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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연준 부양책의 새로운 명분 - 임금 오를 때까지 경기 계속 띄워

美 연준 부양책의 새로운 명분 - 임금 오를 때까지 경기 계속 띄워



지난 봄까지만 해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의 가장 큰 고민은 물가였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숙제인 물가안정과 반대로 물가상승률이 너무 낮은 게 문제였다. 낮은 물가상승률은 어쩌면 고민이었다기보다는 핑계였을 수도 있다. 물가가 낮다는 이유로, 물가를 정상 수준으로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연준은 고도의 통화부양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3월 연준은 제로금리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새로운 조건으로 ‘물가상승률 전망치가 2% 목표치를 밑도는 동안’이라는 조항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5월 들어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껑충 뛰어버렸다. 어느새 2.1%까지 올라버렸다. 연준의 기준지표가 되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상승률 역시 1.8%로 상승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일단 “최근의 물가 급등세는 잡음이 낀 것”이라고 무마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제로금리를 계속할 명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연준은 새로운 걸 들고 나왔다. 바로 임금이다.



“물가 급등은 잡음 탓” 얼버무렸지만…7월 15일 옐런 의장이 미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했다. 상반기 통화정책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옐런 의장은 “노동력 이용에 관한 광범위한 지표들은 최근 1년 동안 가시적인 개선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옐런 의장의 노동시장 평가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동안에는 “실업률이 빠르게 하락했지만 광범위한 지표들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부인할 수 없는 성과가 있었다. 지난 6월까지 미국 경제는 다섯 달 연속으로 매달 20만명 이상씩 일자리를 창출했다.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 사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옐런 의장은 “회복이 완성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동시장에는 여전히 상당한 유휴자원이 존재한다고 했다. 근거가 있었다. “계속해서 더디게만 증가하고 있는 시간당 임금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전히 “고도의 부양적인 통화정책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제 ‘임금의 상승’은 연준의 새로운 목표가 됐다. 그동안 연준은 고용회복 정책의 지향점을 ‘유휴 노동력의 소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유휴 노동력이란 개념은 애매하고 추상적이었다. 이를 측정할 구체적인 지표도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명분이 임금이다.

유휴 노동력이 대폭 줄어들고 소멸되는 시기가 오면 임금이 빠르게 오를 것이라는 이론적 가설에 따른 것이다. 대신 임금이 잘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연준의 고도 부양정책은 계속된다. 그래서 앞으로 미국의 금리가 언제 인상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데에는 ‘임금’이 가장 중요한 지표로 쓰이게 됐다.

미국과 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운영 방식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는 6월 중순 돌연 ‘조기 금리인상’ 가능성을 경고했다가 2주도 채 안돼 다시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카니 총재가 당시 톤 다운의 근거로 삼은 것도 ‘임금’이었다. 그는 “금리 정상화에 돌입하기 이전에 흡수해야 할 추가적인 유휴 노동력이 존재함을 확인하게 됐다”며 “최근의 억제된 임금 동향은 우리가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유휴자원이 많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영국의 경제지표들은 카니 총재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5월 중 영국의 임금(보너스 포함)은 1년 전에 비해 0.3% 늘어난 데 그쳤다.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이었다. 보너스 지급이 늦춰진 영향도 작용했다. 보너스를 제외한 기본급 증가율은 0.7%로 그나마 높았다. 하지만 이는 통계작성이 시작된 2001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 속도였다. 미국의 임금지표도 마찬가지다. 6월 중 미국의 시간당 임금은 1년 전보다 2.0% 상승했을 뿐이다. 금융위기 이후의 미적지근한 임금 성장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임금상승 속도로는 미국 가계의 생활수준이 개선되기 어렵다. 소비를 동력으로 한 경제성장 역시 불가능하다. 미국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6월 중 미국의 시간당 ‘실질’ 임금은 10.29달러로 전달과 같았다. ‘실질’ 임금은 물가상승 효과를 제거한 진정한 의미의 소득을 보여준다.

1년 전에 비해서는 오히려 0.1% 줄었다. ‘명목’ 임금보다 물가가 더 많이 오른 탓이다. 6월 미국의 실질 임금은 6년 전과 다를 바 없고 4년 전보다는 오히려 낮은 수준이다. 금융위기 이후 실질 구매력이 제자리걸음을 했기 때문에 빚을 내지 않는 한 지출을 늘릴 수 없다.

따라서 지금처럼 임금이 정체된 상황에서는 물가 상승이 반갑지 않다. 그러나 연준의 생각은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지금보다 낮은 수준으로 다시 둔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낮은 물가상승률이 장기화하면 경제 주체들 사이에 디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형성된다. 자칫하다가는 일본처럼 될지도 모른다. 물가가 낮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기가 부진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준은 물가도 올리고 임금도 높이려고 한다. 명목 임금이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상승하게 되면 물가가 좀 올라도 실질 임금이 충분히 늘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경기를 계속 부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양 전략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임금이 물가보다 더 빠르게 상승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탄력을 받은 물가가 앞으로도 더 많이 오르게 되면 실질 임금은 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소비가 위축된다. 경기 과열의 결과인 인플레이션은 그래서 결국 경기 침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옐런 의장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임금추세가 노동시장의 유휴자원 수준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노동시장에서는 인구구조가 가시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게 강력한 고용회복 속에서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 수수께끼의 근원일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휴 노동자원은 임금이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소진돼 가는 중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도의 부양정책이 계속 제공되면 경기가 과열돼 회복세가 조기에 끝나버릴 수 있다.



임금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오르면 낭패저임금 현상을 야기하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세 갈래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고임금의 중년층이 줄어드는 가운데, 임금이 낮은 청년·노년층의 상대적 비중은 커지는 중이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45~54세의 중년층이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월 중 22.3%로 집계됐다. 2009~2010년에만 해도 24%를 넘었으나 그 뒤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의 두터운 인구띠가 고령층으로 넘어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지난 1분기 중 45~54세 연령층 정규직 취업자의 소득은 일주일에 898달러였다. 이와 달리 65세 이상 연령층의 소득은 809달러, 25~34세 청년층의 소득은 727달러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고령 노동자들의 취업자 비중은 커지고 있다. 2009~2010년에만 해도 20% 수준이던 미국 55세 이상 연령층의 비중은 지금 22.1%나 된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청년층의 취업자 비중은 21.8%로 꾸준한 편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노동부 추계에 따르면 25~34세 청년층이 전체 노동가능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는 2022년에 22.5%로 높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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