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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에 밀리는 ‘중국판 스티브 잡스’

애플에 밀리는 ‘중국판 스티브 잡스’

베이징에서 있었던 IBM의 PC사업 부문 인수 계약식에 참석한 류촨즈 회장.

혁신과 도전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드라마와 같은 짧은 삶을 마감하고 운명했다. 그의 타계를 바라보는 중국 최대 PC 제조업체인 레노보의 류촨즈(柳傳志) 회장의 심경은 어떨까?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파산 위기에 놓인 애플에 복귀해 히트작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애플 신화’를 창조했듯이 류 회장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베이징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레노보를 창업한 류 회장은 2005년 IBM의 PC 부문을 인수하면서 레노보를 단숨에 세계 4위 PC 제조업체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홀연히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레노보가 2008년 하반기 들어 11분기 만에 처음 적자를 기록하는 등 위기에 몰리자 회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2009년 2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류 회장 복귀 이후 레노보는 시장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하면서 과연 류촨즈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판 스티브 잡스’라고도 불린다.

류 회장이 경영에 참여한 이후 레노보의 중국 PC시장 점유율은 30%를 넘으면서 수년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만간 델을 제치고 세계 PC시장 2위 자리까지 넘볼 기세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1년 안에 HP를 누르고 세계 최대 PC 메이커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애플과의 관계는 다르다. 현재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분야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레노버와 애플의 경쟁에서 레노보가 밀리는 형국이다. 올해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한 중화권 매출에서 애플은 레노보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올 2분기 애플의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무려 5배 늘어난 38억 달러를 기록한 반면 1분기 레노보의 중국 내 판매액은 겨우 23.4% 증가한 28억 달러에 그쳤다.



레노보 스마트폰·태블릿PC 인기 없어레노보는 애플 대항마로 태블릿PC인 러(樂)패드와 스마트폰 러(樂)폰 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소비자 반응은 미지근하다. 야심 차게 출시한 러패드의 가격은 2499위안에서 지난 10월 1일 국경절 연휴기간 동안 1000위안으로 폭락했다. 마치 얼마 전 HP가 하드웨어 사업의 분사를 결정하면서 99달러라는 헐값에 터치패드를 떨이 판매한 것을 연상시킨다. 시장에서는 사실상 러패드의 판매 실패에 따른 재고처리 시그널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레노보가 중국 PC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태블릿PC도 상당한 관심을 끌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불안정한 소프트웨어와 제한적인 애플리케이션만 사용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애플 전문매장은 레노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소비자들은 아이패드에 환호한다. 이런 상황은 류 회장이 중국 시장에서 레노보의 인지도가 애플보다 높은 게 강점이라고 말한 걸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레노보가 중국 시장에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고정 소비자층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태블릿PC와 스마트폰 등에서는 오판으로 드러난 것이다.

태블릿PC의 진화로 전통 PC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레노보에 곤혹스러운 대목이다. 류 회장은 생활필수품처럼 변한 PC 수요는 영원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실제 시장 상황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넷북 판매가 감소하고 가정용 PC 사용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실제 에이서가 올해 PC시장 3위 자리를 레노보에 내준 이유도 넷북 열풍이 식으면서 PC 판매량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양위안칭(楊元慶) CEO도 “경쟁업체들의 태블릿PC 출시가 PC시장의 성장을 약화시켰다”며 고개를 저었다.

레노보의 야심작인 러폰 역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류 회장이 “우리는 아이폰과 싸울 준비가 돼 있다”면서 자신감을 보인 러폰은 중국인의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 폰으로 설계했다. 스마트폰에 들어갈 다수의 애플리케이션도 현지시장에 적합하게 만들어 애플과 차별화를 꾀했다. 러폰의 검색엔진을 구글 대신 현지 1위 검색 업체인 바이두로 교체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 아이폰과 삼성 스마트폰, 기타 계열의 삼각 대결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로컬업체 중에서 레노보 러폰은 중싱(中興)과 화웨이에도 밀리는 형국이다. 판매대수로만 보면 러폰은 짝퉁 산자이폰에도 뒤처지고 있다. 게다가 러폰은 아이폰을 모방한 짝퉁에 불과하다는 평가까지 듣고 있다.

러폰과 러패드의 판매부진으로 초조함이 역력해 보이는 레노보 수장의 표정을 볼 때 레노보 스스로 애플을 꺾기란 사실상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레노보가 애플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스티브 잡스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 중국 인터넷상에는 우리는 왜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지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한 포털 사이트는 중국에도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이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설문조사까지 진행했다. 이 결과 63.3%에 이르는 응답자가 ‘지금 당장은 나타나지 못할 것’으로 응답했고, 28.9%는 ‘불가능할 것’으로 답했다. 겨우 7.8%에 이르는 응답자만이 ‘앞으로 20년 정도 지나야 나타날 것’으로 회신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인 결과가 나온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중국인들은 ‘양떼 효과(herding effect)’의 경향이 아주 강하다. 양떼 효과란 무리에서 혼자 뒤처지거나 뒤떨어지는 것을 싫어해 다른 이들을 따라 하는 일종의 군집효과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주류의 관점이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직원은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튀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저 묻어서 남들 하는 대로 할 뿐이다.



베끼기 만연한 풍토가 걸림돌다음으로 취약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들 수 있다. 많은 시간과 막대한 돈을 투자해 신제품을 개발해봤자 금방 모조품이 나오기 때문에 창조와 혁신에 대한 의지가 생겨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중국 기업들은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고 주도할 제품 개발 대신 그저 남의 히트작을 뒤에서 모방하는 것을 생각한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제철소 건설을 위해 신일본제철을 찾았을 때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과 나누었던 일화가 있다. 덩샤오핑은 중국에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신일본제철에 요청했지만 이나야마 회장은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짓는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류촨즈 회장에게 이 일화를 들려준다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질지 궁금하다.

류 회장은 미국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해외 고급인재 유치에 대해 말하면서 “중국 업체들이 기술력 향상에 주력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스티브 잡스 생전에 그의 성격이 까칠하다며 문제 삼았던 류 회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중국판 스티브 잡스가 하루빨리 나오기를 고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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