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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rement] ‘독거 할아버지’ 남의 일 아니다

[Retirement] ‘독거 할아버지’ 남의 일 아니다



‘늙고 병들면 의지할 사람이 집사람 밖에 더 있겠어?’ 은퇴가 임박한 기혼 중년 남성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노년의 부부란 이처럼 서로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까운 존재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오랫동안 자식을 키우며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만큼,남편들은 막연히 나의 마지막은 아내가 지켜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어떨까? 노년에 배우자를 먼저 떠나 보내는 것은 사실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들에게 더 큰 일이다.

자칫 ‘가여운 독거노인’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그림을 미리 그려놓는 남편은 많지 않은 것 같다.일본의 고령화 문제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한 기업의 CEO이기도한 사하이 게이죠는 1980년대 초반 『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사별한 어느 고령 남성의 홀로서기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에세이는 이미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고령인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마지막은 아내가 지키겠지’ 막연한 기대 금물이 책은 저자의 아버지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암에 걸린 아내를 10개월 간 간병하다가 83세의 나이에 혼자가 됐다. 오랜 간병으로 체중은 13kg이나 줄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도 잠시, 눈앞에 닥친 현실은 암담했다. 당장의 의식주부터가 걱정이었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고 있는 그는 내심 아들과 함께 살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사망하기 전 아들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딸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가 됐다.

딸들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61세인 그의 첫째 딸은 아들 녀석부부와 손주 2명까지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간 수술을 받은 이후 몸이 부쩍 허약해진 사위를 간병하고 있었다. 둘째 딸 역시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바쁜 며느리를 대신해 곧 태어날 손주를 돌봐줘야 했다. 셋째 딸인 이 책의 저자는 독신이라 같이 살아도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한 해의 절반은 집에 없는 딸과 함께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엘리베이터와 마당이 없는 도쿄의 3층 건물에 살고 있어 나이 든 사람에게는 분명 불편한 곳이었다. 막내딸의 경우 물리적인 부담이 별로 없어서 같이 살기엔 가장 좋아 보였지만 부부 사이가 좋지 않고 사위와 성격이 잘 맞지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시집 간 딸에게 친정의 나이든 아버지는 어딜 가나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위와 손주한테 무작정 신세를 지는 것 또한

썩 내키지 않았다. 아내와 둘이서 아무 불편함 없이 살아온 ‘귄위적인’ 그에게 딸네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남은 인생을 당당하고 자유롭게 보내고 싶다며 자식들에게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일단 1년만 혼자 살아보고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자식들의 부담을 줄이고 사나이의 마지막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그의 홀로서기는 애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겨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가는 과정들은 고령사회에 홀로 남은 고령 인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길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그가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 큰 숙제는 무엇보다도 세끼 식사 준비와 가사 일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 도우미가 모든 걸 대신해 줄 순 없기 때문에 셋째 딸인 저자에게 장보기, 음식 만들기, 청소 등을 배웠다. 사실 혼자 남겨진 아버지를 걱정한 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나이 들어 새로운 걸 배우려니 힘에 부치고 도무지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갈수록 딸의 잔소리는 늘어만 가고 결국 부녀간의 갈등은 육탄전으로 치닫게 된다. 앞으로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한편 심적으로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을 떨쳐내는 좋은 방법은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인데, 이 때 주변 이웃과 커뮤니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는 살림을 돕는 이웃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함께 커피숍에 가서는 자신의 특기인 분재 노하우를 가르치고 요즘 유행하는 것들을 배우기도 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발도 들이지 않았던 노인회에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노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사회에서 따돌림 받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사는 지혜를 얻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특유의 ‘노인 냄새’까지도 스스로 신경 써서 관리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돈으로 규모 있게 살아가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아내가 있을 땐 부족함 없이 돈을 썼던 그였지만, 소비를 규모있게 줄여 나갔다. 또한 노인들의 돈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한 순간에 날리지 않도록 남은 재산을 셋째 딸 명의로 변경했다. 아들이 부도를 냈을 때 셋째 딸이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매월 딸들로부터 일정하게 생활비를 받았다. 다행히 딸들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 생활비 지원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물가에 비해 충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근검절약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갔다.


남은 재산 자녀 명의로 바꿔사계절에 걸쳐 위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덧 그의 홀로서기도 끝나가고 있었다. 자식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 또 혼자 살고싶은 두 가지 마음이 왔다 갔다 했지만,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자식들의 상황은 더 안 좋아졌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결국, 홀로서기를 계속하기로 결정한 그는 아래와 같은 일기를 쓰며 다짐한다.“될 수 있는 대로 외로움을 잊고,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며,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자. 깨끗한 삶을 살고, 나를 믿고 또 남을 믿으며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이것이 노후를 아름답게 사는 길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자. 노인의 방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꽃과 화분으로 방을 밝고 아름답게 장식하겠다.

옷도 청결하고 밝고 화려한 것으로 골라 입고, 몸도 마음도 늘 젊게 살려고 애쓰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세 끼 식사는 뱃속 8부만 먹고, 사치하지 말며 욕심 없이 살겠다.”홀로된 고령 인구에게는 의식주 해결뿐만 아니라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도 큰 숙제가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식들과 이웃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한다. 고령자문제는 본인의 자발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젊은 세대와 중·장년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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