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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TRAVEL - 분리장벽과 올리브숲, 그리고 물담배

FEATURES TRAVEL - 분리장벽과 올리브숲, 그리고 물담배

팔레스타인 서안은 위태롭기도 하지만 비극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매력적인 관광지다



2012년 8월 라마단 마지막 주말의 서늘한 저녁. 팔레스타인 사와레 마을 부근의 올리브 농장 안에 돌로 지은 3층짜리 집 옥상 테라스의 안락소파에 편안히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발알-칼릴이라고 부르는 유대산이 농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산은 빛나는 별들 사이를 헤엄치는 거대한 검은 고래처럼 보였다. 서쪽 하늘은 예루살렘의 희미한 불빛으로 노랗게 빛났다.

내 곁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내가 머무는 집 주인 할라세 부부의 장성한 자녀 3명도 옥상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녀와 차녀 라나와 레함은 둘 다 아름답고 박식하며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막내 아들 타메르는 36세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수난을 겪는 조국 팔레스타인의 모든 면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이라는 뜻으로 이슬람력에서 9번째 달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는 이 기간을 신성한 달로 여기고 한달 동안 일출에서 일몰까지 매일 단식한다. 나는 라마단 단식을 마무리하며 먹는 저녁으로 배가 불렀다. 우리는 높이 1m 정도 되는 물담뱃대 주변에 둘러 앉아 뱀 같이 기다란 파이프를 돌려가며 사과향 물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아라크(독한 전통주)를 마셨다. 초콜릿 과자도 나눠 먹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술과 담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인이 팔레스타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온한 생활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팔레스타인에선 평화가 영구하지 않다. 앞으로 3주 동안 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매혹적인 자연을 직접 목격할 계획이었다.

팔레스타인에도 관광산업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베들레헴의 종교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를 찾는다. 예수가 탄생했다고 알려진 동굴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다. 몇몇 순례자들은 갈대가 늘어진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1시간 정도 더 이동한다. 번잡한 수도 라말라에는 각박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애쓴다고 말하는 정부와 민간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

그곳에 멋진 하이킹과 산악자전거 코스도 있다(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기온이 49℃나 됐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중심부,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 헤브론과 나블루스, 또는 데이셰와 예닌의 난민촌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드물다. 그런 곳에 가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알 수 있다. 나는 지난해 8월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그곳을 둘러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매혹적이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지역의 혼란상과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싶었다.

먼저 현황부터 살펴보자.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 서안은 이전에 ‘트란스요르단’으로 불렸던 아랍국의 일부였고, 그 이전에는 악명 높은 영국 통치령이었다. C자를 뒤집은 모양을 한 지대(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있다)로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다. 서안은 1967년 6일전쟁 이래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서쪽 경계선은 유대산이다. 유대산은 가파르며 갈색을 띤다. 마치 사포로 문지른 거대한 암반처럼 보인다.

동쪽 경계선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이 사해와 만나는 곳에선 기온이 산악 지역보다 10℃ 정도 높다. 구릉진 목가적인 풍경을 구성하는 올리브숲과 가끔씩 베두인 천막촌이 눈에 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마을엔 하늘을 찌르는 높은 첨탑을 가진 모스크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 동예루살렘 아랍 구역을 포함하면 서안의 인구는 약 320만 명이다. 그들 중 90%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 라말라, 베들레헴, 헤브론, 나블루스, 예리코, 예닌에 산다.

나머지는 약 120개 정착촌에 사는 이스라엘 유대인이다. 유엔이 불법으로 규정하는 그 정착촌은 이스라엘군이 이곳을 점령한 이래 계속 늘어났다. 유대인 정착민 대다수는 서안이 성서의 땅 사마리아와 유대를 포함한다고 믿는다. 무슬림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이 땅은 똑같이 중요하다.

나는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하지 마라!’라는 친구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고 서안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전에 잠시 방문했을 때 만난 타메르 할라세는 스카이프를 통해 아무런 걱정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와 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정상적인 곳이지요.”

텔아비브 외곽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자 타메르가 기사 딸린 차를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 할리드가 검은 세단의 트렁크에 내 가방을 던져 넣은 뒤 우리는 사와레를 향해 출발했다. 동쪽으로 향하자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와 모래로 이뤄진 풍경이 계단식 올리브숲 언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가파른 유대산으로 변했다.

도로는 가파른 고지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사막 계곡 와디로 깊숙이 내려갔다. 30분 정도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한 뒤 장벽이 눈에 들어왔다. 머지 않아 690㎞ 길이로 확장될 콘크리트 벽이다. 이스라엘과 서안의 경계선으로 이스라엘이 2003년 건설을 시작했다. 그 장벽은 뱀처럼 산을 끼고 돌며 올리브 농장까지 분할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그 도시의 이슬람 성지를 방문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검문소에 다가가자 올리브색 군복 차림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보였다. 할리드는 내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심하세요”라고 그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길은 문제가 없어요. 나올 때가 문제죠.”



20분 뒤 우리는 또다른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마침내 마을로 들어섰다. 거리의 어린이들이 우리 차에 플라스틱 총을 겨눴고 야생 개떼가 외곽에 몰려 있었다. 사와레 마을이었다. 청색 별이 낙서처럼 그려진 콘크리트 벽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했다. 할리드가 경적을 울리자 기다란 철문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열렸다.

앞서 묘사한 아름다운 올리브 농장이었다. 1주 동안 내가 머물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사와레는 예루살렘에서 8㎞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분리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러 검문소를 거치며 우회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그곳까지 차로 1시간은 족히 걸린다.

물론 팔레스타인을 찾는 모든 방문객이 공항에서 자가용으로 안내 받거나 개인 집에 머물진 못한다. 매일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팔레스타인 버스가 있고 여기 저기 괜찮은 호텔도 있다. 그중에서도 뫼벤피크 라말라는 특급호텔에 속한다.

할라세 집의 거실 소파에 앉아 차와 대추야자를 먹었다. 염소 수염을 한 타메르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는 것을 본 순간 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를 빌려야 해요. 택시나 대중교통보다 렌터카가 싸지요. 차가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훨씬 더 잘 보여줄 수 있어요.”

곧 나는 렌터카 직원이라는 야윈 젊은이에게 미국 뉴멕시코주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주고 지폐를 건넸다. 그가 렌터카 직원이 맞다고 해도 그는 수리공도 겸하는 듯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는 나무 패널로 지은 비좁고 담배 연기 가득한 사무실에서 차 밑에 들어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모르는 아랍어로 작성된 렌터카 계약서를 내놓은 뒤 내가 건넨 지폐를 왼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오른손을 뻗어 자동차 키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 키를 뜨거운 감자인 듯 타메르에게 곧바로 넘겨 주려고 했지만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그냥 서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요?” 타메르가 화난 듯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당신이 운전해야 해요.”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사와레까지 오면서 가파르고 꼬불꼬불하고 움푹 패인 도로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는가? 내가 타메르라고 해도 나보고 운전하라고 했을 것이다. “이봐요, 타메르.” 내가 간청했다. “여긴 당신 나라요. 내가 길을 몰라 잘못해서 유대인 정착촌으로 들어가면 어쩌란 말이요?”

유대인 정착촌에 팔레스타인 번호판을 단 차를 타고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다. “또 검문소는 어떻게 통과하라고…” 서안으로 진입하는 검문소에선 별 일이 없었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매우 까칠하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시간 동안 사람을 잡아두고 심문할 수 있다. 가족에게 통고하지도 않고 며칠 동안 억류하기도 한다. “검문소에서 뭐라고 해야 하죠? 타메르 당신이 군인들에게 설명해야 하지 않아요?”

타메르가 빙긋이 웃었다. “내가 왜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죠? 난 팔레스타인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미국인이고. 이스라엘인과 미국인은 서로 좋아하지 않나요? 이제 당신이 운전자요. 난 안내자고. 내 말대로 하면 문제 없어요.”

처음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타메르는 라말라에 가서 재스민이라는 인기 카페에서 한잔 하고 싶어했다. 성스러운 축제일이라 악명 높은 칼란디아 검문소에 수만 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3대 성소 중 하나인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기도하려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렇다. 타메르는 폭동의 현장처럼 보이는 곳으로 곧바로 나를 안내했다. 다행히도 성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에 지연되는 통과 절차에 좌절한 폭도 대다수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의 보닛을 두드리고 열린 차창으로 생수병을 던졌다. 라말라에 도착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너무 많이 해 손바닥이 쓰라렸다. 라말라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혼란스러운 시장, 아름다운 공원, 야세르 아라파트의 ‘거의 성스러운’ 묘지가 있다.

카페 재스민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과 멋진 드레스와 화려한 히잡을 쓴 여성이 가득했다. 거기서 우리는 물담배를 피우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타이베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난 한 병으로 족했다. 폭동과 꼬불꼬불한 길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운전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이 좀 들어도 뫼벤피크 호텔에서 묵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타메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와레에 가서 닭모이를 줘야 하거든요.” 타메르의 집에 도착하자 새벽 3시가 가까웠다. 닭들이 배가 고파 꼬꼬댁거렸다.

동이 트기도 전에 수탉 울음 소리에 잠을 깼다. 8시가 되자 타메르가 내 침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밤새 자지 않은 듯했다. 그날 헤브론을 관광하려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그는 전했다. 서안 여행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골탕을 먹지 않으려면 뉴스를 잘 들어야한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타메르가 말했다. “서안 곳곳에서 충돌이 있어요. 헤브론에 가기는 너무 위험해요.”

타메르는 아이폰으로 읽은 뉴스를 나에게 전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헤브론 외곽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득 탄 택시에 화염병을 던져 5명이 심한 화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지나면 헤브론도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예리코에 갑시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한 곳이지요. 하지만 먼저 이발을 하세요. 난 면도를 해야 해요.”

채소, 후무스(병아리콩 으깬 것과 오일, 마늘을 섞은 중동 지방 음식), 난, 라브네(고체 요구르트)로 아침 식사를 한 뒤 몇 분 차를 몰고 이웃도시 베타니에 갔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가 되살렸다는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곳에 있는 깨끗한 이발소에 들어갔다.

젤을 발라 머리를 뾰족하게 세운 젊은 이발사 무함마드가 내 머리를 자르고 면도를 해준 뒤 실로 눈썹 모양을 잡아주고, 귀 안에 난 털을 라이터로 태워주었다. 그동안 내내 그는 평면 TV를 쳐다봤다. 메카에서 카바 신전을 도는 무슬림 순례자들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알라를 위해 몸을 깨끗이 한 우리는 예리코로 향했다. 인구 1만9000명인 예리코는 요르단강 부근의 무성한 오아시스에 위치한다. 해발 260m 지점이다. 내가 삐걱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온통 붉은 시험산(신약성서에서 사탄이 예수를 시험했다고 알려진 곳) 정상에 오르는 동안 타메르는 아래에 남아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사람을 태우려고 대기하는 낙타와 노닥거렸다. 예리코의 기온은 49℃였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목동들이 베들레헴의 별을 봤다는 ‘목자들의 들판’ 부근에 있는 베이트 사호르의 ‘텐트’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요구르트 소스로 요리한 베두인 양고기 전통요리 만사프, 양고기와 닭고기를 서서히 익혀 육즙이 풍부하게 만든 요리, 케밥, 마나키시 자타르(참깨, 올리브유, 타임, 수막을 뿌려 구운 난)를 맛봤다.



사와레의 할레시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계단 세 층을 올라 옥상으로 가 별빛 아래서 사과향 물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그만이었다. 다음날은 나블루스로 갈 계획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는 도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타메르의 아이폰이 진동했다. 통화를 끝낸 뒤 타메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쉽게도 나블루스 부근에서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대요.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가야겠어요. 거기가 더 안전할 겁니다.”

사와레에서 차로 약 45분을 달려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기독교 순례자 1000명이 북새통을 이룬 예수탄생교회에 겨우 들어가 예수가 태어난 곳을 표시한 별 모양이 새겨진 곳을 구경했다. 그 다음 타메르의 팔레스타인 친구 두 명과 중동식 샌드위치 팔라펠을 먹었다.

한 명은 악명 높은 분리장벽에 추상화를 그리는 낙서 화가였다. 그는 곰처럼 몸집이 크고 수염이 매우 짙었다. 나머지 한 명은 힙합 음악가가 되려는 친구로 말총머리에 반항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검문소에서 12시간 동안 잡혀 있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사실 외엔 다른 이유가 없다.”

점심 후 타메르는 나에게 차를 몰라며 길을 안내했다. 그는 인간 GPS(위성위치확인 시스템)였다. “우회전 다음에 좌회전. 이제 똑바로. 검문소 통과 후 로터리를 돌아 다시 좌회전.” 몇 분 뒤 “여기 세우세요”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요?” 내가 물었다. “벽 바로 곁에 말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리장벽 바로 곁에 차를 세웠다. 높이 7.6m에 철조망까지 쳐 있다. 불길해 보이는 포탑에는 저격수들이 숨어 있었다. 그 장벽은 팔레스타인 자살폭탄테러범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나도 그 앞에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 콘트리트 장벽이 해를 가려 부근의 기온이 훨씬 서늘하게 느껴졌다. 벽은 화려하고 신랄한 낙서로 덮여 있었다. ‘사상 최초의 여성 비행기납치범’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있는 국보로 간주되는 레일라 할레드의 초상화도 그려져 있었다.

내 눈은 크고 검은 글자로 쓰여진 어구에 머물렀다. ‘이제 당신은 이곳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몇 분 동안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머물렀다. 어떤 이념과 정치를 따르든 간에 장벽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폭력의 슬픈 상징이다.

마침내 폭력사태가 잦아들면서 헤브론과 나블루스를 방문할 수 있었다.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헤브론으로 갈 때 타메르는 바짝 긴장하는 듯했다. 다행히도 가는 동안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벌집 같은 헤브론 중심지에 도착해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했다. 헤브론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25만 명이 살고 있다. 유대인은 언제나 극소수였지만 최근 몇 십 년 동안 주로 미국 출신인 이스라엘 유대인 수백 명이 도심으로 이주해 약 700명의 정착촌을 형성했다.

그 정착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군 3000명 이상이 그곳에 파견 나와 검문소를 설치하고 그 구역을 차단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숭상되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혔다는 동굴 위에 2000년 전 헤롯대왕이 지은 돌궁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조치는 당연히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구시가지 시장 곁에 주차한 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시장은 과일주스부터 속옷, 면봉까지 모든 것을 팔려는 상인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메르가 위쪽을 가리켰다. 쓰레기가 가득한 철망이 길고 좁다란 시장을 뒤덮고 있었다. “저 위의 아파트에서 유대인들이 내버리는 쓰레기를 차단하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철망을 씌웠다”고 타메르가 설명했다.

마침내 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검문소로 이어졌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갔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젊은 군인은 19세 정도로 보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그곳에 서 있는 게 따분한 듯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종교가 뭐죠?”

처음엔 역사적인 유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묻는 질문치고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만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당연하다. 사실 난 불가지론자다. 그러나 타메르는 그렇게 대답하지 마라고 했다. “기독교인으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하세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출입이 허용됐다.

나중에 타메르는 그 군인이 내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곳의 무슬림 전용 구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지갑을 꺼내고 시계를 풀었다. 그들은 내 가방을 뒤진 뒤 입장을 허락했다.

내부는 전형적인 모스크였다. 정교한 카펫, 나무 설교단, 이삭, 리브가, 사라, 아브라함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족장들의 동굴’은 보안이 삼엄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헤브론의 유대인 정착민들도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이슬람 둘 다의 족장이기 때문이다.

1994년 의사인 유대인 정착민이 이스라엘제 IMI 갈릴 공격용 소총을 들고 그곳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111발을 쏜 뒤 자살했다. 그날 29명이 사망했고 125명이 부상했다. 그후 이스라엘 정부는 모스크 내부에 벽을 쌓았다. 유대인 전용 구역은 ‘족장들의 무덤 회당’으로 불렸고, 무슬림 전용 구역은 ‘이브라히미 모스크’로 불렸다. 아브라함의 기념비도 절반으로 분리돼 한

쪽은 모스크에 속하고 나머지는 유대인 회당에 속한다.

모스크를 벗어난 뒤 다시 신발을 신었다. 타메르가 다른 검문소로 안내했다. 그는 그곳을 넘어갈 수 없었다. 다시 군인이 내 가방을 검색한 뒤 그 건물의 유대인 전용 구역 출입구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주머니를 비우고 가방을 넘겨 주었다. 경비원이 가방을 검색한 뒤 내 몸도 수색했다. 금속탐지기를 지나자 아름다운 유대교 회당이 나타났다. 촛불이 밝혀진 그곳에는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가득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머문 마지막 날 우리는 북쪽으로 차를 몰아 나블루스에 갔다. 인구 12만6000명인 이 도시는 해발 약 910m인 에발과 게리짐이라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한다. 무슬림과 유대인 양쪽이 성지로 생각하는 산이다. 로마인, 십자군, 맘루크인, 하심요르단인 등 시대에 따라 여러 세력이 통치했던 나블루스는 과거엔 문화 중심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으로 더 잘 알려졌다.

팔레스타인의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블루스도 번잡하고 교통체증이 심하며 혼란스럽다. 대부분 3층짜리 건물이며 높은 빌딩은 소수에 불과하다. 희한하게도 검은 급수탑이 도처에 세워져 있다. 이스라엘이 수도 공급을 차단할 경우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이 전쟁과 투쟁의 도시에서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나블루스는 밀가루, 치즈, 시럽으로 만든 페이스트리 쿠나페로 유명하다.

2000년 시작된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봉기) 동안 나블루스는 폭력사태가 가장 심한 도시였다. 이스라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자살폭탄으로 악명 높은 파타당의 무장조직 알-아크사 순교여단의 거점이 나블루스였다.

지금 나블루스의 구시가지의 모습은 음울하다.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건물들, 건물 벽에는 팔레스타인 ‘순교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페인트로 적혀 있다. 우리는 나블루스에 도착하자마자 알 야스민 호텔로 가서 아랍 샐러드와 후무스를 난과 함께 먹고 민트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무함마드라는 남자가 구시가지 관광을 안내했다. 관광을 마치고 나블루스를 떠나려고 했을 때 타메르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나블루스 외곽의 한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구타하고 올리브 농장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었다. 도시를 벗어날 때 구급차 여섯 대가 쏜살같이 우리를 지나쳐 도시로 들어갔다. 타메르는 예리코를 거쳐 집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예리코는 언제나 안전해요.” 그가 다시 나를 안심시켰다.

분리장벽에 도착했을 때 타메르도 나블루스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지친 듯 얼굴이 창백했다. “타이베 맥주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워야 진정이 되겠는데요”라고 그가 말했다. 덤으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당신이 팔레스타인에 가서 타메르를 만난다면 민트 레모네이드와 사과향 물담배를 사주면 그를 영원한 친구로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관광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덧붙인다. 서안은 혼자서 둘러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자주 변하기 때문에 그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나를 안내해준 타메르 할라세는 최근 관광 안내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일 코스에서 몇 주에 이르는 장기 코스까지 ‘개인 맞춤형 관광체험’을 제공한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info@tamertours.com이다.

서안 여러 도시의 당일 코스 관광상품을 제공하는 업체도 여럿 있다. 그중에서 예루살렘 아브라함 호스텔이 제공하는 헤브론 ‘2부제’ 관광상품을 권하고 싶다. 유대인 안내자가 오전을 책임지고 팔레스타인 안내자가 오후 일정을 맡는다. 그들의 이메일 주소는 tours@abrahamhostels.com이다.

- 필자 브래들리 웨츨러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GQ, 와이어드, 멘스 저널, 아웃사이드지에 기고하는 언론인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살며 현재 팔레스타인 여행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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