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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연기금 뭐가 다른가? - 과감히 반대표 던지고 경영진 퇴진 압박

해외 연기금 뭐가 다른가? - 과감히 반대표 던지고 경영진 퇴진 압박

미국·유럽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 세계 최대 일본 공적연금은 신중론



20년째 월트디즈니를 이끌던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은 2004년 3월 곤경에 처했다. 일부 주주들로부터 거센 퇴진 압력을 받은 것. 그 중심에는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기금(CalPERS, 캘퍼스)이 있었다. 캘퍼스는 5~6년 간 누적된 실적부진의 책임을 물어 아이스너 회장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그는 얼마 못 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연기금이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한 대표적 사례다.

기관투자자 중심의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1942년 주주제안권을 공식 인정한 게 출발점이다. 1980년대 들어 기관투자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구체화됐다. 단순하게는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부터 주주제안 등을 통해 지배구조 개선이나 경영진·사외이사 교체를 요구하는 것까지 방식은 다양하다.

사실 기관투자자가 발 빠른 정보력에 의존해 수익을 창출하던 시대는 거의 저물었다. 타이밍에 기댄 매수·매도만으로는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여, 주가를 올리려는 적극적인 경영 개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주행동주의의 주체는 주로 칼 아이칸 등 이른바 ‘기업사냥꾼’으로 불린 헤지펀드였다. 대규모 투자를 한 뒤 적극적인 주주제안과 인수합병(M&A) 등으로 가치를 끌어올리고, 주가가 오르면 비싼 가격에 파는 방식이다. 최근 애플에 자사주 매입을 강요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났던 아이칸은 최근 이베이로 타깃을 바꿨다. 주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베이의 지배구조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베이의 자회사인 페이팔의 분사를 촉구하는 등 강도를 높이고 있다. 최근엔 주식을 장기보유하는 뮤추얼펀드와 연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주주행동주의의 성장은 사회적 책임 투자(SRI)의 부각과도 관계가 깊다. 공적 성격을 가진 연금이 수익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환경 문제 해결(Environment), 사회인프라 투자(Society), 기업지배구조 개선(Governance) 등 사회적 목적을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는 견해다.

이른바 ‘ESG 투자 원칙(책임투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수익의 최대화라는 기본 목적은 지켜야 한다. 연금이 공공적 성격을 띠는 만큼 여러 사회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엔론이나 월드컴 등의 회계부정 사태 이후 연기금의 감시 역할이 대두된 것도 주주행동주의가 강화된 배경 중 하나다.

해외 연기금 중에서는 캘퍼스를 비롯한 미국 내 일부 연기금과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 네덜란드 공적연금(ABP) 등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편이다. 이 중 캘퍼스는 주주행동주의의 원조로 꼽힌다. 기금 규모가 2500억 달러(약 268조원)에 달하는 미국 내 대표적인 공적 연기금이다. 지난해 16.2%의 수익률을 기록할 만큼 운용 성과도 좋다.

캘퍼스는 1987년부터 매년 기업의 경영 성과와 주가, 지배구조 등을 평가해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를 발표하고 있다. 감시 대상 기업의 리스트를 정해 집중적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다. 발표 초창기에는 10%에 채 못 미치는 기업만이 캘퍼스가 제안한 정책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 비율이 갈수록 높아져 최근엔 80% 이상이 캘퍼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기업이 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주주들과 연대해 경영진을 압박한다. 각종 집단 주주소송에 대표로 참여하고, 정부를 상대로 입법 청원 운동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 법무부에 경영권 방어 수단인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 채택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전달한 적도 있다.



‘캘퍼스 효과’ 주가 상승으로 확인지배 구조나 이사 선임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 캘퍼스는 아이스너 회장뿐만 아니라 2003년 뉴욕증권거래소(NYSE) 리처드 그라소 회장을 퇴진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씨티그룹과 코카콜라의 경영진 교체를 시도한 사례도 있다.

2011년에는 애플에 주주 과반수가 찬성해야 이사 선임이 가능하도록 하는 다수결의제를 도입하도록 요구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당시 캘퍼스가 보유한 애플의 지분은 단 0.26%에 불과했다.

심지어 캘퍼스가 경영에 개입하면 주가가 상 승한다 는 ‘캘퍼스 효과(CalPERS Effect)’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캘퍼스에 따르면 1987년부터 2007년 사이 포커스 리스트에 오른 139개 회사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

리스트에 포함되기 전 기준점 대비 연-30.9%의 수익률을 보이다 리스트에 포함된 후 5년 간 기준점 대비 15.4%의 초과 수익을 얻었다. 해당 기업의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기업의 성과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주가에 반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데이터는 평균의 함정을 내포하고 있어 정확하지 않다.

실제로는 포커스 리스트에 포함된 기업 중 플러스 수익률을 낸 기업보다 마이너스 수익률을 낸 기업이 더 많았다. 이 추세는 5년 동안 그대로 유지됐고, 중위 수익률도 같은 기간 내내 마이너스였다. 캘퍼스 효과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또 포커스 리스트에 포함된 회사는 대부분 시장 가치가 낮은 가치주여서 캘퍼스의 개입이 주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가만히 둬도 주가가 오를 회사였다는 의미다.

5000억 달러(약 536조원) 이상의 기금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교직원연금보험(TIAA-CREF) 역시 지배구조 개선이나 사회적 책임 투자를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한다.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업이 있으면 일차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효과가 없으면 주주제안권을 행사해 기업의 개선 노력을 촉구한다. 네덜란드 사회보장기금(PGGM)은 캘퍼스의 포커스 리스트와 유사한 ‘워치 리스트’를 발표한다.

네덜란드 공적연금의 자금을 운용하는 네덜란드 APG는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경영행위에 대해 엄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약 50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하는 만큼 파워가 막강하다. 주요 투자원칙인 ‘ESG 투자’에 대해 강력한 의결권을 행사한다. APG가 주도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무산시킨 사례가 많다.

국내에서는 2012년 SK텔레콤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려 할 때 반대표를 던진 바 있다. 노르웨이 연기금(GPFG)을 운용하는 노르웨이투자관리청(NBIM) 역시 투자 대상 기업의 ESG를 고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원칙을 어긴 기업에 대해서는 아예 투자를 배제하기도 한다.



의결권 찬반 여부 홈페이지에 사전 공개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는 2009년 기업 경영진이 발의한 안건 3만475건 중 11%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수치만 보면 비중이 크지 않지만 ‘스톡옵션의 도입 또는 변경’과 관련된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 비율이 39%로 급증한다. 이사의 임금·복지 등에 관한 이슈에 더 엄격하게 접근한다는 의미다.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는 의결권 행사 여부를 사전에 공지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체로 1~2달 전에 의결 안건에 대한 찬반 여부를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알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주주행동주의가 확대된 건 분명하지만 전 세계 모든 연기금이 적극적인 경영개입에 나서는 건 아니다. 미국 내에서도 캘퍼스와 캘리포니아 교원연금(CalSTRS) 등을 제외하면 여전히 주주권 행사에 신중한 편이다. 세계 최대 공적 연기금인 일본 공적연금(GPIF)도 그렇다. 일본 공적연금 역시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로 해당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인식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국민의 돈’을 이용해 다른 목적으로 의결권을 쓸 수 있다는 우려도 새겨 들었다.

일본 공적연금은 후생노동대신으로부터 기탁 받은 연금 적립금을 민간운용기관을 통해 운용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주주권 행사 역시 운용수탁기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역시 장기적인 주주이익의 최대화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을 때만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너무 과하진 않은 지적절히 통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뒀다.



수탁자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원칙 적용실제로 공적 연기금의 주주제안, 의결권 행사, 투자자 연대 등은 철저하게 신‘ 인의무(Fiduciary duty)’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신인의무란 연금을 맡긴 사람의 입장에서, 이들의 의사에 맡게 운용해야 할 책임을 뜻한다. ‘Fiduciary(수탁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산 관리를 위탁 받은 사람을 일컫는다. 연금 가입의 주 목적이 노후생활 보장이기 때문에 연금 운용에서의 신인의무는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주권은 반드시 수익률 제고란 목적이 있어야만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곽관훈 선문대 경찰행정법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인식한다면 문제점을 최소화하고 장점을 최대화하는 준비가 필요하다”며 “우리나라는 신인의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 이를 강화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지적했다.

이들 공적 연기금을 우리나라 국민연금과 단적으로 비교하긴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캘퍼스나 미국 교직원연금보험, 네덜란드 공적연금 등은 특정 직종을 위한 연금이라 전 국민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과는 성격에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연금·사학연금 등이 그렇듯 이들은 민간 펀드처럼 운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과 비슷한 미국 사회보장연금(OASDI)는 연방정부가 원금과 이자를 보장하고, 재무성이 발행한 비시장성 국채에만 전액 투자한다. 일차적으로는 거대한 자금이 풀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시장 교란을 막기 위해서지만 정부가 민간기업의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걸 막기 위해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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