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SONGWON GROUP chairman kim, hae-ryun | ‘베풀고 나누며 살라’는 가르침 이어간다

SONGWON GROUP chairman kim, hae-ryun | ‘베풀고 나누며 살라’는 가르침 이어간다

1975년 송원그룹을 설립한 고(故) 김영환 회장이 지난 3월 세상을 떠났다. 김 회장의 외동딸 김해련 송원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LED 투광등을 든 김해련 회장. 송원그룹은 산업용 소재와 전구를 생산한다.



고(故) 김영환 송원그룹 회장은 1934년 경남 김해 내덕리에서 9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실하고 어질어 집안에서 장남 역할을 했다. 어렵게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남영전구, 경남모직, 한일합섬 등에서 일하다 1975년 한국전열화학공업(현 태경산업)을 인수하면서 석회소재 사업에 뛰어들어 매출 5000억원대 송원그룹의 기틀을 다졌다.

김 회장은 태경산업 외에 백광소재·태경화학·남영전구·경인화학산업 등을 계열사로 두고 비금속광물·산업용가스·생활문화사업으로 사업 군을 확대했다. 1983년에는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설립해 602명에게 72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외환위기 때도 장학생 수와 장학금 액수를 줄이지 않고 꾸준히 규모를 키워 현재 재단의 총기금이 230억원에 달한다.

김 회장의 뒤를 이은 딸 김해련(52) 송원그룹 회장은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아버지의 경영 철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아버지 전상서-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도 펴냈다. 지난 7월 7일 서울 강서구 등촌로 송원빌딩에서 김 회장을 만나 부친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물림된 고 김 회장의 경영철학을 부녀 간의 가상대화로 엮어본다. <편집자 주>




아버지(김영환) 이 방에 오랜만에 와본다. 책상, 책장만 빼고 그대로네?



딸(김해련)
금고, 소파 모두 아버지가 30년 넘게 쓰시던 그 물건이에요. 뭔가 새로 사자고 하면 멀쩡한 걸 왜 바꾸느냐고 하셨잖아요. 저도 25여 년 전부터 쓰던 책상과 책장을 버리지 않고 가져왔어요.



아버지
내가 그랬나? 하긴 10년 넘게 점퍼 두 벌을 사무복으로 번갈아 입곤 했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월급쟁이 때 살던 그 집에 그대로 사시고, 늘 직원식당에서 백반을 드시면서도 남에게 베풀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
그래, 사람은 항상 더불어 사는 기다.



40년 전에 회사를 세우실 때도 더불어 함께 살고(공존),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며(공영), 참된 사회봉사를 실천하는(공익) 회사를 만들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
1995년 휴게소 사업에 진출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송원그룹은 문막·서산·충주휴게소를 운영한다). 문막휴게소 임대사업에 참여하겠다고 결재를 해달라는데 내가 화를 버럭 냈지. 제조업만 하던 내 눈에는 휴게소 사업이 ‘장사’처럼 보였거든. 부회장이 ‘장사가 아니라 외딴곳에서 다수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공익사업’이라고 몇 번이나 설명하고 나서야 입찰 허락을 받았지. 사업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국가에 헌납하고 아버지 소유의 태경산업 주식 9.92%를 재단에 기부하셨잖아요.



“ 사람은 더불어 사는 기다”

아버지
또 투명경영을 해야 한다. 말단 대리가 보는 회계 자료와 네가 보는 자료가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언젠가 세무조사를 나온 세무 공무원이 조사를 마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 ‘이런 회사는 처음 봤다’며 납세 모범사례로 추천해 2004년 국세청장 표창, 2005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투명하게 벌지 않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게 할 짓이냐.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올바르게 자라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 장학재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잘 알제? 대학에 입학해서도 낮에 공장을 다니며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시험기간에는 친구들에게 노트를 빌려 겨우겨우 시험을 쳤지. 돈이 없어 며칠 동안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공장이 너무 추워 동료들과 꼭 끌어안고 지냈다. 그때 ‘다른 걱정 없이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회사를 세운 지 3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그때 사내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지.



그 제도는 지금도 잘 운영하고 있어요. 직원들 자녀에게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고 있으니까요.



아버지
난 그 등록금을 부모가 아닌 자녀들에게 꼭 직접 전달했다. 그래야 허투루 쓰지 않지. 또 직원들이 퇴직한 뒤에도 본인이 원하면 계약직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몇몇 부자(父子)들이 함께 회사에 다니는 거 알제. 사택 200채를 마련해 지방에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무료로 임대하기도 했고. 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외환위기 때도 직원을 해고하거나 복지를 줄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한 건 1983년이지요?



아버지
내 재산 1억원을 털어 만들었지. 당시 회사 자본금이 5000만원이었으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 돈이 밑거름이 돼 한 해 80여 명 학생이 한 명당 1000만원의 장학금을 받고 있어요. 학생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셨어요?



아버지
성적보다는 경제적 여건을 우선으로 봤다. 내가 직접 지원서를 다 읽고 면접에도 들어갔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방 두 칸짜리 남영전구 사택에서 살았잖아요. 삼촌 두 명, 어머니 조카와 일 도와주는 언니까지 7명이 살았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월급쟁이일 때도 지방에서 친척들이 올라오면 우리 집에 머물렀어요. 그거 아세요? 어머니가 저한테 달걀 프라이 하나 해주려고 삼촌들 눈치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아버지
어린 마음에 그런 것이 싫지는 않았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아버지는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룰 수 있는 만큼 이루고 그걸 자기 방식대로 나누며 사셨어요. 그게 당연한 건데 그걸 대단하다고 하는 요즘 세태가 오히려 씁쓸해요.



아버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마지막이라고 특별히 남길 말은 없지만 니한테 세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첫째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다.



벤처 붐이 불던 1999년에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렸어요. 그때도 아버지는 1원 한 푼 도와주시지 않았죠. 쉽게 생각했는데 12년 만에 투자 받은 금액의 몇 배를 물어주고 회사를 떠나야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강조하시던 ‘공짜는 없다’는 말을 뼛속 깊이 새겼어요.



아버지
그랬나. 두 번째로 명심할 게 아까 얘기한 투명경영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손해가 나더라도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는 거다. 내가 지인 부탁으로 새로 설립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 준 것 기억하제? 이동통신업종인 그 회사가 뜨면서 외국계 회사들이 비싼 값에 주식을 팔라고 몰려왔다. 하지만 지인에게 다시 되팔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훨씬 싼값에 주식을 원 주인에게 처분했다.

지난해 장학재단 설립 30주년 행사에서 고 김영환 회장이 학생과 얘기하고 있다.





“ 돈은 불이다. 욕심 내면 덴다”

많은 돈을 포기하고 약속을 지킨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정이었는지 나중에 알았어요.



아버지
해련아. 돈은 불이다. 아주 적은 액수라도 합리적이지 않은 돈은 단 한 푼도 받아서는 안돼. 돈은 위험한 거란다. 잡으려고 하면 손을 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침대를 바꾸려고 하면 ‘거기서 자면 잠이 더 잘 오나’라고 하시고, 출장 말고는 해외여행도 가신 적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답답하기도 해요.



아버지
허허. 그러지 않아도 친구들이 해외에 골프를 치러 가자고 하면 ‘국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달러 내 가며 외국에 나갈 게 뭐냐, 회사 임원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냐’며 면박을 줬지. 비싼 호텔에서 국산 소주를 찾아 직원들이 난감해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동창회 사무실을 마련해 2010년에 해산하기로 한 서울대 상대 동기 동창회를 5년 동안 더 할 수 있게 했다. 세상에 돈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돈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다 내한테 오라고 해라.



아버지는 30년 넘게 매일 오전 8시에 각 지역 공장과 영업소에 전화하셨잖아요. 해외에 계실 때도, 암 투병으로 입원하셨을 때도 수화기를 드셨지요?



아버지
그래야 책임자가 전날 과음하지 않고 일찍 출근해서 공장을 점검하지. 이제 니가 1000명이 넘는 직원을 책임지는 회장이 됐으니 치밀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아버지 친구가 발가락에 암 세포가 생겼다. 의사가 발목까지 자르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설마 하며 발가락만 잘랐다. 결국 암 세포가 온몸에 퍼져서 생명을 잃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기업도 다르지 않다. 그 정도는 아닐거라는 믿음에, 조금만 버티면 될 거라는 미련에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치면 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저도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6월 취임식에서 ‘비전 2020-도약 1.3.5.7’을 선포했어요. 2020년까지 그룹 매출 1조원, 신사업 매출 3000억원, 5개 상장 회사, 세계 시장 선도 제품 7개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아버지 대에서 세계로 나가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동안 국내를 중심으로 영업했지만 기술력은 세계 시장에서 뒤지지 않을 거라 자신합니다.



아버지
구체적으로 어떤 해외 사업을 진행하나.



남영전구가 일본 완성차 업체에 할로겐 전조등을 납품하기로 했어요. 현재 49개국에 자동차 전구를 수출하고 있지만 이제까지는 애프터 서비스 시장에 한정됐었죠. 완성차 업체에 전구를 공급하는 회사는 필립스, 오스람, 제너럴 일렉트릭(GE)뿐이었는데 남영전구가 뛰어든 거죠. 르노삼성에 이미 제품을 공급하고 있고요. BMW, 벤츠 등에 납품하는 독일 자동차 부품업체 헬라의 기술 시험에도 합격했어요.



아버지
자동차 전조등은 관련 부품이 많고 공정과정이 복잡해서 노하우가 필요한 사업이다.



예.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려면 불량률이 제로여야 하고 1000~1500시간 동안 꺼지면 안 되는 등 조건이 까다로워요. 아버지 대부터 시행착오를 겪으며 닦아온 기술력이 이제 세계 시장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기술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버지
그래, 장하다.



아버지가 닦아오신 길인걸요. 또 태경산업은 베트남 최대 펄프 회사와 중질탄산칼슘 생산 공장을 건설, 운영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40년 기술력으로 해외 진출 본격화

아버지
석회석에서 추출한 슬러리(액체와 고체의 혼합물) 타입의 중질탄산칼슘은 1990년대 태경산업이 개발한 제품이다. 펄프를 코팅해 종이 표면을 매끈하게 해주지. 중질탄산칼슘이 없으면 고급 종이를 만들 수 없다. 석회소재 분야는 송원의 대표 사업이다. 어떤 기업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한다. 1976년에 국내 최초로 제강정련제를 개발해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납품했으니까.



중국에 중질탄산칼슘 공장을 수출한 적은 있지만 외국에 공장을 지어서 태경산업이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 될 거예요. 이 분야 강자인 스위스 업체 오미아는 중질탄산칼슘으로 수조원 매출을 내요. 태경산업 매출은 오미아에 아직 한참 못 미치는 300억원 정도지만 이제 해외로 첫발을 뗀 만큼 성장성을 믿고 있어요.



아버지
회사도,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부회장으로 송원에 합류한 것이 3년 전인데 회장이 되니 어떠냐?



사실 부담감이 커요. 부회장일 때는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이제는 제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하잖아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매출 1조원을 제가 이루겠습니다. 장학사업도 앞으로 100년, 1000년을 더 이어가고 싶어요. 그러려면 회사 이익을 더 많이 내야겠지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아까워요.



아버지
이제 사업가가 다 됐구나. 하긴 니가 처음 패션회사 ‘아드리안느’를 차린 것이 1989년이었나?



예,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직원들과 말을 많이 하면서 소통하려 한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창업자라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알아서 의중을 파악했지만요. 방식은 다르지만 저도 아버지처럼 경영의 원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어느 회사든 원칙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원칙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해야지, 원칙을 벗어난 곳에서 최선이란 없어요.



아버지
옳은 얘기다. 1984년 가스회사인 경인화학산업을 인수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지. 기화한 가스를 가스 실린더에 담아 팔았는데 당시 관행적으로 4㎏이 들어가는 통에 2㎏을 넣기도 하고 3㎏을 넣기도 했나 보더라. 내가 알고선 몹시 화를 냈다. 책임을 묻겠다고 한 뒤에야 좋은 관행이 사라졌지.



그런데 아버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성악가가 되겠다고 음악 공부한 것 기억하세요?



아버지
암, 알고말고. 내가 딸 하나 있는데 무슨 성악이냐고 경영 공부하라고 했었지.



맞아요. 그래서 경영학 석사(MBA)를 따러 남편(안광호 인하대 경영학부 교수)과 미국에 유학을 떠났잖아요.



아버지
그래, 네가 한국에 들어와서 서른도 되기 전에 사업한다고 했을 때 대견했지. 사업은 해봐야 아는 거니까. 그래서, 사업을 해보니 적성에 맞더냐?



안 맞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긍정적이고 추진력 있고 사교성이 있잖아요(웃음).



아버지
니가 성격 좋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



사람을 만날 때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을 좋은 감정으로 대하게 되고 상대방도 진심으로 저를 대하더라고요.



아버지
잘하고 있다. 나를 닮아서 그런가?



성격이 좀 급한 것도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요. 제가 걸을 때 늘 다리보다 머리가 앞으로 먼저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 니가 있어 열 아들 부럽지 않았다”

아버지. 솔직히 제가 딸이어서 서운한 적 없었어요?



아버지
네 어머니가 목숨과 맞바꾼다는 각오로 팔삭둥이인 니를 낳았다. 무리한 탓에 다시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됐지. 그런 니가 딸이어서 서운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니 앞에선 표현 안 했지만 늘 친구들에게 말했다. 해련이가 잘할 거라고 말이다. 정말 니가 있어 열 아들 부럽지 않았다.



저도 아버지처럼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평생 솔선수범하고 밥상머리 교육을 하신 아버지지만 돌아보면 한 번도 ‘하지마’라고 얘기하신 적이 없어요. 아버지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항상 고마웠어요.



아버지
나도 고맙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을 『아버지 전상서-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라고 했냐?



최선을 다해 살고 그렇게 이룬 것을 좋은 일에 쓰는, 그런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아버지가 스스로 참 행복해하는 것 같았거든요.



아버지
장학금 줄 때, 장학금 받아서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인사 왔을 때 그런 순간순간이 참 행복했다. 그리고 너와 눈을 맞추며 담소를 나눌 때 나는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는 늘 공장의 기계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죠. 그래서 아버지를 단양의 백광소재 공장 옆에 모셨어요. 제가 열심히 하면 나중에 꼭 칭찬해주실 거죠?



아버지
그래. 우리 딸내미 해련이 최고다. 딸이면 어때. 나는 우리 해련이가 잘해낼 거라 믿는다.



송원그룹은… 카바이드(탄화칼슘) 제조업체인 한국전열화학공업(현 태경산업)이 모태다. 태경산업·백광소재·태경화학·남영전구·경인화학산업·남우화학·동신에너텍 등 8개 계열사가 있다.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태경산업은 합금철·제강정련제·초미립 중질탄산칼슘·카바이드 등 산업용 기초소재 제품을 생산·판매한다. 전량 수입하던 초미립 중질탄산칼슘을 199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산화를 이뤘다. 이 제품은 제지·도료업체에 공급된다.

백광소재는 석회석을 가공해 생석회·소석회·수산화칼슘, 경질탄산칼슘 등 각종 석회 제품을 생산한다. 태경화학은 산업용 가스를 생산하는 탄산가스업체로 액체탄산가스·드라이아이스 등을 제조한다. 자동차용 전구와 LED 램프 등을 생산하는 남영전구는 50년 역사를 지닌 전구 전문회사로 1983년 송원그룹이 인수했다. 문막·서산·충주 등 고속도로휴게소와 주유소, LGP충전소를 운영하는 휴게소 사업도 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 日기시다 "북일 간 성과를 내는 관계 실현은 쌍방 이익에 합치"

2삼성 반도체 매출 세계 1→3위로 추락…인텔·엔비디아 선두로

3“먹는거 아닙니다, 귀에 양보하세요”…품절대란 ‘초코송이’ 이어폰 뭐길래

4마침내 ‘8만전자’ 회복…코스피, 2800선 돌파 기대감 ‘솔솔’

5최태원 SK 회장 둘째딸 최민정, 美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차렸다

6 이재명 인천 유세현장서 흉기 2개 품고 있던 20대 검거

7영천 최무선과학관, 새단장하고 오는 30일부터 운영 재개

8조각 투자 플랫폼 피스, ‘소비자 추천 글로벌 지속가능 브랜드 50′ 선정

9어서와 울진의 봄! "산과 바다 온천을 한번에 즐긴다"

실시간 뉴스

1 日기시다 "북일 간 성과를 내는 관계 실현은 쌍방 이익에 합치"

2삼성 반도체 매출 세계 1→3위로 추락…인텔·엔비디아 선두로

3“먹는거 아닙니다, 귀에 양보하세요”…품절대란 ‘초코송이’ 이어폰 뭐길래

4마침내 ‘8만전자’ 회복…코스피, 2800선 돌파 기대감 ‘솔솔’

5최태원 SK 회장 둘째딸 최민정, 美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