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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 모종혁의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⑫ 윈난성 리장 나시족의 ‘인주’

Travel | 모종혁의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⑫ 윈난성 리장 나시족의 ‘인주’

평균 해발 2418m의 중국 대표 관광지 … 지하 술독에서 3~20년 숙성
헤이룽탄호수에서 바라본 위룽설산. 리장에서 위룽설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윈난성 서북부에는 두 개의 성산(聖山)이 있다. 리장의 위룽설산과 더친의 메이리설산이다. 두 산의 해발은 각각 5596m, 6740m에 달한다. 만년설이 뒤덮인 고산준봉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처녀산이다. 위룽설산은 나시족의 성산이고, 메이리설산은 티베트 불교의 8대 성산 중 하나로 티베트인의 숭배 대상이다.

위룽설산은 리장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13개의 봉우리가 모여서 마치 은색의 용이 춤추는 모습과 같다. 고산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어, 위룽설산의 날씨는 하루 종일 오락가락한다. 언제나 구름 속에 숨어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위룽설산은 티베트고원에서 내려오는 한랭전선을 막아주는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덕분에 리장은 평균 해발이 2418m에 달하지만, 연 평균 온도는 12.6~19.8℃로 쾌적하다.

겨울철도 4~11.7℃를 유지해 춥지 않다. 위룽설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은 산 구릉에 헤이룽탄이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었다. 맑고 시린 헤이룽탄은 다시 여러 갈래로 흘러내려가 리장을 형성했다. 리장은 고성구와 4개 현, 69개 향진, 446개 촌으로 구성됐다. 지난해 기준 총인구는 126만9000명으로 인구 밀도가 낮다.

다옌전을 뒤덮은 층층이 겹쳐진 나시족의 전통 기와집들.
나시족은 본래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지금도 남녀 모두 양가죽을 걸치는 유목민 특유의 복식문화가 남아 있다. 나시족이 옛 거주지를 떠난 것은 한족·티베트인·창족 등 주변 민족들의 압박 때문이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해 나시족은 먹고 살 목축지를 찾아 대탈출을 감행했다.

리장은 중국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지난해 중국 각지와 외국에서 온 관광객은 무려 2079만명에 달했다. 이들이 뿌린 돈만 278억6000만 위안(약 4조5690억원)이었다. 리장이 세인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6년 2월. 규모 7의 강진이 발생해 293명이 죽고 3700여명이 다쳤다. 수많은 건물과 민가도 붕괴됐다. 지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리장의 숨은 매력을 발견했다. 지진의 여파 속에 새로 건설한 도시는 타격이 컸지만, 옛 기와집이 밀집한 다옌전은 피해가 적었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수백년 된 목조 기와집은 70% 이상 멀쩡했다. 기둥과 대들보를 사개맞춤 식으로 결합한 전통 건축술이 내진의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마을 구석구석까지 이어진 골목과 수로는 자연친화적이고 주민에 대한 배려가 세심했다. 입구에서 세 갈래로 나뉜 수로는 마을 전체 3.8㎢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1997년 12월 중국 정부는 리장고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고, 본격적인 관광 개발에 나섰다.

리장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파경.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나시족의 백과사전이다.
오늘날 리장은 관광으로 먹고 사는 도시로 변모했다. 여행업에 종사하는 주민만 10만여명이고, 시정부재정 수입의 절반 가까이가 관광산업에서 나온다.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또 다른 비결은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풍습이다. 티베트·창어계에 속하는 언어, 뜻과 음을 있는 상형문인 동파문자, 동파라는 사제가 주관하는 샤머니즘 종교인 동파교, 기본 음계의 악보와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나시고악 등이 그것이다.

중국에서 한족을 제외하고 독자적인 언어·문자·종교·예술을 보존한 소수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나시족은 동파문자를 이용해 신화와 전설, 종교의례, 천문역법, 민속풍습, 의학 등을 기록한 동파경을 남겼다. 지금까지 보존된 동파경의 수는 무려 1만4000여권.

전통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종이와 목판에 기록돼 있다. 우주와 인생에 대한 고뇌, 하늘과 땅, 현세와 내세에 대한 탐색, 세상의 진리 등 철학적인 담론부터 하늘, 달, 산천, 동물과 새, 물고기와 곤충 등 나시족의 문명세계를 모두 담은 백과사전이다. 이런 가치 덕분에 2003년 유네스코는 동파경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동파교는 난생(卵生) 설화를 지니고 있다. 음의 세계는 검은 알이, 양의 세계는 흰 알이 태어난다. 알에서 태어난 인간은 생전에서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하늘의 세계인 천계에 가기도 하고 지옥의 세계에 간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교리다. 또한 ‘여성에게 고개를 숙이고 떠받칠 것’을 강조한다. 최고신인 태양신이 여신인 것을 봐도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전통과 문화를 지닌 나시족은 평소 민족의상을 즐겨 입는다. 여인네들은 날마다 다옌전 입구 광장이나 쓰팡제에 나와 밤낮으로 춤을 춘다. 귀찮을 법한 여행객의 카메라 세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외지인과 관광객에게 우호적인 풍토는 그들의 술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시족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융숭히 대접한다. 먼저 술을 권하며 객고를 풀게 하는데, 이 때 내미는 술이 바로 ‘인주’다. 인주는 지하 저장고에서 숙성되는 술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리·밀·수수 등을 원료로 만든 발효주다. 술을 빚을 때 보리누룩을 많이 사용하고 대추를 넣는다.

술독을 지하에 저장해 보통 3~20년까지 숙성시킨다. 알코올 도수는 20도 안팎으로 다른 중국 술에 비해 낮다. 오랜 숙성 탓에 향은 진하지만 맛은 달고 부드럽다. 포도당과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중국에서는 영양주로 선호된다. 명절·축제 때 남녀를 불문하고 인주를 마신다.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먼저 들이킨다. 일부 마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술을 담가 놓았다가, 장성해 혼례를 치르는 날 축하주로 내놓았다.

나시족은 다옌전에 갓 정착했을 때부터 술을 담갔다. 명·청대 한족의 증류법을 받아들여 양조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지하에 술독을 밀봉해 숙성시키는 기술도 이 때 개발됐다. 이 덕분에 일정한 도수와 당도, 향을 유지하게 됐고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술도가도 등장했다. 20세기 전반기 자신들의 성을 브랜드로 내세운 허(和)·양(楊)·리(李)·황(黃) 아줌마집이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 리장에 들어온 바이주(白酒)의 인기에 큰 타격을 받았다. 찾는 이가 급격히 줄어든데다,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는데 실패해 시장에서 퇴출됐다. 한동안 명절이나 연회 때나 마시는 술로 명맥을 이어 왔다. 인주를 생산하는 양조장도 농촌 외곽에 3~4곳만 남았다. 하지만 바이주와 차별된 맛과 향 때문에 리장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86년 윈난성을 방문했던 엘리자베스 2세는 연회석상에서 인주를 3잔이나 들이키며 찬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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