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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묶인 전자학술서적 컨소시엄 - 학술서적도 전자책으로 싸게 좀 봅시다

발 묶인 전자학술서적 컨소시엄 - 학술서적도 전자책으로 싸게 좀 봅시다



“연구를 끝내고 결과를 해외 저널에 발표하려 했는데 영국의 대학에서 2년 전에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한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헛수고를 한 거지요.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만큼 해외 연구 정보에 어두웠죠.” 한 교수의 넋두리다. 최신 정보에 빠르게 접근하는 것은 R&D(연구개발) 역량의 핵심이다. 학계의 트렌드를 정확히 인지해야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다. 전자저널이 발달한 요즘 연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과거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물리적 제약 없이 쉽게 정보를 교류할 수 있다. 현재 약 5만종에 달하는 학술지가 전 세계에 온라인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전자저널의 경우 별도의 구독 절차가 필요하고, 학술서적 역시 직접 출판사에 접촉해 구입해야 한다. 개인이 구매하려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이 점은 도서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도서관 컨소시엄이다.

개별 도서관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전자 정보를 공동구매하자는 것인데 2000년대 들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도서관 컨소시엄은 2003년 164개에서 2010년 93개국 338개로 급격히 늘었다. 영국의 학술연구지원기관(JISC)이 대표적이다. 일본 역시 유사한 컨소시엄을 운영하고 있다.



기존 구입 비용의 10%면 충분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KESLI(Korean Electronic Site License Initiative) 컨소시엄’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주관하고 276개 대학, 98개 연구소 등 총 542개의 기관이 참여하는데 콘텐트를 제공하는 출판사와 대행사, 참가기관 등을 아우르는 국내 최대의 지식협력네트워크다. 쉽게 말해 해외에서 유통되는 전자저널을 KESLI가 대신 구매해 과학기술정보 통합서비스시스템(NDSL)이나 각 대학 도서관을 통해 연구자에 제공하는 개념이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12년이 됐다. 박재범 스프링거 한국 지사장은 “공급자인 출판사는 유통과정을 단순화하고 접근권한만 부여하면 되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연구자들은 개별적으로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저렴하게 전자 학술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성균관대 산학협력단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KESLI의 비용편익 비율은 68.99%로 측정됐다. 1000원의 예산을 투입했더니 6만8990원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KESLI의 경제적 가치는 2009년 기준으로 연간 895억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공동구매를 통한 구독비 절감 효과가 컸다. 접근이 편리해지면서 학술지 구독 건수도 급증했다. 200종에 그쳤던 대학의 전자저널 구독 건수는 KESLI 참가 이후 4122종으로 약 20배나 증가했다.

연구소는 92종에서 2345종으로 25.5배, 의료기관은 43종에서 2203종으로 51배나 급증했다. KESLI가 국가 전체의 연구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널은 과거에 비해 확실히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학술서적은 제자리 걸음이다. 대학 도서관이나 연구기관은 학술서적을 대부분 인쇄본으로 구입하고 있는데 인쇄된 원서들은 보통 권당 10만원 이상의 고가인데다 구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이 빌려가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최근 KESLI의 적용 영역을 전자학술서적으로 넓히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KESLI eBook 컨소시엄’이다. 저널 중심으로 운영하던 것에서 벗어나 전자 학술서적도 컨소시엄을 통해 저렴하게 공급하자는 얘기다. 방식은 그대로다. 스프링거, 엘스비어 등 해외 유명 학술서적 출판사들은 인쇄본과 전자책을 함께 제작하는데 이들 출판사가 보유한 전자책 정보를 컨소시엄이 패키지로 구입해 대학과 연구기관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김정환 KISTI 해외정보실장은 “KESLI eBook 컨소시엄이 활성화되면 기존에 공급하던 전자저널과 함께 전자 학술서적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과 2010년 사이 서울대는 3만5199권의 해외 발행 단행본을 구입하면서 26억2754만원의 예산을 썼다. 한 권당 7만 5000원을 지불한 셈이다. 31개 국·공립대 평균적으로는 한 권당 6만7000원을 썼다. 학계의 흐름이 빠르게 변하는데 유통기한이 짧은 학술서적을 고가에 구입하는 것은 도서관 자체적으로 큰 부담이다.하지만 컨소시엄을 통해 전자책을 구입하게 되면 이 비용의 약 10%만 지불해도 동일한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KISTI 측의 설명이다.

컨소시엄을 추진 중인 이미숙 신원데이터넷 대표는 “전자정보 열람을 제한하는 디지털 권한 관리(DRM)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패키지에 포함된 모든 책을 다운로드 할 수 있다”며 “프린트도 가능하고, 열람 횟수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한 번 구입하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컨소시엄을 구성하려던 움직임은 현재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참여 의사를 표시했던 출판사들이 발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자인 각 대학과 연구기관 역시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도서 구입 예산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컨소시엄 한 관계자는 “초기 단계에서 참여 의사를 표시했던 30여 개의 출판사들은 현재 14개로 줄었고, 반값등록금 등으로 재정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대학들도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급자인 출판사들은 인쇄본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만큼 최소한의 가격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수요자들은 가급적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주길 바란다. 외국의 경우는 이 가격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선다. 대만이 대표적이다. 대만은 2008년부터 22개 출판사와 87개 대학이 참여하는 ‘TAEBC 컨소시엄’을 운영하고 있다. 대만정부는 약 200만 달러(22억원)의 예산을 지원해 대학과 연구기관의 패키지 구입비용을 보조해 준다.

국가 연구경쟁력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컨소시엄을 통해 대만의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약 6만여 권의 전자 학술서적을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정보에 접근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직접 컨소시엄을 관리, 운영하기 때문에 공급자와 수요자들의 신뢰 또한 높다.

이 eBook 컨소시엄 도입에 관한 내용은 올해 10월 국회입법조사처와 파이낸셜뉴스가 공동 주최한 ‘입법 및 정책 제안대회’에서 최우수상으로 선정됐다. 사업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국회 차원에서도 인정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이와 관련된 예산이 전무하다. 국회 상임위원회나 국정감사에서 언급된 적도 없다.

필수적인 사업이지만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 발이 묶인 셈이다. 김정환 실장은 “사업 초기 마중물 역할을 할 예산이 절실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편성된 것이 없어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라며 “정부가 지원을 해야 출판사들도 신뢰를 가지고 사업에 참여할 수 있고 수요자들도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 도서관 책 부족 문제도 해결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장서 보유량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 국내 도서 보유 상위 20개 대학의 평균 소장 도서 수는 173만 320권이었다. 반면 북미연구도서관협회(ARL)에 소속된 미국과 캐나다 지역 113개 대학 도서관의 평균 소장 도서 수는 450만권을 넘어선다.

국내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도서를 보유한 서울대(443만 8503권) 조차도 ARL의 평균에 못 미친다. ARL 소속 대학들은 대학 예산의 3~6%를 장서 구입에 투자하지만 국내 대학은 1.3~1.6% 정도다. 오래돼 폐기하는 책을 메우는 수준에 그친다. 단기간에 이 격차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환경, 빠른 단말기 보급속도, 거기에다 전자책이란 좋은 대안으로 있는데도 정책 결정권자들의 생각은 여전히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IT 강국의 슬픈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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