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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REMENT] 여행은 인생과 같아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지

[RETIREMENT] 여행은 인생과 같아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지


이해욱 전 KT 사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국가를 여행한 한국인이다. 그는 인생 후배들에게 일단 떠나보라고 권한다. 여행을 다니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2월 8일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벨을 누르니 인상 좋은 노신사가 문을 열어준다. 이해욱(74) 전 KT 사장이었다. 그는 1993년 은퇴한 이후 이곳을 아지트 삼아 세계 여행 전략을 세웠다. 66㎡(약 20평) 남짓한 공간은 여행 관련 자료로 가득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은 한국과 일본, 미국의 여행 책자로 빼곡했다. 반대편 벽에는 그가 직접 인터넷을 뒤져 찾은 자료들이 1m 높이로 쌓여 있었다. 각 파일에는 한국과 일본, 미국 웹사이트에서 찾아 프린트한 여행 정보들이 정리돼 있었다. 여행 전문 고서점 같았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미소를 지으며 책상에 준비한 자료를 올려 놨다. 질문 10개를 미리 보냈는데 A4지 10장 분량의 답변서를 만들었다. 곳곳에 형광펜, 붉은색과 파란색 사인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만 보고도 그의 꼼꼼한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욱 사장은 작은 일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수개월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정했다. 이런 철저함으로 그는 지금까지 192개국을 돌아다녔다. 이 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해외여행을 꿈꿨다고 한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문물을 보고 배우고 싶었는데 현실은 만만치 않았지요. 예전에는 외국 나가는 사람을 나라에서 직접 관리를 했을 정도니까요. 1971년 운 좋게 일본 출장을 다녀오게 됐습니다. 도쿄 거리를 걸으니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아내와 함께 떠난 유럽 배낭여행


그는 방으로 들어가 장부를 하나 들고 나왔다. 그곳에는 각 나라를 방문한 날짜와 교통편, 사용 금액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 일본 출장 당시의 기록이 있었다. 수첩도 하나 보여줬는데 표지에 ‘1971년 일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첩을 펴자 깨알 같은 글씨로 출장 당시 겪은 일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런 수첩을 100개 넘게 가지고 있다.

그는 여행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의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도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가는 곳마다 사고였다고 한다.

“비행기표를 잘못 끊거나, 호텔을 예약하지 못해 공항에 묶인 일도 있었어요. 계획이 틀어져 난감하던 차에 지나가던 미국인 부부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마친 일도 있지요. 젊어서 의욕이 넘칠 때는 마음만 급하지요. 실패를 거듭하며 배우는 게 인생입니다. 여행도 같습니다. 놓친 비행기가 하늘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다음에 잘해야지 생각하게 되죠.”

이 사장은 여행 실패담을 들려줬다. 1979년 체신부 우정국장을 맡고 있을 당시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브라질에 머물고 있었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이틀 정도 시간이 나자 인근 나라 여행 계획을 세웠다.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미처 짐을 싣지 못한 상태에서 비행기가 출발한 것이다. 숙소도 문제였다. 국제행사 관계로 호텔 방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공항 경찰을 찾아갔다.

“다급한 마음에 ‘호텔, 호텔’이라고 외쳤는데 다행이 그 중 한 명이 알아들었습니다. 전화기를 잡고 이곳 저곳 통화를 하더니 주소를 하나 적어주더군요. 고마운 생각에 인사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총 쏘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신문에 박정희 대통령 서거 기사가 실렸더군요.”

이 사장은 “당시 이틀간 여행을 하면서 골치 아픈 사고는 다 겪었다. 여행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틈틈이 여행을 다니던 이 사장에게 든든한 원군이 생겼다. 아내가 여행의 동반자로 참여한 것이다.

“아내도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장인 어른은 해방 이후 최초의 해외 여행기인 『구미체류기』라는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한 분이셨는데, 그분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저는 93년 3월에 은퇴했습니다. 아내와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난 것이 그 해 6월입니다. 3개월 만에 후다닥 짐을 싸서 떠난 것을 보면 우리 부부가 꽤 금슬 좋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 사장은 부부 동반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로 유럽을 잡았다. 치안이 안정적인데다 아내가 좋아하는 미술·박물관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행사 패키지가 편하긴 했지만 용기를 내 배낭여행을 선택했다. 이유가 있었다. 배낭여행은 페이스 조절이 가능했다. 또 젊은 사람들과 다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다른 일행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 “무엇보다 지금 못하면 배낭여행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무모하게 아내와 함께 25일간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부는 당시의 배낭여행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기차역을 혼동한 일도 있고, 숙소를 못 잡아서 헤맨 적도 있었다. 소매치기가 무서워 둘이 꼬옥 껴안고 걸어 다니기도 했다. 역시 가장 큰 수확은 이 사장 부부의 호흡이 잘 맞았다는 점이다. 서로 불평하지 않고 챙겨주고 양보한 덕에 즐거운 여행이 됐다. 이 사장 부부는 다음 여행도 유럽을 다녀왔다. 결국 그들은 2년 만에 유럽 28개국을 다 둘러봤다.

부부는 유럽 여행을 마치자 지도를 펴놓고 다음 장소를 물색했다. 그나마 젊었을 때 멀리 있는 곳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이 사장은 남미 대륙을 크게 3구역으로 나눴다. 그리고 교통편을 조사하며 이동 경로를 그려나갔다. 각 도시의 특성과 문화, 역사적 배경도 공부했다. 오피스텔 안쪽에 1m 높이로 쌓여 있던 파일의 정체는 당시 부부가 고생하며 모은 자료들이었다.

남미 여행 계획은 거창했다. 3번의 배낭여행과 패키지 여행 한번을 통해 27개 국을 돌아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준비를 마치고 항공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한항공을 찾아가 비행기 표 36장을 예약하려는데 실무자가 거부한 것이다. 아시아나항공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사에서도 어렵다는 답이 왔다. 이유는 여러 나라를 가려면 협약을 맺지 않은 항공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요금 계산이 너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여행을 포기하려는데 아시아나에서 연락이 왔다. 일정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힘들게 시작한 남미 여행은 1차 43일, 2차 55일, 3차 50일의 대정정이었다.

중남미 국가 중에는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 많았다. 호텔 방에 직원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 것, 누구에게도 방 번호를 알려주지 말 것, 호텔에서 잡아주는 택시 이외에는 타지 말 것, 경찰을 믿지 말 것,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다닐 것 등이 적힌 경고문이 붙어 있는 곳도 있었다.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하루에 한 명씩 죽어가는 동네라며 말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 사장 부부는 “여기서 죽으면 그것도 운명”이라며 여행을 강행했다.

당시 부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앙헬 폭포, 아즈텍과 잉카 문명의 발상지를 구경했다. 쿠바에서 생을 마친 헤밍웨이의 생가를 봤고 중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머물던 곳도 찾았다. 이 사장은 “중남미 특유의 문화를 만끽하며 곳곳을 다닌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이 마지막으로 탐험한 곳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는 모두 12번에 걸쳐서 돌았습니다. 3번의 패키지 여행은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문제는 서부와 중부 내륙 지역에 있는 국가를 찾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반대하더군요. 저도 위험한 곳에 아내를 데려가는 일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떠나게 된 것이지요.”

UN 회원국 192개국 가운데 53개국이 아프리카에 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기아와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문에 여행 패키지 상품도 없었다. 이 사장은 현지 한국인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위험한 지역이라 모두 철수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오지 여행 동호회를 찾아봤다. 카페나 블로그는 있었지만 휴면상태였다. 이 사장의 머리에 문득 일본이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오지만 다니는 여행사들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프리카 오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과 여행을 하며 많은 정보를 주고 받았습니다. 여행 패키지조차 없는 지역을 함께 다닐 수 있는 친구도 사귀게 됐습니다. 그렇게 192개국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장에게 여행은 인생과 같았다. 그는 여행을 하다보면 많은 일을 겪는다고 했다.

“힘든 때도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긴 여행도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착실히 준비할수록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고생도 덜하고요. 길을 떠나 사람을 만나고 서로 의지하며 도움을 받습니다.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며 헤어집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장은 지난해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세계는 한 권의 책』이란 여행기를 펴냈다. 혹시나 싶어 다음 여행 계획을 물었다. 이 사장은 새로운 계획을 신나게 풀어놨다.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 가봤는데 아직도 잘 모르는 나라, 아직 못 가본 나라들을 가봐야겠다는 것이다. 1938년생, 올해로 74살, 그는 아직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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