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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nivore drama - 제인 캠피언과 홀리 헌터가 다시 만났다

Omnivore drama - 제인 캠피언과 홀리 헌터가 다시 만났다

‘피아노’로 가장 잘 알려진 감독과 배우가 만든 TV 미스터리 시리즈 ‘탑 오브 더 레이크’, 침울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인간의 내면 파헤쳐



제인 캠피언(58)이 사라졌다. 영화 ‘피아노’ ‘브라이트 스타’ 등을 감독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그녀는 지난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잠깐 들렀다. 이 영화제에서는 하루 동안 그녀의 7부작 미스터리 TV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Top of the Lake)’ 전회를 상영하는 시사회가 열리기로 돼 있었다. 그날 캠피언과 베벌리 힐스 호텔의 폴로 라운지에서 만나 한잔 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호텔에서 사라졌다. 홍보담당자들도 그녀의 행방을 몰랐다.

선댄스 채널에서 방영되는 ‘탑 오브 더 레이크’(3월 18일 첫 방송)는 실종된 소녀와 그녀를 찾아내려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여형사의 이야기다. 캠피언이 자취를 감춘 일이 드라마 주제와 이상하리만치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 뒤 ‘탑 오브 더 레이크’의 공동 작가 제라드 리와 함께 나타난 그녀는 약속 시간에 늦은 걸 진심으로 사과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명랑한 성격에 금세 친밀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우리는 레스토랑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진토닉을 한잔씩 주문했다. 그리고 오랜 친구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오지 마을 레이크탑을 배경으로 한 ‘탑 오브 더 레이크’는 임신한 12세 소녀 튜이(재클린 조)의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여형사 로빈 그리핀(‘매드멘’의 엘리자베스 모스)은 튜이의 행방을 찾고, 그 소녀를 임신시킨 남자의 정체를 밝히는 임무를 맡았다. 영화는 튜이가 차가운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튜이는 한 교사에게 발견돼 목숨을 구한다.

잔인한 범죄조직의 두목인 그녀의 아버지 매트 미첨(피터 뮬란)과 경찰은 튜이의 이상한 행동이 임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튜이는 자취를 감춘다. 로빈 형사는 그 지역 출신으로 오래 전 시드니로 떠났다가 암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 사건을 맡아 튜이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피해 달아났던 어둡고 위험한 과거를 다시 파헤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로빈의 과거는 범죄와 관련이 있다”고 캠피언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그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인정해야 한다. 튜이의 실종이 그녀에게 자극을 준다.” 리는 이 작품이 고전 소설과 유사한 구조를 지녔다고 말했다. “로빈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와 과거 속으로 파고든다. 튜이의 사건을 해결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탑 오브 더 레이크’는 캠피언이 감독한 작품답게 분위기가 침울하고 으스스하다. 겉으로는 목가적으로 보이는 호숫가 마을의 이면에 숨은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캠피언의 영화 대다수가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내면 생활은 영화의 황량한 배경만큼이나 거칠고 기복이 심하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여러 이야기가 한데 엉킨다.

로빈의 어두운 과거, 독기 어린 미첨과 빈둥거리는 그의 아들들, 베일에 싸인 지도자 GJ(홀리 헌터)가 이끄는 뉴에이지(서구적 가치관을 배제하고 초자연 사상을 신봉하는 운동) 여성 캠프 등. 이런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피해와 복수, 탈출에 관한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가 전개된다.

1993년 ‘피아노’에서 스코틀랜드의 벙어리 여인 에이다 맥그래스 역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받은 헌터가 이 작품을 통해 캠피언과 다시 만났다. 캠피언은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작품이었다. 우리는 그 작품을 촬영하면서 정말 즐거웠다. 함께 일할 때 우린 마치 자매 같다. 미리 체계를 세워놓고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면서 방법을 찾아나간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이 노릇을 대체 어쩌지?’ 하면서 힘을 합쳐 전략을 짠다.”

헌터와는 지난 1월 초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녀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재회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제인은 매우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영화를 만들 때 엉뚱하고 기발한 측면이 엿보인다. ‘피아노’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신이 났던 듯하다.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다루면서 신이 났다니 믿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정말 영화 만들기를 좋아한다. 그 시간이 그녀에겐 놀이 시간이다.”

캠피언은 “홀리 헌터가 춤추는 걸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이하다. 미국 남부 출신답게 귀신 들린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탑 오브 더 레이크’에서 헌터는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곳에서 여성 힐링 캠프를 이끄는 수수께끼 같은 지도자 GJ로 나온다. 그녀는 남자 옷을 입고 길고 흰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캠프 안을 돌아다닌다. 성별과 나이를 짐작할 수 없고 속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GJ는 이 지역에서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알려졌다.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헌터는 말했다. “같이 지내다 보면 그녀를 좀 더 알게 되지만 여전히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사실 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대다수가 그렇다. 미스터리는 제인의 일부인 듯하다. 그녀의 이야기 바퀴에 기름칠을 해주는 게 바로 미스터리다. 그녀의 캐릭터들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특성이 있다.” 헌터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제인의 작품에는 도덕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들을 도덕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지 않는다. 그들을 동물로 본다.”

헌터가 연기한 GJ는 인도 철학자 U G 크리슈나무르티를 모델로 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캠피언의 친구로 2007년 세상을 떠났다. 그도 GJ처럼 “큰 재앙(calamity)”을 겪고 온몸의 세포가 모조리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극중에서는 GJ가 겪은 재앙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는 그 재앙이 자신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인류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주장한다. GJ는 자신을 “죽은 사람”이자 “좀비”라고 부른다. 그녀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 보인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내 친구였다”고 캠피언은 말했다. “난 그가 지도자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GJ처럼 그 역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배울 만한 뭔가를 가르칠 능력이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기꾼이나 매춘부다. 매춘부도 그들보다는 낫다.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니까.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여자들이 GJ 주변에 모여든다. 그들은 모두 뭔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파라다이스’는 곧 스토리의 중심이 된다. 이곳은 튜이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며 범죄집단들 사이에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폐경후 여성들에 관해 쓰고 싶었다”고 캠피언은 말했다. “섹시함을 중시하는 요즘의 사회적 기준에서 밀려난 여성들에 관해서 말이다. 섹시하지는 않지만 다른 종류의 삶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 사회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많다.”

모스는 “‘파라다이스’는 여러 캐릭터가 추구하는 뭔가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독립적인 삶과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여기에 제인 캠피언이 끼어든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깊고 어둡고 기이하고 감정적인 쪽으로 방향을 튼다.”

범죄 수사 장면과 로빈의 내면 여행이 교차되면서 가끔 아주 기이한 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마오리족 전설에 따르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그 호수 바닥에는 악마의 심장이 살아 있다. 심장은 박동할 때마다 물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이야기 곳곳에서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심지어 마약과 섹스, 온갖 악이 난무하는 레이크 탑과 근처 퀸스타운의 하류층 생활을 파고들 때도 그렇다. 하지만 로빈 역시 모범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수사하는 인물들만큼이나 결함이 많다.

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TV 드라마에서 여자 형사가 시리즈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나오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그들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특정 계층을 차별하는 듯한 말도 하지 않는다. 또 도장에서 몇 년씩 훈련 받은 남자들보다 가라테 실력이 더 뛰어나다.” 캠피언도 한마디 거들었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그들 모두 아주 섹시하다.”

로빈 형사를 생각할 때 “완벽”이라는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모스가 연기하는 로빈은 깊은 상처를 안고도 끊임없이 날아가는 약한 새 같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또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 과거의 망령들과 마주치기 전에는 말이다. 로빈은 모스가 AMC 드라마 ‘매드멘’에서 연기한 페기 올슨과는 완전히 딴판이지만 비슷한 면도 있다. 두 여성 모두 세상을 향해 단단한 방벽을 쌓는다. 과거의 말 못할 상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모스의 말을 들어보자. “로빈의 어머니 주드는 2회에서 명대사를 남긴다. ‘넌 마음이 굳어진 걸 힘이 생겼다고 착각하고 있어.’ 로빈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차단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주변에 높은 벽을 쌓고 세상사에 부대끼지 않으려 한다. 로빈은 아집을 버리고 나서야 자신이 강하지 않으며 다시 힘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포르브뤼델센(Forbrydelsen)’이나 ‘더 브릿지(The Bridge)’ 등 최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범죄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이들 드라마에 나오는 여형사들은 감정의 스위치를 꺼버린 듯하다. 아니, 애초에 감정이란 게 있기는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들은 논리와 추론의 세계에 살지만 로빈은 감정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녀의 잘못은 주변 상황에 너무 깊고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새로 맡은 사건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마음 속에서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요즘은 TV 드라마 한 편이 시작되면 8~10 시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지만 ‘탑 오브 더 레이크’는 끝을 확실히 정해놓고 시작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다음 시즌은 없다”고 캠피언은 말했다. 캠피언과 리(두사람은 1989년 영화 ‘스위티’를 함께 만든 과거의 연인이다)는 소설의 형태를 빌려 끝맺음이 분명한 TV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을 시도해볼 만한 위치에 있다”고 캠피언은 말했다. “제라드와 나는 계속 함께 일해 왔다. 인생을 이만큼 살고 보니 특별히 관심이 가는 일들이 생겼다. … 50대 후반이면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다.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가 됐다. 지금 하지 않으면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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