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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집만큼 위험한 건 없소”

“자기 고집만큼 위험한 건 없소”

인재 발탁에 뛰어난 엘리자베스 여왕 … 가문보다 능력·자질·애국심 중시



새 정부 들어 7명의 장·차관급 후보자가 낙마·사퇴했다. ‘인사 참사’ ‘인사 망사(亡事)’라는 말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44%(한국갤럽)로 떨어졌다. 취임 한 달 사이 11%포인트나 깎였다. 역대 대통령 취임 초기 지지율 중 최저다. 잇단 인사 실패에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청와대 민정 라인 문책은 물론 국무총리 책임론도 나왔다.

하지만 주된 비판은 박 대통령에 쏠린다. ‘수첩 인사의 예고된 파행’이라는 것이다. 한국립대 교수는 “박 대통령은 자신이 롤 모델로 여기는 엘리자베스 1세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인선과 용인술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고 비꼬았다.



사람 읽을 줄 아는 군주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꼽았다. 1558년 스물다섯 나이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를 유럽 극빈국에서 최강국으로 바꿔 놓았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대영 제국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여왕이라는 찬사와 함께 잔혹한 독재자 또는 뛰어난 재상 뒤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한 군주라는 혹평도 있다. 이런 극단의 평가에도, 한가지 공통점은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인재 발탁과 용인술에 탁월했다는 점이다.

“당신(God)께서 당신의 종복들에게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분별 있는 마음을 주시어 저희가 성스러운 소명을 받는 데 있어 불이익을 당하거나 악화되거나 치명적인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저희에게 야심이 크고 사악하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신하들이 아닌 사려 깊고 현명하고 덕이 있는 신하들을 허락해 주소서.”

엘리자베스 1세의 기도문 중 한 구절이다.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를 쓴 액런 앨슬로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최대 성공 요인은 적재 적소에 인재를 등용한 것”이라고 평한다. 물론 데이비드 로드 같은 역사학자는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주로 다른 사람(신하)의 업적 때문에 화려한 명성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깎아 내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제국의 태양 엘리자베스 1세』를 쓴 전기 작가 앤 서머싯은 “그런 좋은 신하를 발탁한 것 자체가 능력”이라고 평했다.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군주의 한 사람’ ‘책 만이 아니라 사람도 읽을 줄 아는 군주’라는 평판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윌리엄 세실, 로버트 더들리, 니콜라스 베이컨, 프랜시스 윌리엄,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호킨스, 토머스 패리 등 후대에 역사적 인물이 된 신하를 뒀다. 윌리엄 세실경은 여왕의 최측근으로 40년간 여왕을 보필했다. 세실은 보잘 것 없는 소지주 출신이었지만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이론과 경험을 두루 갖춘 인재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세실의 자질과 충성심을 신뢰했다. 하지만 그를 말 잘 듣는 참모보다는 정치적 조언자로 여겼다. 여왕은 세실을 추밀원의 고문관으로 임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대가 어떤 선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고, 국가를 위한 임무에 충실할 것이고, 내 개인적인 뜻에 구애 받지 않고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올바른 조언을 해 줄 것을 믿노라.”



유능한 해적 두목을 해군 제독에엘리자베스 1세의 또 한 명의 최측근은 로버트 더들리였다. 더들리는 여왕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즉위 이후에는 끊임 없이 염문설이 돌던 사이였다. 여왕은 즉위 후 더들리를 기용했지만, 단지 사적인 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더들리는 몰락한 반역자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더들리를 윌리엄 세실을 견제하는 세력 균형의 한 축으로 삼았다. 처음부터 고위직에 앉히지도 않았다. 여왕이 즉위해 더들리에게 내린 첫 직책은 말을 돌보는 관리자였다. 친구라는 사적인 관계로 정치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그에게 중책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

더들리는 여왕 즉위 4년 후인 1562년이 돼서야 그를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됐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인선과 세력 균형 정책’ 논문을 쓴 김현란 박사는 “엘리자베스가 오랜 친구인 로버트 더들리를 중용하는 데 시간이 걸린 건 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세실과 더들리라는 양대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치를 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출신 배경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다른 두 세력이 상호 견제하면서 엘리자베스 시대 정치의 추가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중신을 뽑을 때 가문보다 능력을 중시했다. 인사의 원칙과 철학이 명확했다. 귀족·중산층·상인 계급을 막론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택했다. 동시에 정치가·행정가로서의 자질과 애국심에 중점을 뒀다. 그는 수시로 말이나 마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각계 각층 사람들을 만났다. 해적 출신을 해군 제독에 앉히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최강 전력이던 스페인 무적 함대를 궤멸하기 위해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발탁했다. 여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은 드레이크는 무적 함대를 무찔렀고, 대영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 중 하나가 됐다. 해적이자 노예무역에 종사하던 존 호킨스를 왕립 해군 준제독에 임명한 것도 파격적이었다. 여왕은 해군 장성들의 반대에도 존 호킨스를 발탁했고, 그는 향후에 해군사에 길이 남는 함정 프리깃 전투함을 개발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면서도 기존 인재를 전부 물갈이하지 않았다. 기존 조직을 전부 쓸어내야 할 정도로 무능하고 썩은 조직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위 후 추밀원을 개편할 때 그랬다. 추밀원은 국왕의 자문기구이자 행정·사법·지방 행정을 총괄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여왕은 귀족 중심의 추밀원 규모를 축소하면서 윌리엄 세실, 토머스 패리 같은 오랜 측근을 앉혔다. 하지만 부친인 헨리 8세 시대부터 일한 유능한 관료였던 클린턴 제독 등 추밀원 의원 10분 1은 유임했다. 인재 발탁에 탁월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64세 노년에 영국을 찾은 한 외교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국정 운영에서 자기 고집만큼 위험한 것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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