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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카 경영

레이스카 경영

정비팀은 미리 철저히 연습해둔 대로 정교하게 짜여진 동작에 곧바로 착수한다. 그리고 불과 약 2.3초 만에 모두 끝낸다.



포뮬라 원(F1) 레이스카가 피트레인(pit lane, 정비구역 통로)으로 쏜살같이 들어선다. 시속 320여㎞로 트랙을 달리다가 피트레인에서 80㎞로 급격히 속도를 떨어뜨린다. 서거나 주저앉은 자세로 대기 중인 20명의 정비팀 앞에서 멈춰 선다. 정비팀은 미리 철저히 연습해둔 대로 정교하게 짜여진 동작에 곧바로 착수한다. 그리고 불과 약 2.3초 만에 모두 끝낸다. 4개의 타이어를 분리하고 새 걸로 교체했다. 차는 다시 트랙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마쳤다.

강아지의 귀를 긁어주려고 허리를 잠깐 굽히는 순간 모두 끝나버린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원자시계의 속도와 정확성으로 실행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도의 계획이 필요하다. 낭비되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팀원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에 레이저 광선 같은 집중력을 발휘한다. 모두 자기 작업에 적당한 도구나 부품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중간 정비가 끝날 때마다 팀원끼리 평가 미팅을 갖는다. 무엇이 잘 됐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 검토한다.

이제 F1 정비팀의 일관된 효율성을 치약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작업반에 적용한다고 상상해보자.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서 실제있었던 일이다. 그 영국 다국적 제약회사가 영국 회사 맥라렌 그룹과 협력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였다. 맥라렌은 가장 성공적인 F1팀을 소유한 회사로 널리 알려졌다. 잉글랜드 메이든헤드에 있는 GSK의 센소다인 치약공장에서 생산시간을 단축하려는 목적이었다.

맥라렌 엔지니어들은 처음에는 한 라인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 라인의 기계와 관련된 데이터를 입수해 모델에 입력한 뒤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들은 가장 큰 병목 중의 하나가 교체 시간임을 알아냈다. 라인을 세우고 가령 다른 맛의 치약제품으로 교체하는 데 39분가량이 소요됐다. 그뒤 맥라렌 정비팀이 개발한 유형의 시간절약 공정을 라인 근무자들에게 교육했다. 그것이 주효했다. 라인의 가동중단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치약을 연간 700만 개 가까이 추가로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GSK는 올해 맥라렌식 효율화 절차를 전 세계의 산하 소비재 생산공장으로 확대 실시할 계획이다. 우선 8개 해외 공장 중 미국·영국·스페인 3개 지역부터 시작한다.

이질적인 두 회사의 파격적인 파트너십이다. 하나는 번쩍거리며 번개처럼 빠르고 다른 하나는 정확하고 질서정연하다. 약 5년 전 맥라렌 회장 겸 CEO인 론 데니스가 시동을 건 더 원대한 사업확장 계획의 일환이다. 1968년 설립된 이후 수십 년 동안 맥라렌은 많은 분야에서 기술노하우를 축적해왔다.

복잡한 레이스카를 최대한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계속 달릴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분야의 기술들이다. 데니스는 궁금증이 생겼다. 레이스트랙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를 다른 업계에 판매하면 어떨까? 그에 따라 맥라렌은 요즘 신소재·공기역학·전자를 포함하는 분야의 기술 노하우를 모터 스포츠와는 동떨어진 다른 업종에 적용하고 있다. 건강의료와 대중교통으로부터 데이터센터와 석유·가스 탐사까지 온갖 업종을 망라한다.

맥라렌 응용 기술(MAT) 사업부의 중점 사업은 맥라렌의 능력을 판매하는 일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종종 실시간으로) 입수하고, 모델에 입력해, 문제해결에 도움 될 만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제품을 설계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능력이다. 모두 번개 같은 속도로 해치운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해마다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19개 그랑프리 레이스가 열린다. 경주가 열릴 때마다 레이스카들은 갖가지 날씨 아래서 최대 시속 350여㎞의 속도로 트랙을 질주한다. 맥라렌 엔지니어(그뿐 아니라 라이벌 팀의 엔지니어)들은 원격측정(telemetry), 즉 무선통신 시스템을 이용해 그 자동차들을 계속적으로 모니터한다. 공기역학, 연료소비, 도로상태, 타이어 수명 등 온갖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그 데이터는 이어 런던 교외 워킹에 있는 맥라렌 서버로 전송된다. 그것을 알고리즘 모델에 입력하면 즉시 수천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가동해 예상 정보를 토해낸다. 트랙에서 대기 중인 정비팀이 그것을 이용해 초광속으로 결정을 내린다(예를 들어 주행 중 정비시간을 언제로 잡을지 등). 1000분의 1초로 운명이 갈리는 레이스이기 때문이다.

“레이스트랙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를 다른 업계에 판매하면 어떨까?”
맥라렌은 심지어 그 데이터를 즉석에서 유용한 제품으로 변환할 수도 있다. 이 회사는 F1 시즌 중 하루 24시간, 한주 7일 내내 17분에 하나씩 새 부품을 설계하고 테스트하고 만들어낸다. 이 같은 유형의 실시간 데이터 모니터링과 반응은 신약개발 과정의 최대 병목으로 꼽히는 테스트의 효율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약 임상실험 참가자들은 대체로 몇 주에 한번씩 활력징후 검사를 받는다. 의사를 방문할 때다. 제약회사들은 검진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이용해 신약의 효능을 평가한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종종 불가피하게) 진행이 더딘 과정이다. 도움이 될 만큼 충분히 환자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여러 달이 필요하다. 신약을 발견한 뒤 출시하기까지 보통 10년이 넘는 오랜 세월과 비용이 드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과정을 개선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컨설팅 업체 매킨지사는 미국 제약회사들에게 빅데이터를 더 많이 활용하라고 촉구했다. 예컨대 임상실험의 개선이나 생체작용의 모델 수립 과정을 제안했다. “미국 건강보험 시스템 전반에 걸쳐 연간 최대 1000억 달러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라렌과 GSK가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법은 ‘생물원격측정법(biotelemetry)’이라는 기술을 이용하는 빅데이터 실험이다. 맥라렌은 레이스카의 ‘건강’을 진단하는 원격측정 기술을 응용했다. 신약실험 참가자의 활력징후와 이동성을 24시간 7일 내내 측정하기에 적합하도록 맞춤 개조했다(이 경우엔 관절염과 뇌졸중 회복 치료제 실험이었다).

약효가 있는지, 또는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하는지 연구진이 더 신속히 판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험을 중단하거나 변경해야 할 경우 그것을 빨리 알아낼수록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 환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환자에게) 속도는 정말 절대적인 명제다.” GSK의 연구개발 전략 책임자 스티브 메이휴가 말했다. 암치료제 같은 일부 신약의 경우 수명을 수개월, 수년씩 연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자에게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데이터는 몇 주 마다 병원에서 체크되는 활력징후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원이다. 맥라렌에서 MAT 를 담당하는 제프 맥그래스 부사장이 말했다. “환자가 병원을 찾아갈 때는 실상 실시간 검사가 아니다.”

맥라렌에게는 현재 GSK 외에도 20개 안팎의 응용기술 고객사가 있다. 그중에는 피닉스에 본점을 둔 ‘IO 데이터 센터’도 있다. 데이터 센터는 통상 논스톱으로 전면 가동된다. 이용자 수요가 급증할 경우에 대비해서라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기초를 이루는 데이터 센터가 세계 연간 전력생산량의 2%를 먹어 치우는 까닭이기도 하다.

맥라렌은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이용자 수요를 예측해 에너지 사용량을 더 정확히 맞추도록 했다. 덕분에 그들의 전력소비가 크게 줄었다. 요즘은 데이터 기반 설계와 공기역학을 이용해 IO가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도록 돕는다. 에너지 사용방식을 더 효율화하는 시스템이다.

맥라렌의 또 다른 고객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이다. 현재 분리된 항공관제와 지상관제 시스템을 동기화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맥라렌이 개발 중이다. 들어오는 항공기가 아직 대서양 상공에 있는 동안 속도를 조정하려는 목적이다. 그래서 실제로 공항에 이르렀을 때 즉시 착륙해 가장 가까운 빈 게이트로 향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들어오는 항공기를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공중에서 대기 모드로 비행하도록 하는 관행이 종식된다. 따라서 엄청난 연료의 낭비도 막게 된다.

트랙에서의 비결을 다른 기업들에게 판매하려는 F1 팀은 맥라렌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윌리엄 그랑프리 엔지니어링에는 첨단공학 사업부가 있다. 자동차·대중교통·우주항공·에너지 등 4개 시장에서 에너지 효율 향상기술의 판매를 담당한다. 지난 1월 스코틀랜드의 2개 섬과 계약을 발표했다. 그들의 고정 플라이휠(stationary flywheel) 기술을 이용해 섬들의 전력공급을 안정화하는 계약이다. 에너지를 회수해 저장한 뒤 필요할 때 공급하는 기술이다. 섬들은 현재 간헐적인 풍력 발전에 크게 의존한다.

이 같은 다각화 움직임은 일정 부분 FI 레이싱의 경제성이 가혹한 편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스폰서십에 수입을 의존한다. 한정적인 자금이 해마다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썩 좋은 모델은 아니다”고 데니스가 말했다. “살아남기가 힘들다. 이익을 내기가 어렵다.”

단적인 증거로 1960년대 이후 120개 안팎의 팀이 FI에 뛰어들었다가 빠져나갔다. 레이스 기술의 새로운 응용분야를 모색하려는 맥라렌의 계획은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웨일즈에 있는 카디프 비즈니스 스쿨 자동차 경제학과의 개럴 리스 명예 교수가 말했다. “비용은 이미 투입됐기 때문에 소득이 수익성에 직결되는 매출을 발생시킨다.” 이는 분명 맥라렌의 핵심 수익원으로 자리잡았다. MAT의 소득이 제로에서 5년 만에 연간 9300만 달러 선으로 늘어났으며 흑자 경영을 한다고 데니스는 주장한다. 향후 5년 이내에 매출이 3억3200만 달러로 급증한다고 그는 예상한다.

맥라렌의 기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중이며 그 사업부에 1억66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할 계획이라고 데니스는 말한다. 윌리엄스도 응용 엔지니어링 사업부가 성장세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뒤를 따르는 다른 F1 팀은 없다. 반면 예컨대 페라리와 레드불 같은 몇몇 일류 팀에게는 레이싱 카가 각각 고가의 스포츠카와 에너지 음료를 널리 마케팅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현재로선 FI 기술을 수익화하는 면에선 맥라렌과 윌리엄스가 유리한 안쪽 트랙을 독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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