서를 흑자로 돌려놨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에는 코오롱유화·제약 사장을 맡아 회사를 살렸다. 그는 부도 직전에 놓인 코오롱제약의 잘못된 영업 관행을 뜯어고쳤다. 장부상 실적을 맞추기 위한 꼼수인 밀어내기를 근절하고 약국에 제품을 공급한 후 270일이나 걸리던 대금 회수 기간을 120일로 줄여 취임 2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꿨다.

2006년 1월에는 코오롱(현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에 올라 노조의 파업과 적자로 ‘CEO들의 무덤’으로 불리던 회사를 그룹의 주력으로 키웠다. 민주노총에서도 가장 강성인 노조를 설득해 국내 기업 가운데 둘째로 항구적 무분규 선언을 이끌어냈다.



화투 뒷장이 잘 붙는 사람코오롱인더스트리의 매출은 배 사장 취임 당시 1조80억원에서 지난해 창사 이래 가장 많은 3조2412억원으로 세 배로 늘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이런 그를 두고 ‘화투 뒷장이 잘 붙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화투판에서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패를 뒤집어야 하듯 회사 경영에서도 제때 적절한 결과물을 낼 줄 안다는 뜻이다. 배 사장이 맡은 회사마다 실적이 좋아 사장단 회의에서 겸손의 표현으로 “화투 뒷장이 잘 붙어 이번 달도 실적이 좋네요”라고 했던 말을 이웅열 회장이 기억하고 가끔 농담 삼아 꺼낸다.

어디 화투 뒷장이라고 아무에게나 붙겠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준비된 사람에게나 운이 따르는 법이다.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큰 운이 다가와도 의식조차 못하게 마련이다. 배 사장은 노력파다. 좌우명이 ‘땀 흘리지 않고는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없다’는 뜻의 ‘무한불성(無汗不成)’이다.

무한불성 정신은 건강관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루 30분씩 꼭 운동한다. 아침에 못 하면 저녁에라도 꼭 한다. 6시10분에 일어나 30분 동안 운동하고 집에서 7시10분쯤 회사로 간다. e-메일 챙기고 신문과 서류 등을 정리하고 8시30분에 일과를 시작한다. 그는 “30분이란 시간은 짧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는 걸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30분이든 1시간이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정한 시간을 공부했다.

자기관리가 엄격한 그는 비즈니스에서는 신뢰를 첫째 덕목으로 친다. 영업 부문에서 오래 일해서일까? 자신이 갑의 입장이든 을의 입장이든 거래처와 신뢰를 쌓고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꽃집 경영론을 보자. 영업통인 그는 길·흉사를 꼭 챙긴다. 고객과 관련된 경조사라면 특히 그렇다.

배영호 사장(왼쪽)이 1987년 7월 8일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파이어스톤(일본 브리지스톤에 합병) 기술연구센터를 방문한 후 시내관광에 나섰다.

1998년 코오롱유화·제약 사장을 맡고 보니 부서마다 서로 다른 꽃집과 거래하고 있었다. 경험상 좀 더 정성스레 만든 화환이나 조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데 부서마다 거래처가 다르니 더 나은 서비스를 요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부서별로 의견을 모아 꽃 배달 가게를 하나로 통일하라고 지시했다(자신이 나서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꽃집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은 대개 날짜가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큰 상관없지만 흉사는 갑자기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가능한 한 빨리 정성 들여 조화를 보내려면 단골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꽃집을 하나로 통일했더니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꽃집에서 흉사 때 조화를 배달하고 나서 언제 배달했는지 회사에 휴대전화로 알려주는 서비스도 했다.



적정 마진 보장이 상생협력 지름길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났다. 어느 결혼식에 배 사장 명의로 화환을 보냈는데 정작 식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신랑 측에 가야 할 화환이 신부 측에 놓여 있었다. 결혼 축하 화환의 경우 신랑 측에는 결혼, 신부 측에는 화혼이라고 써서 보내는데 그걸 거꾸로 써서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결혼식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한 배 사장은 꽃집에 다시는 실수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화가 난 배 사장은 한 번 더 실수할 경우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경고했다. 그러고 나선 지금까지 10년 넘게 실수한 적이 없다. 물론 꽃집을 바꾸지도 않았다. 신뢰가 쌓인 것이다.

3월 초 지인의 결혼식장에 간 배 사장은 화환이 다소 빈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대표 명의로 보내긴 하지만 실제론 회사 이미지나 위상과 관련이 있는데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꽃집이 야속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불현듯 지금까지 꽃값을 거의 올려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집에서는 중요한 거래처를 놓칠 수 없어 가격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배 사장은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총무과에 얘기해 꽃값을 10% 정도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가만히 있는데 가격을 올려주니 꽃집에서 얼마나 고맙겠어요”라며 웃었다.

배 사장은 타이어코드 사업 담당 부장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시에는 배 사장이 수혜자였다. 타이어코드 사업의 적자를 해결할 방법은 새로운 거래처를 찾는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세계 1위 업체 굿이어를 집중 공략했다. 굿이어만 뚫으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해결되리라는 기대로 1년6개월가량 공을 들였다. 끈질긴 노력 끝에 30년간 구매 업무만 맡아온 굿이어 구매 담당자 톰슨의 마음을 움직여 납품 승인을 받았다(굿이어 공략에 성공한 후 브리지스톤, 미쉐린, 콘티넨털, 요코하마 등 세계 빅10 업체와 줄줄이 납품 계약을 했다).

굿이어는 세계 1위답게 타이어코드 값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가격이 달라지면 정확하게 반영했다. 내릴 때만 재빨리 내리고 올릴 때는 나 몰라라 했겠지 싶지만 그러지 않았다. 타이어코드 값이 오르면 말하지 않아도 먼저 올려줬다. 당연히 그냥 믿고 거래해도 되겠다 싶었다. 배 사장은 “요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강조하는데 적정 마진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자 신뢰를 쌓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신뢰를 먼저 지킨 일화도 있다. 역시 타이어코드 사업부장 시절 얘기다. 팩스도 없어 텔렉스로 거래처와 커뮤니케이션하던 때다. 어느 날 직원이 ㎏당 2달러55센트인 제품 값을 2달러25센트로 잘못 보냈다. 타이어코드는 원자재이기 때문에 1%만 싸도 꽤 경쟁력이 있다. 거의 10%가 싸니 거래처에서는 횡재 했다 싶어 곧바로 주문을 냈다. 나중에 사태를 파악한 직원이 노랗게 변한 얼굴로 배 사장을 찾아왔다. 주문을 다시 내겠다는 보고였다. 고민하던 배 사장은 “우리 실수이니 이번에는 손해를 보자”고 말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면 코오롱의 텔렉스를 어떻게 믿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정중하게 다시 문서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번 거래분부터 정상 가격을 받겠다고 알렸다. 결과는? 그 거래처와는 지금도 거래하고 있다.



강성 노조 문제도 신뢰로 풀어강성 노조 때문에 몸살을 앓던 코오롱 사장을 맡았을 때도 신뢰로 문제를 풀었다. 은퇴할 나이였던 그는 중책을 맡아 고민에 빠졌다. 노사문제를 어떻게 풀까? 결론은 간단했다. “나를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노조에 1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합당한 대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명이던 비서를 한 명으로 줄이고 차도 팔았다. 골프 회원권도 정리했다. 그렇게 마련한 20억원으로 공장 직원들에게 100만원씩 나눠줬다. 대개 술값 등이 밀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걸 갚으라는 뜻이었다. 설사 빚을 다 갚진 못하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일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노조도 화답했다. 항구적 무분규 선언을 했다. 이듬해 회사 실적이 나아졌다. 월급은 거의 올려주지 못했지만 성과급을 나눠줬다.

가는 부서나 회사마다 그룹의 캐시 카우(현금 창출원)로 만든 배 사장은 큰 목표가 있다. 단기적으론 그룹을 30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코오롱은 예전에는 10대 또는 20대 그룹에 들었지만 지금은 30대 밖이다. 그래서 당장 성장이 급하다. 코오롱인더스트리가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그의 어깨도 무겁다. 그는 “제조업에서 투자 말고 공격 경영이 뭐 있겠어요”라며 올해 5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균형 이룬 4개 사업군으로 꾸준히 성장


옛 ㈜코오롱으로, 1957년 한국나이롱주식회사로 출범한 코오롱그룹의 주력 회사. 2007년 코오롱유화와 FnC코오롱을 합병해 산업자재(타이어 보강재·에어백 원단 등), 화학(석유수지·하이레놀 등) 필름·전자재료(나일론 필름·액정표시장치용 필름 등), 패션(아웃도어·골프·캐주얼·명품 등) 등 4대 사업군으로 재편했다. 사업군별 매출 비중은 20~25%로 마치 탁자의 네 기둥처럼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 덕분에 업황 변화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지난해에는 코오롱의 제조사업 부문을 분리해 사업 전문회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난해 매출은 3조2000억원. 그룹 전체 매출의 40%에 이르는 수치다. IFRS(국제회계기준) 연결실적으로 추산하면 매출은 더욱 늘어난다. 해외법인의 매출 3000억원에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지분 63%를 가진 글로텍 실적까지 보태면 5조원에 이른다.

섬유 사업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1970년대부터 자동차 타이어용 소재 사업에 진출했다. 1980년대 들어선 필름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1988년 국내 첫 IT(정보기술) 분야에 쓰이는 필름을 만들었다. 1990년대에는 초극세사를 개발했고, 2000년대에는 디스플레이용 전자재료, 강철보다 강한 첨단 신소재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남승률 기자 nam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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