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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남겨 상속분쟁 ‘뚝’

유언장 남겨 상속분쟁 ‘뚝’

그리스도신학대학의 설립자이자 국제사회사업가협회 평생회원이었던 한국사회개발연구원 원장 김운초 선생은 평생을 사회사업가로 살았다. 한국 사회복지계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김운초 선생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숭고한 뜻을 남기려고 했다. ‘본인 유고 시 모든 부동산(200억원대)과 금전신탁, 예금 전부(123억원)를 연세대에 한국사회사업 발전기금으로 기부하나이다. 1997년 3월 8일 김운초’ 라고 유언장을 자필로 직접 작성하고 서울시 양천구 목동의 한 은행의 대여금고에 넣어뒀다.

김운초 선생은 독신이었기 때문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도 없었다. 그는 2003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김운초 선생이 자필로 직접 작성한 유언장이 발견됐는데 거기에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운초 선생의 유족(동생·조카 등 7명)과 연세대 측은 이 유언장의 효력과 고인의 뜻에 대해 팽팽히 맞섰다. 법원에서는 일단 ‘부동산과 현금 7억원은 연세대가, 나머지 116억원의 예금은 유족에게 상속하라’는 강제조정안을 내놓았다. 강제조정은 법원이 소송 당사자 사이의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 판결 전에 내리는 결정이다. 결정 후 2주 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그러나 양측 모두 조정안을 거부했다. 이어진 3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대법원은 “유언자의 날인이 없는 유언장은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기 때문에 민법상 무효”라고 판결을 내렸다. 날인이 없는 김운초 선생의 유언장은 백지화됐다. 결국 3순위 상속인인 유족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연세대는 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을 제기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도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부자들이 유언장에 관심을 많이 가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요즘 부쩍 유언장 작성을 검토해보자는 문의가 늘었다. 지구촌의 대지진, 이상기후 등이 잦자 갑작스러운 재난의 무서운 힘을 인력으로 막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인 듯하다. 만약의 상황에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특히 한국 자산가는 자산 가운데 분할하기 쉬운 금융자산보다 나누기 복잡한 부동산 비중이 크기 때문에 유언장 작성의 필요성을 더욱 많이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양과 달리 국내에서는 유언장 작성에 대한 인식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유언장을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려면 민법에서 정한 유언 방식대로 유언장을 작성해야 한다. 가장 많이 활용되는 유언 방식은 공정증서방식 유언과 자필증서방식 유언이다. 공정증서방식 유언은 변호사가 작성하고, 자필증서방식 유언은 유언자 스스로 작성한다.



법정분쟁 피하는 유언장의 요건 공정증서방식 유언은 공증업무를 등록한 변호사를 만나 2명 이상의 증인이 입회한 가운데 유언 내용을 공증인에게 구술해 적는 방식으로 만든다. 유언장 정본과 등본은 유언자에게 넘기고, 원본은 공증사무소에서 보관한다. 공정증서 유언은 변호사인 공증인이 작성하기 때문에 확실하고 안전하며, 유언자의 의사가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점이 장점이다. 공증사무소에서 유언장 원본을 보관하기 때문에 분실, 은닉, 파기 등의 위험도 적다. 검인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장점이다. 다만 공증인을 비롯한 2명 이상의 증인이 유언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유언 내용을 철저하게 비밀로 부칠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정증서 수수료는 일반적으로 (유증의 가액×3/2000)×2만1500원이다. 300만원이 상한선이기 때문에 자산가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자필증서 유언은 본인이 스스로 작성한다. 이 방식의 유언장이 효력을 가지려면 다섯 가지 요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명, 주소, 날짜, 자필 전문, 날인 등이 꼭 필요하다. 증인 없이 혼자 작성해도 되지만 김운초 선생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섯 가지 요건을 반드시 지켜야 법률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필증서 유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짐없이 직접 자필로 써야 한다. 컴퓨터나 타자기로 쓰면 무효가 된다. 성명, 주소, 날짜도 자필로 정확히 써야 한다. 날인도 반드시 해야 한다. 날인은 인감도장뿐만 아니라 막도장을 써도 무방하다. 심지어 손도장(지장)도 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자필증서 유언장은 이렇게 간단하게 비용 부담 없이 혼자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보관 문제가 남는다. 부주의로 분실될 수 있고, 사후에 위·변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언장을 발견한 사람이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이라고 판단할 경우 은닉하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다.

두 가지 유언 방식뿐만 아니라 유언 내용을 녹음을 통해 남길 수 있는 녹음방식과 유언장을 봉투 속에 넣고 봉한 후에 증인의 서명을 받는 비밀증서 방식의 유언도 있다. 사후 분쟁이 예상되는 식으로 민감한 내용이 포함된 유언장이라면 비용이 들고 조금 번거롭더라도 공정증서 유언 방식으로 작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유언장은 한 번 작성했다고 영원한 건 아니다. 언제든지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서양의 백만장자들은 연례행사처럼 유언장을 수정하고 업데이트한다. 영화에서도 흔히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상속 개시 후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은 대부분 미리 작성된 유언장으로 예방할 수 있다. 민법에 따른 상속은 지분율만을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상속재산의 평가 방법과 분할 방법 등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기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유언장을 써 유언자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분할 재산과 분할 방법을 정확히 적어 놓으면 상속인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상속인 권리인 유류분 제도 염두에 둬야유언장 작성 때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하는 사항은 ‘유류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남매를 둔 아버지가 유언장 없이 60억원의 재산을 물려주면 두 남매는 유언자 재산의 절반씩인 30억원씩 나눠 갖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기면 어떻게 될까? 딸은 본인의 법정상속분인 30억원의 절반인 15억원을 오빠에게 청구할 수 있다.

이처럼 배우자와 직계비속은 자신의 법정상속분의 절반을, 직계존속과 형제자매인 상속인은 자신의 법정지분의 3분의 1을 유언에 관계없이 반드시 확보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이를 유류분이라고 한다. 만약 외아들을 둔 아버지가 재산 50억원을 모교에 준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면 그 외아들은 자신의 애초 법정지분 50억원의 절반인 25억원을 그 학교에 청구할 수 있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는 이런 유류분 제도를 염두에 두고 지나치게 편중된 유증은 삼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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