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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퇴직 공무원의 쓴소리 - “법으로 금지해야 관피아 사라진다”

어느 퇴직 공무원의 쓴소리 - “법으로 금지해야 관피아 사라진다”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경호 전 서기관.



2006년 말, 퇴임을 앞둔 산업자원부 서기관이 쓴 한 권의 책으로 관가는 발칵 뒤집혔다. 공무원 사회의 무능과 악습·부패·비리를 폭로한 <과천블루스> .

치부가 드러난 관료 사회는 반성 대신 떠나는 동료를 징계에 회부하고 소송을 냈다. 책에서 판교 신도시 정보를 미리 빼내 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은 옛 건설교통부 공무원들은 저자인 이경호 전 서기관(당시 59세)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 전 서기관은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 뒤 건교부 공무원들도 아무 탈이 없었다. 관료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8년이 흘렀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척결하자’, ‘국가를 개조하자’며 요란한 요즘, 무모했던 한 퇴임 공무원이 보는 한국 사회, 관료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6월 26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그를 만났다. 책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나온 이경호 전 서기관은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파수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여파로 관피아 척결이 화두다.

“관피아 추방 문제는 과거 경제기획원(EPB)처럼 하라고 말하고 싶다(이경호 전 서기관은 경제기획원에서 오래 근무했다). 기획원은 1983년에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을 만들 때 다음과 같은 법조항을 신설했다. ‘집행간부(임원)는 사장이 소속 직원 중에서 임명하여야 한다(제15조)’. 이 법 조항으로 퇴직공무원들의 낙하산 인사는 원천 봉쇄됐다. 하지만 10여 년 후, 공무원들의 집단 로비로 제15조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 적폐가 관피아다.

정부가 관피아를 정말로 뿌리 뽑고 싶다면, 경제기획원이 했던 것처럼 공직 유관단체 관련 법과 공직자윤리법 등에 퇴직 공무원의 낙하산 금지를 ‘피(血)’로서 새겨놓으면 된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도 관피아의 무능·부정·부패·불법·전관예우가 한 원인이 됐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이번 기회에 관피아를 근절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람이 없으면 모를까 나라를 위해 일할 인물은 많다. 관피아가 없어도 대한민국은 잘 굴러갈 것이다.”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파수꾼이 필요하다.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에스겔서 33장 1~6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만약 어떤 나라에 적군이 쳐들어올 때 파수꾼이 비상나팔을 요란하게 불어 주었는데도 백성이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적군의 칼에 맞아 죽으면 그것은 백성의 탓이다. 그러나 파수꾼이 비상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적군이 쳐들어 와 생명을 잃는 백성이 생긴다면, 백성이 죽은 책임은 그 파수꾼에게 있다.’

파수꾼은 정치·경제·사화·문화 등 전 분야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미리 발견하고, 그것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랄하게 경고를 하거나 비상나팔을 불어주어서 국민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사람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발생할 때까지 해양경찰청·해양수산부·검찰·경찰·감사원은 물론 언론에서도 위험에 대해 아무도 비상나팔을 불지 않았다.”

예전에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는 늘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KAL기 추락, 외환위기 등 대형 사건·사고가 연속으로 터졌다. 정부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고대책 위원회를 만든다, 법을 만든다, 관련 규정을 뜯어고친다 하면서 일대 소동을 벌였다. 언론과 여론도 이 사건을 커다란 동네북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만약에 우리 사회가 선진국처럼 요소 요소에 파수꾼이 있었다면, 예를 들어 검역 파수꾼, 화재 파수꾼, 홍수 파수꾼 등이 있어 각각 예상되는 위험 상황에 대해 평소에 늘 신랄한 경고를 하거나 비상나팔을 불어 주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엔 지금까지 파수꾼이 없었나.

“경제 분야에선 경제기획원이 경제 파수꾼 역할을 했다. 1980년 대 말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경제기획원은 이런 극심한 빈부격차를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국민감정이 폭발할지 모른다고 수없이 경고했다. 그리고 경제 파수꾼으로서 대한민국의 경제민주화를 위해 비상나팔을 불었다.”

구체적으로 뭘 했나.

“지난해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됐지만, 경제기획원은 이미 20여년 전인 1990년에 경제민주화 정책을 시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토지공개념법과 임금관리방안이다. 토지공개념법의 핵심은 택지소유상한제인데, 내용은 서울 및 대도시는 1가구당 200평, 지방은 400평으로 택지소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부동산 과다보유를 막는 정책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택지소유상한제다.

기획원은 ‘국가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헌법 제119조 2항을 근거로 토지공개념을 제정해 1990년부터 시행했다. 또한 1987년 6·29 민주화선언 이후, 대기업 강성노조들이 대규모 파업을 하면서 연 15% 이상의 높은 임금인상률을 요구하자 고임금 방지를 위해 1992년에 강력한 ‘임금관리 방안’을 실행했다. 내용은 정부투자기관·금융회사·대기업의 임금인상률을 총액기준 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사회주의 발상이라며 반발이 컸을 것이다.

“그런 반발로 나중에 정책이 후퇴했다. 기획원이 실시한 경제민주화 정책은 빈부격차를 대폭 감소시켰고(상위 5%의 토지소유 비중이 65.2%→40%로 감소), 정부투자기관·금융회사·대기업의 임금인상률은 5% 선에서 안정됐다. 하지만 1994년에 경제기획원이 없어지고 4년 후인 1998년에 두 법은 폐지됐다.

그 결과 지금 이 나라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진행되고 있고, 천문학적 고임금을 받는 ‘신의 직장’이란 게 생겨났다. 만약에 경제의 파수꾼을 자처한 경제기획원이 존재했다면, 세월호 참사의 야기자인 유병언 일가가 부동산을 460만평(1500만㎡) 넘게 소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신의 직장’이란 괴물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후배 공무원들이나 관료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정책을 펴려면 진심을 갖고 확실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현 정부는 ‘손톱 밑 가시 뽑기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규제 개혁을 한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손톱이 아니라 손목을 잘라서라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86년 정부는 경제 성장과 규제 개혁을 위해 전자공업진흥법·기계공업진흥법·철강공업진흥법·조선공업진흥법·비철금속제련사업법·석유화학공업육성법·섬유공업근대화촉진법 등 7개 법을 모두 폐지했다.

7개 법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규제의 암덩어리’였고, 기업에는 ‘목구멍 속의 칼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공부는 대경실색했고, 결사반대 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획원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해 상공부는 1986년에 7개 법을 모두 폐지하고, 그 대신 ‘공업발전법’ 한 개를 새로 만들었다. 공업발전법’에서는 규제 조항을 99% 모두 없애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같은 세계적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7개 법 폐지는 경제학자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기상천외한 규제타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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