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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사태로 금융 약체 개도국 떤다

키프로스 사태로 금융 약체 개도국 떤다

개도국 예금 인출 사태 대비해야 … 선진국으로 돈 몰릴 가능성



지난 20여년 동안 키프로스는 ‘지중해의 꽃’으로 번성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러시아의 부호와 범죄조직은 검은 돈을 세탁하는 중간 기착지로 규제가 허술한 키프로스로 몰려갔다. 키프로스는 낮은 법인세율과 느슨

한 규제로 유로존의 조세회피 천국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에는 유로존(유로화 통용 17개국)에 가입해 명실공히 남유럽의 금융허브가 됐다.

지금은 다르다. 은행이 파산하고, 정부는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이른바 트로이카에 긴급 구제금융을 구걸했다. 사실상 국민의 은행 예금까지 몰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와서 구제금융을 받더라도 인구 80만에 이미 파산한 금융산업과 약간의 관광업·농업 밖에 없는 키프로스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키프로스 은행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디모스 디모스테노우스는 이렇게 절규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리의 일자리·권리·복지기금은 사라질 것이다. 키프로스는 파탄이다.”

키프로스가 이처럼 몰락한 건 은행들이 그리스 국채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같은 손실이 발생한 것은 바로 트로이카의 ‘PSI(민간 섹터의 원금 상각:투자 원금의 50%를 손실 처리하도록 강요했다)’ 정책 때문이다. 키프로스는 작은 나라다. 인구도 적고, 국내총생산(GDP)도 고작 유로존 전체의 0.2%에 불과하다. 그러나 트로이카가 키프로스에 강요한 구제금융의 내용은 파장이 작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구제금융 조건은 과거와 달리 은행 부실을 국가가 떠안는 것이 아니다. 예금과 은행 채권으로 손실을 메우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이번에 청산되는 키프로스 제2의 은행인 라이키(Laiki)은행에 예치돼 있던 예금은 은행의 투자 손실을 갚는데 쓰인다. 은행 예금의 안전 신화를 완전히 깨뜨리는 충격적 조치다. 은행 예금은 이제 더 이상 ‘내 돈’이 아니다. 그것은 투자금이며, 단지 일정액수의 원금이 보장되고(예금보장제도: 유로존에서는 10만 유로) 투자 수익의 성격으로 이자를 받을 뿐이다.



은행 예금보호 신화 깨져더구나 키프로스처럼 은행이 청산에 들어가면 10만 유로를 넘는 예금을 가진 사람이 정산 받을 때까지 몇 년 걸린다. 일부에서는 최장 7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은행의 손실을 다 갚고 남은 돈을 예금주가 나눠 갖는데, 비율이 얼마가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약 40%의 예금 손실을 예측하지만 일부에서는 최대 70%가 될 것으로 본다.

이 조치가 낳은 파장은 엄청나다. 무엇보다 유로존의 통합에 빨간 불이 켜졌다. 키프로스에서 청산되는 은행은 한 곳 뿐이지만, 다른 은행에 예치된 자금이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적다. 전국적인 ‘뱅크 런(은행 예금인출 사태)’이 발생할 것이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기존 구제금융 액수로는 감당이 안된다. 추가 구제 금융이 불가피하지만 키프로스는 이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 트로이카의 추가 지원을 받으려면 더 가혹한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구제금융에도 키프로스 사태의 향방은 여전히 불확실하며 장기적인 유로존 리스크로 남는다.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유로존 이탈의 위험이 여전하다고 본 것은 그 때문이다. 키프로스 내부에서도 국회의장이 같은 경고를 했다.

그러나 정작 유로존이 감수할 가장 큰 위험은 키프로스 바깥에 있다. 미국 사우스웨스트증권의 마크 그랜트는 “기관투자가들이(키프로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의) 취약한 은행에 자금을 계속 놓아둘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부르킹스연구소의 더글라스 엘리오트는 “문제가 있는 은행 시스템을 가진 약한 국가의 예금주들은 진지하게 그들의 자금을 유로존 내 강한 국가로 옮기거나, 아니면 예금이 아니라 다른 상품에 투자하는 걸 고려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회사인 핌코의 빌 그로스는 더 비관적인 평가를 내린다. “경제 성장이 더디면, 유로존의 다른 과잉 부채 국가들은 (키프로스와) 동일한 운명을 겪을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이 같은 자금 이동은 독일과 북유럽 국가에겐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자금의 귀착지는 가장 안전한 독일이 될 가능성이 커서다. 그러나 이는 유로존 시스템, 나아가 유럽연합(EU)의 통합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유로존의 통합이 아니라, 해체를 향한 한 걸음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자본 유출이 유럽에만 한정된 게 아니란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취약한 모든 개발도상국이 이 같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그래서 세계은행 사무총장인 스리 물리야니 인드라와티는 “만일 키프로스의 은행 섹터가 붕괴한다면, 개발도상국도 금융시장의 대규모 매도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개발도상국이나 힘이 약한 나라의 금융산업이 발전해 선진국과 경쟁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봉쇄되는 효과도 낳는다. 투자자들이 안전한 선진국의 대형 은행만 찾아 다니지 언제 예금이 허공에 사라질지 모르는 개도국 은행에 투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IMF가 이번 조치에 앞장 선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로존 밖에서도 이런 해법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시스템이 취약한 신흥시장이나 개도국에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불안으로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조치는 금융시장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왜곡된 움직임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이제까지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에 대응해 많은 자금이 예금의 형태로 ‘화폐 퇴장(cash hoarding: 화폐가 유통 과정에서 분리돼 나중의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대기 상태에 있는 것)’ 상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각국의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찍어내도(양적 완화) 실물 경제에서 돌지 않고 다시 은행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예금의 안전성 신화가 붕괴되면 돈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옮겨가거나, 아니면 실물에 투자될 것이다. 더 안전한 곳은 바로 선진국의 국채 시장이다. 따라서 선진국은 국가 부채를 더 싼 이자에 조달할 수 있다. 실물 투자는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부분적으로 소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예금에 가한 충격으로 부분적으로는 마치 경기가 회복되는 듯한 일시적 효과를 볼 가능성도 있다.



주식·부동산시장 단기 호황 올 수도가장 큰 변화는 예금이 주식시장으로 몰려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제로금리 시대에서 어차피 은행 금리가 낮아 기업 배당률과 격차가 줄었다. 뿐만 아니라 대형 글로벌 기업은 위험 분산이 잘 돼 있고 보유 현금도 풍부하다. 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도 이를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시장 지배력도 있다.

결국 각국 중앙은행의 제로금리 정책과 더불어 기존 금융 질서를 뒤흔드는 제도적 충격을 가해 선진국들은 인위적인 시장 흐름을 강요한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영국파이낸셜타임스는 3월 27일자 칼럼에서 ‘그래도 시장 왜곡이 변동성 증가보다는 낫지않겠느냐’고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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