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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s business] 제왕의 퇴장

[icons business] 제왕의 퇴장


스티브 잡스는 ‘머글’ 사이에서 어떻게 마법사가 됐을까? 애플은 고집 세고 번뜩이는 영감을 가진 선장 없이 어떻게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갈까?
잡스처럼 기꺼이 실패를 무릅쓰겠다는 각오를 가진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ALAN DEUTSCHMAN 기자 끝마무리를 멋지게 장식하는 쇼맨은 관중을 완전히 사로잡아 쇼의 종료를 아쉽게 만든다. 그처럼 관중이 홀딱 반하고 경외심마저 자아내는 쇼맨 중 한 명이 검은 모크 터틀넥 스웨터를 즐겨 입는 남자, 스티브 잡스였다. 지난주 병으로 허약해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불행하게도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라고 발표했을 때도 그 시기는 절묘했다.

잡스는 자신이 세운 회사 애플에서 쫓겨나 오랫동안 쓰라린 ‘유배’ 생활을 한 뒤 1997년 여름 ‘구원 투수’로 애플에 복귀했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애플의 주가는 57배로 치솟았다. 1년 전인 2010년엔 막강한 숙적 마이크로소프트마저 제쳤고, 이제 시가총액 3500억 달러로 세계에서 자산가치가 가장 높은 회사의 대열에 올랐다(엑손모빌에 이어 2위).

애플은 수익을 너무도 빨리 너무도 많이 올린 나머지 현금과 투자 자금으로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인 760억 달러를 보유한다. 캘리포니아주 경계 바로 너머 리노에 위치한 브레이번 캐피털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회사에 그 현금을 예치해 두었다고 추정된다(리노가 위치한 네바다주는 법인세나 양도소득세가 없다).

잡스는 그 14년 동안 이전에 애플에서 이루지 못했던 일을 마침내 해냈다. 1976~85년 그는 애플에서 멀리 앞을 내다보는 비상한 제품 기획자로 한 몸에 갈채를 받았지만 사업가로서는 존경받지 못했다. 애플의 이사진마저 좀 더 노련한 경영자를 영입하고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이제 잡스는 56세의 나이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명예회장에 버금가는(일부에선 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현 시대에 가장 높이 평가 받는 사업가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동안 잡스는 누구보다 고집 센 경영자로서 번뜩이는 영감, 독불장군식 저돌성, 본능에 입각한 직감을 혼합해 자신의 걸출한 미래상을 실현했다. 잡스는 소비자에게 갖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넣고 회사를 풍요롭게 만든 제품만 창안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산업 전체를 갈아엎었다. 스티브 잡스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PC)부터 음악 산업, 출판, 할리우드까지 근본적으로 변했다.

잡스의 성공을 이해하려면 그의 인생 궤적부터 살펴봐야 한다.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태도나 발상의 전환이라는 그의 열정 모두 성장 배경에서 비롯됐다. 해리 포터처럼 그는 부적응아였다. 입양아였던 잡스를 머글(‘해리 포터’에서 마법을 쓰지 못하는 보통 아이들) 사이에 숨은 마법사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양부모였다.

잡스는 두 ‘마법사’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부와 생모 두 사람 모두 위스콘신대 대학원생이었다(시리아에서 이민해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던 압둘파타 잔달리와 언어병리학 석사 과정에 다니던 조앤 심슨). 스티브 잡스는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사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해리 포터의 양부모와 달리 잡스 부부는 정이 많고 후한 지지자였다. 하지만 근로계층이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머글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10대 시절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꿈꾸던 ‘지식인/예술가’라는 고매한 부류엔 들지 못했다.

그후 잡스가 사업가로서 보여준 네 가지 특징(뛰어난 설득력, 부단한 위험 감수, 보기 드문 협상력, 치열한 완벽 추구)은 그의 10대 시절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첫 세 가지는 대학 시절의 짧은 일화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함께 현시대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퇴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잡스의 경우는 ‘중퇴’이긴 하지만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 ‘학교를 다니다가 의미가 없어서 그만두었다’라기보다 ‘너무도 원해서 잠시 학교에 다녔다’는 말이 맞다.

그는 양부모가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능력과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에 등록했다. 당시 그 학교는 반문화와 예술로 유명한 좌익 이지주의의 보루였다. 첫 등록금을 못 낸 잡스는 학장을 설득해 한 학기 동안 기숙사에 머물며 무료로 수업을 들었다. 일류 대학에 다니고 싶어 했고 자신이 머글이 아니라 실제 마법사임을 학교가 인정해 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잘 설명해 주는 일화다. 아울러 설득과 협상에 능숙했고, 진정한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험심이 강했다는 점도 말해 준다.

리드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니면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친구인 엘리자베스 홈스는 잡스가 섭식장애에 시달린다고 걱정했다. 잡스는 열매(과일과 견과류)만 고집하는 극단적인 ‘프루테어리언(fruitarian)’으로, 너무나 적은 열량만 섭취해 늘 공복증에 시달렸다. 잡스에겐 그 자신이 완벽해야 했기 때문에 그가 먹는 음식 역시 그처럼 완벽해야 했다.

20대 초반에 이미 돈 많고 유명해진 그는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동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잡스’라는 명성이 주는 위압감에 주눅 들지 않고 그에 맞서서 강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동료 말이다. 그는 고집을 내세우긴 하지만 내심 학력과 경험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를 공개적으로 인정사정 없이 깔아뭉개면 그 동료가 자신의 주장에 얼마나 확신을 갖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이건 너무 후졌어!” 또는 “개판이야!”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맹렬하게 반격하면 열정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필수적인 기술 식견이나 미적인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찍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인식했지만(예컨대 그는 첫 개인용 컴퓨터 애플I을 아름다운 금색 코아 나무 상자에 넣기를 원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취향에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마침내 엄격한 미니멀리즘이 주는 안전함에 기대기로 했다.

잡스는 우수한 엔지니어나 창의력이 뛰어난 인물이 오히려 잔인한 비판에 더 고무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속으로는 자신이 알려진 것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혹독한 비판을 가하면 그들이 그런 생각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분발하는 자극제가 된다. 잡스가 무자비하게 높은 수준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치열하게 노력했다.

아울러 잡스는 심리 게임에도 일가견을 갖게 됐다. 당근(후한 칭찬)과 채찍(섬뜩한 멸시)를 번갈아 사용하며 인정 많은 형사와 악질 형사의 양면 역할을 연출했다. 대부분 잘 먹혀 들었다. 그런 몰아붙임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물론 도가 넘치면 그들은 잔인한 심리적 타격을 수용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잡스는 혁신적인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높은 위험을 감수했다. 포커스 그룹(초점 집단 면접: 소수의 응답자와 집중적인 대화를 통해 제품의 정보를 얻는 소비자 조사 방법)과 시장조사 등 흔히 기대는 수단을 피하고 순전히 자신의 직감에 기댔다. 굴욕적인 실패도 많았지만 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애플I은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애플II는 대박을 터뜨렸다. 리자 컴퓨터는 실패했지만 매킨토시 컴퓨터는 초기의 부진함을 딛고 결국 성공했다.

이제 애플은 최고의 회사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10년 전만 해도 잡스가 궁지에 몰려 고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그는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이래 ‘재기’를 장담했지만 그가 이룬 성공은 일시적이고 지속불가능해 보였다. 대담하게 화려한 색상에다 충격적인 곡선미를 자랑하며 애플이 재도약시킨 아이맥 컴퓨터가 곧 시장에서 죽을 쑤었다.

잡스가 그 다음 대작으로 내세운 맥큐브 컴퓨터는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지만(제품 평론가들은 미니멀리스트 조각품처럼 아주 작고 하얀 박스인 그 컴퓨터를 좋아했다) 시장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2000년 9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애플의 주식은 53달러에서 14달러로 곤두박질쳤다. 그 때문에 2000년 마지막 분기에 2억47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금융전문 온라인 매체 CBS 마켓워치는 잡스를 그해의 ‘최대 패배자’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러나 2001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콘퍼런스(열성팬 수천 명 앞에서 잡스가 예언적인 선언을 하는 연례 행사)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낙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실제로 예지력이 뛰어났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기조 연설에서 그는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시대’를 예고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더 날렵하고 민첩한 기기가 PC로 연결되며 PC는 그 연결 중심 역할만 하게 된다는 선언이었다. 음악 재생기,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휴대용 전자수첩 등 소형 이동기기를 말한다.

2001년 11월 애플은 아이팟을 출시했다. 잡스가 예고한 바로 그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첫 제품이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는 ‘자기 점심은 다른 사람이 와서 먹기 전에 빨리 먹어 치워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좀 더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기잠식 효과(cannibalization effect)’다. 유사한 신상품의 개발로 원래 제품의 매출 감소를 감수해야 성장한다는 뜻이다. 잡스는 아이팟에 이어 곧바로 아이폰을 선보였다. 자기잠식 효과를 노린 전략이었다.

아이폰 전화기의 화면 아래 작은 아이콘 사이에 ‘아이팟’이 들어 있다. 원래 아이팟은 399달러다. 그런데 그런 고급 기기가 아이폰에서 시동되는 무료 소프트웨어(앱스) 중 하나로 바뀌었다. 신제품이 너무 강력하고 용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기존 제품을 아침 식사로 해치워버린 셈이다.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종처럼 말이다. 실리콘밸리에선 누구나 자기잠식 효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행에 옮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신상품을 도입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제품을 사장시키는 일은 지독히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런 끔찍한 위험 감수가 스티브 잡스의 보증 마크이자 성공의 열쇠였다.

아이폰의 다른 놀라운 요소 중 하나는 ‘멀티터치’ 기능이다. 엄지와 검지를 함께 화면에 대고 좁히거나 벌려 콘텐트를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 있다. 애플이 멀티터치 기능을 고유한 혁신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어느 작은 회사가 개발한 기술이었다. 그 회사를 애플이 2005년 인수했다. 원조 매킨토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잡스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혁신을 발견하는 눈도 빨랐지만 그 혁신이 아직도 신선하고 경이롭게 인식되는 동안 자신의 팬에게 그 체험을 안겨다주는 데도 천재였다.

물론 아이팟과 아이폰이 수억 대나 팔리면서 진정한 숭배 대상의 영역까지 도달했지만 애플을 인터넷 시대의 지배자로 이끈 진정한 혁명은 그런 기기가 아니라 2003년 4월 개설된 아이튠즈 스토어였다. 아이튠즈의 등장은 현대 비즈니스 역사에서 가장 대단한 8년 연속 성공의 시작을 알렸다. 그 기간은 잡스의 암투병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2003년 여름 희귀한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회의론자들이 아이튠즈를 무시했다. 애플이 판매하는 99센트짜리 음악 하나에서 약 10센트씩 남기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플은 아이튠즈 덕분에 끊임없는 수익원을 갖게 됐다. 앨 고어 전 미 부통령이 ‘정보 고속도로’라는 미래상으로 주목을 받던 1990년대 초 경제 전문가들은 그런 ‘소액결제(micropayments)’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결국 잡스와 애플이 소액결제 개념을 완성했다. 그 과정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잡스는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 소비자 2억 명 이상에게서 신용카드 정보를 얻고 손가락 터치 하나로 상품 구매가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소비자들은 아이튠즈를 통해 음악만이 아니라 각종 앱스와 책 등 갖가지 상품을 구매한다. 잡스 시대 이후에도 애플의 진전에 밑거름이 될 훌륭한 자산이다.

겉보기에 스티브 잡스는 그의 후임으로 CEO를 맡은 애플의 오랜 2인자 팀 쿡과 비슷하다. 특히 열정적인 면이 그렇다. 두 사람 모두 일중독이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으며(그러나 정치에 적극적이진 않다), 사생활을 매우 중시한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다(올해 50세인 쿡은 잡스보다 여섯 살 아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심리학자 마이클 매코비는 베스트셀러 ‘자아도취형 리더가 성공한다(The Productive Narcissist)’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자아도취형 CEO를 극찬했다. 그들은 뛰어난 쇼맨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바탕으로 믿기 어려운 위험을 감수하고, 대담한 자신감을 가진 예지력 있는 인물이라고 그는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CEO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불안하다. 따라서 침착한 오른팔과 쌍을 이루면 큰 도움이 된다. 회사가 순조롭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도록 막후에서 조용히 일하는 믿음직한 임원을 말한다.

애플의 놀라운 성공에서 쿡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속 그러리라는 주장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잡스가 언제나 최상의 1인자인 반면 쿡은 언제나 최상의 2인자라는 사실이다. 쿡은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이 없다. 그는 세상이 제대로 잘 돌아가게끔 만드는 사람일 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스티브 발머가 빌 게이츠가 될 수 없듯 팀 쿡 역시 스티브 잡스가 되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쿡이 잡스 스타일의 리더로 변신하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는 잡스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일하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사실 잡스 자신도 계속 변신하며 성장했다. 애플의 경영을 두 번째로 맡으면서 잡스는 첫 경험에서 터득하지 못했던 모든 비즈니스 기술을 완전히 익혔다. 재고 관리처럼 빛나진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일들 말이다. 그는 앞을 내다보고 길을 제시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제조, 마케팅, 판매, 디자인, 광고를 비롯해 모든 면을 아우르는 완벽한 경영자가 됐다. 과거에 그는 빌 게이츠의 성공한 사업가라는 평판을 부러워했지만 이제 잡스 자신이 그 모범으로 비친다. 쿡도 대단한 인재이기 때문에 그 역시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른다.

적어도 애플은 향후 2년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올가을 아이폰 새 모델을 출시하고 2012년엔 아이패드의 새 모델을 내놓을 계획이다. 더구나 잡스는 애플 전체에 자신의 문화 DNA를 심었다. 문화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애플 직원들은 잡스의 태도와 방식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가 떠나 있던 10년 동안 애플의 문화가 지속되긴 했지만 그의 지도력 없이는 그런 문화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다음의 제품 개발을 누가 어떻게 주도할까? 시장의 판도를 바꿀 차기 제품이 무엇인지 안다고 장담할 만큼 자신을 갖고 용감하게 방아쇠를 당길 사람이 누구일까? 그 ‘아이…’ 제품이 실패할 경우 그 지도자가 곧바로 다른 ‘아이…’를 선보일까? 잡스처럼 기꺼이 실패를 무릅쓰겠다는 각오를 가진 지도자, 그의 끈기와 고집, 복원력, 거창한 자존심, 자신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갖춘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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