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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강한 승부사 제2의 신경영 이끈다

위기에 강한 승부사 제2의 신경영 이끈다



최지성(61)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 7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이 5월 2일부터 3주간 유럽과 일본 시장을 둘러

보고 귀국한 후 전격 결정했다. 미래전략실장은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자리다.

회장을 보좌하고 관계사 간 시너지 효과를 강화하며 신수종 사업을 챙기는 역할이다.최 신임 실장은 그룹 내 대표적인 전략통이자 영업통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최 실장은 글로벌 감각과 돌파력이 있고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이 강하며 마케팅 전략에 뛰어나 발탁됐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은 귀국하면서 “생각한 것보다 더 나빴던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전략가이자 마케팅 귀재삼성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이 회장이 특히 글로벌 경제위기의 대응 필요성을 강하게 주문했다”며 “제2의 신경영에 준할 만큼 또 한

번의 핵심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고 전했다. 최 실장이 선임된 6월 7일은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1993년) 19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이 회장은“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라”며 과감한 변화를 주문했다.

최 실장의 발탁 배경으론 휴대전화와 TV를 세계 정상급으로 만든 탄탄한 실적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들 수 있다. 앞으로 있을 이회장의 ‘제2의 신경영 선언’을 실천한 실무 적임자란 점이 고려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이 경기침체를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위기를 극복할 사람으로 최지성 카드를 꺼냈다는 평가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밀고 나가는 ‘킥 & 러시’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해나가는 ‘솔루션 제시형’ 경영 스타일을 지녔다. 그

는 실제로 30년간 삼성에 몸 담으며 영업 능력, 위기관리 능력과 돌파력을 보인 삼성의 대표 CEO다. 그는 삼성전자의 TV와 휴대전화를 세계 1등으로 키운 주역이다.

그는 특히 삼성전자의 간판 사업인 반도체나 휴대전화가 아니라 한때 삼성그룹의 골칫거리였던 TV 사업을 발판으로 그룹의 간판 CEO 자리에 올랐다. 그가 디지털미디어 총괄 사장으로 승진한 2004년만 해도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당시 삼성전자의 스타 CEO는 누가뭐래도 이기태 정보통신총괄 사장과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개성 있는 이력에 눈부신 실적을 앞세워 ‘포스트 윤종용’ 자리를 일찌감치 예약해 두고 있었지만 당시 최지성 사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으로 재임하던 3년간 삼성 TV 사업을 일약 세계 톱 반열에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MP3 플레이어와 디지털프린터 분야에서도 쾌속진군을 거듭했다.이 무렵 MP3 플레이어 세계 1위였던 아이리버의 양덕준 사장은 최지성 사장을 두고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고 결국 삼성전자가 1위에 올랐다.최 실장은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뚝심 있는 추진력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했다.

2010년 애플 아이폰 때문에 삼성의 휴대전화 경쟁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던 당시 그는 특유의 돌파력을 앞세워 애플 추격에 성공했다. 스마트폰 분야의 특허는 물론 소프트웨어 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지난해부터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애플을 뛰어넘고 있다.

아울러 두 차례에 걸친 회장비서실 근무이력도 있어 미래전략실 업무 역시 빠르게 장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그는 ‘타고난 장사꾼’으로 불린다. 말 그대로 한다면 했다. 그는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에 오르자 취임 일성으로 “3년 안에 소니를 잡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소니는 아날로그TV 시절부터 20여년 간세계 TV시장 1위를 놓지 않은 강자였다. 이듬해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2006년 보르도 TV를 내놓았다. 그해 1월 미국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서 보르도TV는 얇고 광택 나는 검정색 테두리에 스피커를 본체 뒤로 숨긴 디자인으로 경쟁업체에 충격을 줬다.

세계 TV업체들이 지금까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디자인이다. 이를 앞세워 삼성은 TV사업을 시작한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했다. 2007년 정보통신총괄 사장으로 옮긴 그는 “3년 안에 노키아를 넘어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당시 삼성이 연간 1억6000만대의 휴대전화를 팔때 노키아는 4억3700만대를 팔고 있었다. 그만큼 버거운 상대였다.

그는 그러나 약속을 지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휴대전화매출에서 노키아를 넘어선데 이어 올 1분기에는 세계에서 매일 휴대전화를 100만대 이상 팔며 수량에서도 노키아를 눌렀다. 스마트폰 판매에서도 애플을 추월했다.최 부회장은 언뜻 보면 눈초리가 아래로 처져 있어 선량하게 보인다. 이런 외모만 보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예상하면 빗나간 것이다. 그는 195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다니다가 서울로 가기 위해 다시 서울고 시험을 봤다. 고교 시절 별명은 ‘딸깍발이’였다. 꼬장꼬장한 자존심 하나로 사는 가난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고집도 세고 매사에 잘 따지고 드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교련반대 시위를 하며 거리로 내달렸다.




신입사원 시절 당차게 문제 제기삼성그룹 신입사원 때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1977년 경기도 용인의 삼성그룹 연수원 대강당. 4주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새내기’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선 한 사원의 발언에 강당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솔직히 말해 삼성의 신입사원 교육에 실망했습니다.

경쟁 그룹인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한다는데, 우리는 이게 뭡니까?”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신입사원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갔다.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신입사원들은 입사를 희망하는 삼성 계열사들 중세 개를 골라 1, 2, 3지망을 쓰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최 사장은 1, 2, 3지망 모두 삼성물산을 적어냈다. 절대 그렇게 써내면 안 된다는 연수원의 사전 지침을 어기고 말이다.이 일로 교육을 맡고 있는 임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갑론을박 끝에 젊은이의 패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최 사장은 결국 원하는 대로 물산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물산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1980년대 중반 반도체 해외 영업을 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신규 사업을 검토하는 업무를 하던 중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으로 발령이 났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닌 비전문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자들이 읽는 1000쪽짜리 교재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출장 일정을 짤 때도 그는 남달랐다. 그가 소개한 자신의 전형적인 남미 출장 일정. ‘일요일 인천 출발→같은 날 저녁 뉴욕 도착, 주재원들과 저녁→다음날 오전 사무실에서 업무보고→점심 먹고 상점 시찰→오후에 마이애미행 비행기 탑승→공항 도착 즉시 식당으로 직행, 주재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업무보고→새벽 1시 비행기 탑승→새벽 4시반 브라질 마나우스 도착→샤워 후 오전 7시 조찬→오전 8시30분부터 현지 공장 현황보고 및 현장 시찰→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4시간30분 걸리는 상파울루로 이동→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칠레 산티아고·페루 리마·콜롬비아 보고타 등에서 하루씩 체류하며 비슷한 일정 소화→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저녁 도착→다음날 아침 티후아나로 이동해 공장 방문→오후 차량을 이용,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옮겨 주재원과 저녁→밤 10시 LA 공항으로 이동해 다음날 0시50분 귀국편 탑승→다음날 인천공항 도착’.

총 9박10일의 숨 가쁜 일정이다. 삼성전자에서는 최지성(CHOI GEE-SUNG) 실장의 이니셜을 따서 ‘GS루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남미 출장 일정표가 생겼다고 한다.그는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지사장’으로 나갔다. 사내 스카웃이었다. 외국에서 ‘삼성’ 이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64KD램을 팔기 위해 전화번호부에서 ‘전자’와 ‘PC’라는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찾아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으로 ‘무박 2일’ 출장도 많이 떠났다. 밤길에 알프스산맥을 넘기도 했다. ‘유럽의 보부상(褓負商)’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그는 유럽 진출 첫해인 1985년 혼자서 100만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1986년 500만 달러, 1987년 2500만 달러, 1988년 1억2500만달러어치를 팔아 해마다 500%씩 판매를 늘렸다. 근성과 칼날 같은 일 처리로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금융 부문 빼곤 경험 풍부그의 주특기는 와인 원 샷. 큰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부은 뒤 한 번에 마신다. 오랜 해외 영업 때 써먹던 방법인데, 덩치 큰 서양인들도 두 잔이면 나가떨어졌다고 한다. 1991년 귀국한 그는 삼성전자 관리팀장에 올랐다. 영업맨 출신으론 최초였다. 이 무렵부터 경영진의 관심을 받은 그는 업무와 관련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강단으로 ‘최틀러’라는 별명도 얻었다.

본인은 요즘 ‘부드러운 남자’라고 말한다.삼성전자의 TV와 휴대전화 사업에 이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사업까지 관장한 후미래전략실에 입성한 그의 시대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직원의 충성도가 예전 같지 않은 데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까지 겹친 요즘 상황에선 특히 그렇다. 금융 경험을 빼곤 기획에서 마케팅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가 제2의 신경영을 어떻게 이끌지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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