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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화폐전쟁 조짐

글로벌 화폐전쟁 조짐

인도 중앙은행 총재 버냉키와 설전 … 위안화 약세도 눈 여겨 봐야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왼쪽)는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양적완화 정책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한번 그 꼴을 더 당할 생각이냐?(Is yesterday once more?)”라고 물었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맞받아쳤다. 점잖음과 우아를 모토로 하는 중앙은행가들 사이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드잡이질이다. 이 설전은 4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 직전에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의 스케치다.

라구람 라잔 총재는 2003~2006년까지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면서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리고 이번 강연은 ‘다시 한번 2008년?’이라는 주제로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힐난하는 내용이었다. 버냉키 전 의장은 “현실과 이론은 다르다”면서 “학교로 돌아가라”고 받아 쳤다. 라잔 총재는 IMF 이코노미스트를 지내기 전에는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다. 이 보기 드문 구경거리는 선진국과 신흥시장 사이의 이해관계의 충돌이 배경에 있다.



양적완화는 사실상 환율 조작?라잔 총재가 이날 강연과 그 뒤 4월 28일자 칼럼을 통해 비난한 것은 선진국들의 비전통적 통화정책, 특히 양적완화(QE, Quantitative Easing)에 관한 것이었다. 라잔 총재는 양적완화는 사실상 외환시장 개입 즉, 환율 조작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적완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경제와 금융시장에 작용한다. 첫째로 장기 국채 수익률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게 목표다. 국채수익률은 결국 환율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해당 국가 통화의 환율을 낮추는 효과가 발생한다. 양적완화는 제로 금리 상태에서 실질 금리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낮은 통화를 기준으로 ‘캐리 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준다. 예컨대 미국 달러화 베이스 캐리 트레이드는 미 국채 2년물 수익률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미국과 일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은 고의적으로 엔화 약세를 부추겨 엔화 캐리 트레이드를 확대시키려고 했다. 미국은 양적완화와 오랜 기간의 저금리를 약속하는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안내)로 달러화 캐리 트레이드를 유도한다. 이런 캐리 트레이드(자금이 도착하는 국가에서는 이른바 ‘핫 머니’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신흥시장에는 대단히 골칫거리다.

선진국 통화의 약세로 인한 간접적 무역수지 악화 현상만으로도 대처하기가 쉽지 않은데, 핫 머니까지 유입되면 신흥시장의 자산 가격이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등 오히려 더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핫 머니는 선진국과 신흥시장의 금리차를 이용한 캐리 트레이드가 더 용이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국제 보유통화가 아니며, 금융시장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신흥시장은 따라서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일본 중앙은행이 이른바 질적·양적완화(QQE)를 결정했을 때 ‘근린궁핍화 정책’라는 비난이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같은 국제적인 부작용을 ‘유출효과(spill-over)’라고 부른다.

라잔 총재는 양적완화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시장이 붕괴했거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중앙은행들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시장 기능이 회복된 이후에도 이런 비정상적 조처를 지속한다면 심지어는 해당 국가 내에서도 그 이점은 불명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정책들은 선진국과 신흥시장 모두의 자산 가격 변동성을 키우고 환율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라잔 총재의 견해로는 선진국들의 일방적인 통화정책은 ‘게임의 규칙의 파기’다. 위기가 종식되었는데도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내적인 성장이 제한되었을 때에 구조개혁 대신에 자산 가격을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각국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는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라잔 총재는 양적완화에 맞서서 신흥시장 국가들이 ‘외적 양적완화(QEE, Quantitative External Easing)를 하는 것은 정당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말은 우아하게 외적 양적완화지만 내용은 신흥시장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그는 선진국의 양적완화가 각국 사이의 환율과 수요를 변경시켜 작동하는 것이라면, 외적 양적완화와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정도의 차이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라잔 총재의 주장과 유사한 비판이 2010년 미국 연준의 2차 양적완화 시행 직후 브라질의 재무장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바 있다. 당시 귀도 만테가 장관은 2차 양적완화를 비난하면서 ‘화폐전쟁’에 해당하는 인플레이션의 수출이라고 말했다. 라잔 총재의 주장은 이 같은 비판을 좀 더 이론적으로 정교화한 것이며, 외적 양적완화라는 용어로 처음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경쟁적 통화 절하 → 무역 분쟁 가능성외적 양적완화는 이미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3월 이후 중국 위안화는 무려 7년 간의 일방적인 평가절상 추세에서 벗어나 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달러당 6.06 위안까지 내려갔던 위안화 환율은 4월 말에는 6.26 위안으로 치솟았다. 처음 위안화 약세가 나타날 때만 해도, 시장 관계자들은 중국 인민은행이 원자재를 베이스로 한 금융 투기와 핫 머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일시적 조처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이상 위안화가 계속 약세를 보이자(위안화는 인민은행이 매일 기준 환율을 고시하는 준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다), 조금씩 평가가 바뀌고 있다. 4월 말 발간된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는 중국을 환율 조작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우려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외환시장 개입은 사실상의 ‘통화전쟁’에 해당한다. 더구나 중국·러시아·브라질·인도·남아공은 4월 초에 올해 말까지 선진국 위주의 IMF에 대항할 수 있는 브릭스 은행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공식적으로는 미국 연준은 국제적 공조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미국 경기 회복세가 현저하게 둔화돼 양적완화 축소 규모가 축소되거나 금리인상 시기가 더 뒤로 늦춰진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신흥시장 통화 강세가 더 이어진다면 신흥시장 국가들이 공동 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1930년대 대공황 당시와 마찬가지로 경쟁적 통화절하가 결국은 무역 장벽으로 이어지는 대립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라잔 총재의 발언은 그 서곡을 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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