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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말만 믿고 싶은 시장심리에 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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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MC에선 버냉키 말과 달리 양적완화 연내 종료 의견 다수



세치 혀로 세상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세상이 가벼운 탓일까? 아니면 혀가 날렵한 때문일까?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Fed, 이하 연준) 의장의 말 몇마디가 7월 11일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유로화·파운드·엔화 등 선진국 주요통화가 달러화 대비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신흥시장 증시는 모처럼 큰 폭으로 상승했다.

6월 중순 양적완화 출구전략 로드맵을 언급했을 때와 정반대였다. 심지어 외환시장의 일일 변동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버냉키 말에 숨은 미묘한 함정사실 그는 그리 새로운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적당한 시기에 새롭게 포장된 말을 했을 뿐이다. 이날 미국 경제조사연구소에서 연방준비은행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연설문은 연준의 최우선 과제가 ‘금융 시스템 안정’에 있다는 다소 보수적인 내용이었다. 6월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연준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거론된 양적완화 규모 축소(QE tapering)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연설 뒤 미리 정해진 일문일답 과정에서 버냉키 의장은 금융시장이 원하는 발언을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 세가지다. ① 양적완화 규모 축소는 경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②연준이 목표로 잡은 실업률 6.5%가 달성되더라도 한참 동안 금리 인상은 없다. ③경제 여건이 나빠진다면 양적완화 규모를 다시 늘릴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그의 발언은 이전의 발언과 다를 게 없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발언은 4월 이후 FOMC 성명서에서 거듭 언급됐다. 이미 6월 빌 더들리 뉴욕 연준 총재가 다시 한번 확인한 내용이었다. 다만 첫 번째 내용은 6월 FOMC 기자회견 때와는 다소 달라졌다. 6월에는 ‘경제가 좋아진다면’이라는 전제 아래 “올해 안에 양적완화 축소에 들어가고, 내년 중에는 완전히 중단한다”고 구체적인 일정을 밝혔다. 이번에는 양적완화 축소가 온전히 경제 지표에 달린 문제로 초점이 달라졌다.

여기에는 미묘한 함정이 숨어있다. 첫째, 버냉키의 이날 발언은 연준의 정책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행사에서 ‘비공식적’으로 발언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발언은 공식 정책 결정 기구인 FOMC의 6월 의사록에 나온 내용과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버냉키의 발언은 연준의 집단적인 의사 표시가 아니라 ‘개인 의견’이었던 것이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다우지수가 5월 7일(현지시간) 종가 기준으로 사상 처음 1만5000선을 넘어서자 증시 관계자들 이 박수 치며 환호했다. 다우지수는 양적완화와 미국 경제 회복 기대감으로 7월 들어서도 12일까지 1만5000선을 지켰다.
금융시장은 버냉키의 발언을 기화로 마치 양적완화 축소가 없을 것처럼 간주했다. 모든 자산 가격이 급등했다. 이 바람에 시장의 하락에 베팅하고 매도 포지션을 취한 투자자가 날벼락을 맞았다. 금융상품가격이 순식간에 3~4%씩 급등한 건 기존매도 포지션을 취한 투자자들이 손절선이 가까워지자 급히 환매수에 나선 때문이었다. 한국의 증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적완화 축소 믿다가 날벼락그렇다면 공식 정책 결정 기구인 FOMC 회의에서는 어떤 말이 오갔을까? ① 양적완화 축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연내에 종료하자고 주장한 위원의 숫자가 절반에 달했다. ② 양적완화 축소·종료 시점을 명확히 시장에 전달하자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한데는 금융시장의 거품이 많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경제와 고용 조건 개선은 양적완화 중단 배경의 하나일 뿐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③ 향후 경제가 좋지 않을 경우에도 양적 완화를 축소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의사록은 버냉키의 발언 몇 시간 전에 이미 시장에 공개됐다. 따라서 시장은 이미 연준의 정책 기조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버냉키의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데다, 시장의 불신마저 받는 상황이다. 6월 FOMC 직후 미국 국채 금리(수익률)가 폭등하자, 월가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를 ‘버냉키에 대한 불신임 투표’라고까지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냉키의 ‘개인 발언’이 그토록 시장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버냉키의 세치 혀가 시장을 움직인 이유를 따져보려면, 그의 발언이 없었다면 시장은 어떻게 됐을까부터 따질 필요가 있다. 그의 발언에 앞선 시장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6월 FOMC 성명서는 한편으로는 매파적 입장에 있으면서도(절반 가까운 위원이 올해 안에 양적완화 중단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원들 스스로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불확실성).

② S&P500 상장 미국 기업의 2분기 실적은 이익과 매출이 전분기 대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③ 국채 수익률은 주택 모기지 금리 상승과 유동성 감소에 따른 변동성 확대 위험때문에 기술적으로 상승 압력을 받았다. 더구나 양적완화 축소에 따른 수급 악화로 강한 상승 압력을 받았다.

④ 달러화는 다른 선진국 주요 통화와 신흥시장 통화에 대해 강한 절상 압력에 시달렸다. 특히 영국과 유로존 중앙은행의 구두 완화책으로 달러 강세가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는 미국 기업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⑤ 주택 모기지 금리 상승과 회사채 가격하락으로 미국 은행의 장부상 자산 손실 규모가 증가했다. 또 모기지 금리 상승은 주택 경기를 급격히 냉각시킬 위험이 있었다. 구겐하임파트너스의 스콧 미너드 수석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1.8%) 가운데 주택 관련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2%나 된다. 만일 미국에서 주택 경기가 다시 가라앉는다면 미국의 성장률은 0.5% 수준에 머물 것이다.

⑥ 신흥시장에서 자금 유출과 자산 가격폭락, 통화 위기 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를 불러올 잠재적 위험이 있었다.

위의 조건들을 서로 연결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미국 증시는 기업 실적 악화, S&P500 상장 기업 매출의 40% 이상과 영업이익의 60%가 발생하는 신흥시장의 악화에 따른 실적 악화 전망, 국채 수익률 상승과 미국 내수시장을 이끈 주택시장 침체 우려라는 세 가지 복합 원인 탓에 사상 최고치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상당수의 이코노미스트가 급락 위험을 우려했다.

② 국채 수익률 상승을 저지할 정책 유인이 없기 때문에 5년간(장기적으로는 30년간) 인위적으로 억눌린 국채 시장이 더 급격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 경우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 조달 비용(국채 이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재정 건전화가 점점 더 어려워질 위험이 컸다. 특히 신흥시장이 통화 약세를 방어하기위해 보유 달러를 계속 매각한다면, 그 상승 곡선은 더욱 가팔라질 상태에 놓여 있었다.

③ 이는 지난 5년간 연준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끌어올린 금융자산 가격을 급락케 하고, 이와 관련된 은행의 파생상품 계약을 청산시키는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할 위험이 있었다.

④ 신흥시장과 유럽도 각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에 양적완화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나타낼 걸 요구하는 등 국제적 압력이 커졌다. 이는 이들 국가의 금융위기가 악화되는 방향으로 진전된다면 미국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통화·경제 정책을 쓸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버냉키의 세치 혀가 막은 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위험 요인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연준의 방향 수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FOMC 의사록에 나온 내용에 미루어 본다면 그렇다. 다만 언젠가 리챠드 피셔 달라스 연준 총재가 말한 것처럼 시장을 과열에서 당장 냉각상태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연준의 시장관리 지침을 버냉키가 구두로 실현한 데 불과할 따름이다. 임박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구두 개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버냉키의 발언은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질서 있는 후퇴’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임기가 얼마 남지도 않은, 그리고 FOMC 의사록에 따르면 사실상 내부 반란으로 권력을 상실한 버냉키의 발언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건 이미 시장이 이 발언을 작심하고 기다렸다는 걸 뜻한다. 연준도 이를 이용해 시장이 혼란에 빠지는 걸 막겠다는 상호간 ‘염화시중의 미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버블로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시장의 주류가 원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장 혼란 세력, 즉 매도 포지션을 취한 세력에 대한 처벌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연준의 매파 위원들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최근 시장의 동향은 근본적인 전환(예컨대 양적 완화 축소 포기)에 반응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앙은행이 시장의 힘을 빌어 시장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완화적인, 그래서 부작용이 점점 커진 통화정책에서 질서 있게 후퇴하기 위한 변형된 구두 개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치밀하게 계산된 시장 구두 개입이 같은 과정이 먹힌 건 버냉키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장이 그의 말을 믿어서도 아니다. 버냉키가 시장의 주류에 야합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다. 특히 시장 안정은 미국 연준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원한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지난 5년간 무제한 통화 발행으로 금융자산을 부풀려 버블 붕괴 위험에 빠진 세계 각국은 시간을 벌었다. 다만 ‘말’의 일관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신뢰는 더 크게 상실됐다. 3차 무제한 양적완화시행 고작 6개월여 만에 다시 이를 축소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버블과 금융 불안정(시장 왜곡)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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