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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미국이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비정상국가 북한에 합리적 사고 요구하기 전에 그런 사고가 가능하도록 도와야
아무리 엉망일지라도 북한 정권 역시 엄연한 의사결정체계를 갖춘 조직이다.



‘너도 우리 어른들처럼 행동하거라.’ 3살 난 어린아이한테 이렇게 요구하는 어른이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과제를 강요하면서 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이에게 어른의 입장을 헤아리도록 강요하기보다 어른이 아이를 배려해주는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북한과 미국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더 심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와 성인의 힘, 신장, 지식 등의 차이는 기껏해야 10~20배 정도겠지만 저 두 국가 간 1인당 GDP는 약 94배, 국방비는 70배, 수출액은 무려 450억 배 가량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수치로만 봤을 때는 어른과 아이가 아니라 인간과 개미에 비유해도 될 정도다. 수치화 할 수 없는 각종 요소들까지 더하면 차이는 더욱 심해진다.

물론 국가 간 관계가 경제력이나 국방력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중 ‘개미’에 해당하는 쪽이 자국의 존망을 걸고 외교에 임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대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면 애초에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판단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북한이 바로 그런 경우다.

북한은 6월 16일 올해 들어 처음으로 미국에 대화를 공식 제의했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중대담화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해 북미 당국 사이에 고위급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이 담화에서 북한은 회담을 통해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문제, 한반도 비핵화 등 그동안 도마 위에 올랐던 사안들을 논의할 의지를 밝혔다.

미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케이틀린 헤이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한반도 비핵화에 다다를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협상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북한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화를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진정성있는 비핵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19일에는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 3인이 회동을 갖고 북한이 2·29 합의보다 더 강한 의무를 이행했을 때 대화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2·29합의는 2012년 2월 29일 북미 간에 이뤄졌다. 미국이 북한에 식량 24만t을 지원하는 대신 북한은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중단,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유예 등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합의다. 그러나 이는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북한이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2·29합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정세현 원광대 총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분유 24만t 받고 미사일 발사 유예하고 우라늄 농축 중단하기로 한 건 북한으로서는 아주 싸게 약속을 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분유 24만t 주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미국이 믿었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그런 점에서 2·29합의는 곧 깨질 운명이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식량 24만t이 북한에 어느 정도 가치를 갖는지와 상관 없이 합의를 했다면 지키는 것이 도리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대화 제의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미국의 입장에도 수긍이 간다. “북한이 2·29 합의를 깨고 핵실험 등을 하면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볼 때 다시 대화를 하려면 북한이 더 강화된 의무를 이행해야 ‘북한이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는 조태용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말이 일리 있게 들리는 이유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약속이 2.29합의뿐만은 아니다. 2013년 3월에는 정전협정과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파기하고, 4월에는 2007년 6자회담 당시 합의해 가동을 중지했던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밝혔다. 그밖에도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탈퇴 절차를 밟지 않아 형식 상으로는 아직 가입국이다), 개성공단 차단 등 사례가 아주 많다.

북한을 기본조차 안 된 국가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일련의 사건들을 북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접하라”는 이른바 ‘도덕의 황금률’에 입각해서 말이다. 미국을 비롯한 북한 주변국들에게 북핵은 자국의 안위는 물론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골칫덩이다. 바로 그 때문에 북한은 ‘가난하고 호전적인 불량국가’에서 ‘대량살상이 가능한 위험국가’로 격상됐다.

바꿔 생각해보면 북한 입장에서 핵은 자국의 안위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유일한 안보수단이자 협상 카드다. 만약 북한이 섣불리 비핵화에 나서 핵 보유에 불리한 입지로 몰리고도 체제 보장을 약속받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벼랑끝에 몰리는 셈이다. 북한은 비핵화를 잘못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사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카다피는 비핵화를 조건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노렸지만 정작 국민들이 봉기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총 한 자루로 버티는 사람에게 함대를 이끌고 다가가 ‘총을 넘겨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한들 어느 누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까? 하물며 북한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고, 아무리 엉망일지라도 어쨌든 하나의 조직이다. 북한의 의사결정 체계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최근 공개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에서도 드러난다.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군부와 자신 간에 충돌이 있고 ‘최고존엄’이라 불리는 자신조차 군부와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사했다.

설령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중대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잘못된 의사결정이 나오기 십상이다. 우리는 오랜 역사에 걸쳐 그런 장면을 무수히 봐 왔다. 선진국도 그럴진대 북한처럼 자존심은 강하면서 지배체제가 엉망인 데다 권력을 3대째 세습한 20대 젊은이가 군 장성을 이끄는 기괴한 조직은 어떻겠는가?

그들이 체제생존 위기가 달린 문제를 놓고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정말 책임감 있는 어른이라면 아이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마땅하다. 대화를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사회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 이익이라고 느끼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게 외교다.

14일 이란 대선에서는 중도파 하산 로우하니가 당선됐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가 북한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미국이 그 간 전략적 인내로 접근했던 국가들 역시 소위 ‘불량국가’로 불리거나 한때 그렇게 불렸던 국가들이지만 그럼에도 북한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예컨대 이란의 경우 핵 개발을 놓고 미국과 밀고 당기기를 벌였다는 점에서는 북한과 유사하지만 민주주의나 인권의 수준,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생각해보면 이란은 충분히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만한 여력이 있는 국가다. 6월 14일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극단주의 후보들을 제치고 온건한 중도파 하산 로우하니가 당선됐다는 사실만 봐도 이란과 북한의 차이는 명백하다.

미국도 어느 정도는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미국은 이라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한달만에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이라크 내 종파갈등과 저항 게릴라 세력의 테러로 이라크 재건은 지지부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로 미군 사상자가 속출하자 국내의 거센 비판에도 직면했다.

전략적 인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2008년 주 이라크 미 대사 라이언 크로커는 “전략적 인내의 관점에서 이라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며 미국의 정책 전환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였다. 초기에는 반대하는 쪽이 우세했다. 반대파는 이라크의 정치적, 군사적 불안정성을 강조하며 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북한 군부와의 의견 충돌을 겪었다.
그러나 이라크가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고 극단주의 테러도 크게 줄어들자 갈수록 많은 사람이 전략적 인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중동전문가 앤서니 코즈먼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7년 한 보고서에서 “아직 불안요소가 많은 이라크에는 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2009년에는 이란의 상황이 많이 호전됐다고 분석하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략적 인내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2010년 미국은 병력을 이라크에서 전면 철수시키며 종전을 선언한 뒤 외부에서 위기관리를 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전략적 인내가 어떤 상대에게 효과적 인지를 그들 자신도 잘 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유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를 논할 때 주로 제기되는 주장 중 하나가 북한 몰락설이다. 북한은 3대 세습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약간의 제재를 통해 고립시키기만 하면 자연히 붕괴한다는 것이다. 괜히 관여한다고 들어갔다가 북한 정권에 힘을 실어주거나 그들을 자극하느니 멀리서 관리만 하자는 생각이다.

러시아 출신으로 김일성대학에서 1년 간 수학한 북한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저서 ‘북한의 참모습: 실패한 스탈린 주의 유토피아의 삶과 정치(The Real North Korea: Life and Politics in the Failed Stalinist Utopia)’에서 약간 다른 ‘몰락설’을 내놓았다.

그는 전략적 인내가 “북한의 도발을 유발하고 핵무기를 개발할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대신 외부 세계의 정보를 북한에 주입시켜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제2의 전략적 인내’를 주장한다. 북한인들이 한국인과의 생활수준 차이를 알게 되면 대규모 탈북이 일어나고 자원이 고갈돼 북한은 결국 붕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몰락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부의 존 델러리 교수는 포린어페어지를 통해 “란코프는 북한 정권 붕괴를 지나치게 확신하는 한편 경제개혁의 힘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델러리는 “북한인들 중 200만 명 정도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고 농산물 시장이 생기고 개인이 운영하는 소매점이 등장하는 등 ‘풀뿌리 자본주의’의 징조가 나타난다”며 경제개혁으로 인한 북한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점쳤다. 델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이 북한을 평화협상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라며 한미가 함께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부터 시작해 북한과 협력해 나가는 “평화로운 개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북한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수많은 의견이 매일같이 제기된다. 그 중 누가 옳은지, 어느 의견을 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이 나서서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전략을 택할지는 대화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대화를 미루고 제재를 가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대로 움직이리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북미 양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지냈던 미첼 리스 워싱턴대 총장은 2008년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변할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오늘, 그렇게 인내한 끝에 북한이 어떤 변화를 보여줬는지 미국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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