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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rement - ‘엔딩노트’ 열풍 고령대국을 휩쓸다

Retirement - ‘엔딩노트’ 열풍 고령대국을 휩쓸다

삶을 반추하고 전하는 비망록 … 유언장 작성 붐 못지 않은 인기



일본 영화 ‘엔딩노트(Ending Note)’는 최근 한국에도 개봉돼 화제를 모았다.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담담히 그린 작품이다.

죽음을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엮어 화제를 낳았다. 주인공은 막내딸 감독이 직접 찍은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 영전에 바치는 딸의 작별인사이자 사부곡이다.

“죽는 건 안 무서운데 혼자 남을 아내가 걱정”이라던 주인공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엔딩노트 작성이다. 죽기 전 하고 싶은 10가지 소망을 적었다. 이른바 ‘버킷리스트’와 비슷하다.



긍정적 죽음 준비하는 슈카츠 인기죽음은 터부 대상이다. 하지만 장수사회인 일본에선 조금 다르다. 죽음이란 화두가 생활의 이슈로 가까와졌다. 당장 일본 매스컴의 단골 기삿거리다. 죽음과 장례를 다룬 특집기사나 출판물이 넘친다. 일부는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인생 마지막 집’인 무덤(납골) 마케팅도 활발하다. 주택 광고처럼 역세권·친환경이 강조된다. 최근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죽음 준비를 뜻하는 ‘슈카츠(終活)’가 인기다.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는 마지막 활동을 일컫는다.

지난해 일본의 유행어 톱 10에도 올랐다. 인생 최후를 스스로 만들자는 개념이다. 갈수록 슈카츠에 몰입하는 고령자가 늘며 공감을 얻었다. 지난해 10월에 41세로 사망한 유명 유통 전문가가 생전에 해둔 슈카츠가 공개되며 일약 관심단어로 부각됐다. 왕성한 활동시기에 느닷없이 떠났지만 사전에 장례·묘소 등에 만전을 기한 게 알려져서다.

죽음 준비의 압권은 유언장 작성이다.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화제다. 2000년대 이후 적자생존·승자독식의 논리가 확산된 결과다. 대형 지진도 삶의 가치에 의문부호를 던졌다. 특이한 건 40대 중년 그룹의 눈에 띄는 죽음 준비다. 인생 전반과 후반 사이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고민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나이인 까닭이다. 유언장을 통해 가족관계·가치관·지향점을 재검토하자는 취지다.

‘유언장을 쓴 뒤 인생가치가 달라졌다’는 작성 후기도 많다. 니케이비즈니스는 특집 기사에서 ‘최근의 유언 트렌드는 재산정리를 비롯한 단순한 죽음 준비가 아닌 충실한 생전시간을 위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유언장 작성은 증가세다. 공증 사무소를 거친 것만 7만8000건(2009년)이다. 가정재판소 검인유언서(1만3000건)까지 더하면 10만 건에 육박한다. 작성 이유는 가족의 불필요한 부담을 덜고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다. 본인 사후를 위한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인 셈이다.

원래 일본에선 죽음처럼 유언 이슈도 소수의 관심사였다. 일본 사회가 유언장에 익숙지 않은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상속재산의 과세라인(상속세 신고 불필요가 전체 인구의 95%), 법정 상속인은 가족(자동 승계), 죽음의 터부 문화 등이다. 이젠 상황이 변했다. 중년의 위기를 절감케 하는 환경 변화 탓이다.

당장 비혼(非婚) 독신자와 사실혼 부부가 늘었다. 이들은 사후 수속이 공포 중 하나다. 자칫 죽어도 죽지 못한 무연·고독사로 전락할지 염려한다. 옅어진 가족관계로 자녀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유언장 작성 배경 중 하나다. 상속 갈등이 대표적이다. 실제 상속갈등은 급증세다.

유언장 작성은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붐의 일등공신은 책자형태로 만들어진 ‘유언장 키트’다. 문구회사 고쿠요의 제품으로 애초 연 2만개 판매 목표를 세웠는데 4개월 만에 초과 달성했다. 전문가에 맡기기보다 스스로 써보려는 수요가 많다는 데 착안했는데 대히트를 쳤다. 남은 가족의 불안감을 희석시키려는 동기도 덧붙여졌다.

키트엔 봉투·용지 등 유언에 필요한 걸 전부 넣었다. 작성 안내책자도 포함됐다. 위·변조를 막고자 복사가 불가능한 안전장치까지 덧붙였다. 봉투는 한번 열면 다시 못 붙인다. 유언장에 들어가는 권유 내용은 본인 역사와 미래 연표, 소중한 우선순위(사람·물건·가치 등), 자산항목, 상속내용, 기부대상 등이다.

이 회사는 여세를 몰아 최근엔 ‘엔딩노트’ 시리즈 2탄을 내놓았다. 엔딩노트 인기는 유언장 붐을 넘어섰다. 1탄인 유언장의 확대 시도로 ‘만약의 때’를 대비한 비망록이다. 부담스런 유언보단 본인의 주요 정보를 한 권의 책에 가볍게 집약해보자는 시도다. 대상 고객은 연령 불문이지만 일단은 젊은이 눈높이에 맞췄다.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추하는 데 의미를 둔다. 동시에 버킷리스트처럼 후회하지 않기 위한 마음잡기 차원에서 청년그룹의 지지를 얻었다.

회사는 “살아온 이력과 경험을 정리해 청년 세대에 도움을 주고자 기획됐다”고 밝혔다. 유언 수요가 늘면서 관련된 각종 서비스도 증가세다. ‘유언투어’가 일단 재미나다. 유언투어는 온천 여행을 주선해 한적한 장소에서 유언장을 쓸 수 있는 서비스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인생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하는 건 물론 구체적인 유언장 작성 방법까지 알려준다.

주로 법률사무소와 여행사가 제휴·기획한다. 참가비(2박3일)가 10만엔을 웃도는 고액이지만 만족도가 높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모여 유언 정보와 인생 정리를 교감하는 사이트도 대지진 이후 크게 늘었다. 일종의 카페 형태로 구성되는데 오프라인에서 정기회합도 잦다.

유언장을 포함해 죽음 준비와 관련된 시장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내수 침체로 고전 중인 업계가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죽음 준비 관련 시장의 출사표는 다양한 업종에서 나온다. 금융권의 상속재산 운영대행 사업이 대표적이다. 상속세 경감 대책과 신고 대행 등을 포함해 유언장 작성·보관 대행 서비스가 성황이다. 효과적인 부동산 상속 처리를 위해 세무사·변호사·부동산회사가 총동원된다. 단순한 수수료 수입은 물론 유산 상담을 계기로 자녀 세대까지 고객으로 흡수할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산 자와 죽은 자 잇는 추억 박스건강 수명과 평균 수명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등 비용을 조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간병 공포를 줄이려는 수요다. 건강할 때 간호 비용과 재산 관리자 등을 선정해 대비하자는 취지다. 이때 주로 활용되는 게 후견인 제도다. 판단력이 떨어지거나 간병인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신뢰하는 사람에게 재산관리 등을 맡겨두는 제도다. 성년 후견 제도는 2000년 시작됐다.

과거엔 불명확하게 대리권 없이 뒤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합법적으로 다른 친족의 문제 제기 없이 대리행위가 가능해졌다. 편의성 때문에 이용자는 증가세다. 수속은 쉽다. 배우자 등 4촌 이내 친족이 가정재판소에 신청하면 10만엔 정도에 가능하다. 후견인 중 3분이 2는 친족이다. 나머지는 변호사·사법서사·사회복지사·법인 등이다. 매월 수만엔의 보수가 지급된다.

죽음은 행복한 삶을 위한 역설적인 화두다. 죽음을 준비하는 관건은 삶의 정리다. ‘삶=죽음’을 완성하는 게 인생정리다. 삶의 마지막 메시지답게 유서·유언·비망록을 포괄한다. 유언장은 엔딩노트의 일부다. 남은 이에게도 똑같다. 죽음이 배려하는 가장 소중한 마지막 선물이다.

엔딩노트는 자신만의 은밀한 대화이자 동시에 남은 이를 위한 솔직한 메시지다. 사후에 본인을 지키고 이어지며 떠올리도록 하는 중요한 ‘추억 박스’다. 자녀를 비롯해 가족·친지에게 생의 값진 의미와 지혜를 가르치고 유지하는 저장장치로도 기능한다. 미리써보는 엔딩노트의 힘이 고령대국 일본 열도를 강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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