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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월 지급식 펀드의 진실과 오해

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월 지급식 펀드의 진실과 오해



춘추전국 시대 송나라의 저공은 원숭이를 여러 마리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먹이가 부족해지자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앞으로 아침에 주는 도토리를 3개, 저녁에 4개로 제한하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아침에 도토리 3개로는 배가 고파 못견딘다고 했다. 그래서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저공은 원숭이의 불만을 잠재우며 먹이를 아낄 수 있었다.

중국의 고전 <열자> 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됐다. 눈앞의 이익만 보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나, 남을 농락해 사기나 협작술에 빠뜨리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행동경제학에서도 조사모사의 우를 범하게 되는 심리를 다루고 있다. 이를 테면 사람들은 1년 후 120만원을 받는 것보다 매달 9만원씩 나눠 1년 동안 받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이자를 쳐준다고 해도 어지간해선 지금의 분배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를 ‘현상 유지 편견’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상황을 변화시켜 혹시 생길지 모르는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래보다는 현재, 눈앞의 현금을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깊다는 해석이다. 이런 본성을 잘 이용한 금융상품이 월 지급식 펀드다. 목돈을 맡겨놓고 매달 일정 금액을 받는 ‘역(逆)적립식’으로 당장 급한 돈의 유동성을 살린다는 이점이 있다. 다만 후일의 재산 증식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삼모사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퇴직해 용돈이 궁한 은퇴자에겐 더 없는 착한 상품이다.

매달 꼬박꼬박 이자가 통장에 들어오니 월급을 타는 느낌도 준다. 그래서 월 지급식 펀드엔 ‘용돈펀드’ ‘월급펀드’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아직 대세는 고령자지만 2030세대도 구매대열에 가담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래 저래 월 지급식 펀드는 나이불문 인기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삼모사 성격 강해월 지급식 펀드의 등장은 저성장·저금리 환경과 맞물려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엔 재테크 겨울이 닥쳤다. 은행 금리는 연 2%대로 떨어져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나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인 경제의 불확실성과 저성장은 주식이나 펀드 투자의 위험을 크게 높였다. 여기에 부동산 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부동산 불패신화가 깨지면서 수요자는 꼬리를 감추고 매물은 넘쳐났다. 이런 가운데 베이비 부머들의 본격적인 퇴직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증시와 부동산의 호시절을 누렸던 이들에게 달라진 금융환경은 무력감을 안겼다. 소득흐름을 이어갈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다가올 기나긴 은퇴생활은 노후자금의 압박감을 가중시켰다.

금융회사들도 다급해졌다. 더 이상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저절로 팔리는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를 쥐어짜 뒤돌아선 투자자를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 개발이 시급했다. 일본에서 폭발적 성장세를 거듭하는 월 분배형 펀드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월 분배형 펀드는 시중금리 이상의 분배금을 지급해 생활자금으로 쓰이도록 한다는 개념으로 고령층 사이에서 부동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2010년엔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공모펀드 가운데 60%가 월 분배형 펀드였을 정도다. 금융회사들이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다.

인구구조학적으로나 금융시장의 돌아가는 모양새로 보나 일본과 비슷한 우리나라도 그런 펀드를 도입하면 먹힐 것으로 봤다. 월 지급식 펀드는 태어나자 마자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2009년 3개에 불과하던 설정액 10억원 이상의 월 지급식 펀드는 5년 만에 57개로 불어났다. 순자산도 1조4000억원에 이른다. 특히 퇴직한 베이비 부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2011년 이후에만 신규 펀드가 47개에 달했다. 월 지급식 펀드는 상품자체가 은퇴세대의 눈높이와 일치한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60대 이상의 고령인구는 연금 이외에 들어올 수입원이 마땅히 없는데다 생활비는 매달 필요하다. 때문에 장기 투자로 목돈을 만지기보다는 당장의 생활유지가 우선이다. 어차피 있는 예금을 쪼개 써야 할 판이다. 그런데 기대수익은 은행 예금보다 훨씬 짭짤하다. 변동성도 적다. 일반 펀드가 투자원금에 시세차익을 합해 재투자해 그만큼 등락폭이 크다면 월 지급식은 매달 시세차익을 지급하기에 기준가격 변동 자체가 적다.

그러나 허실·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화장발에 감춰진 민낯을 보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원금손실 가능성이다. 만약 펀드 운용을 잘못해 수익이 나지 않으면 원금의 일부를 빼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원금이 깨지면 원상회복이 그리 간단치 않다. 펀드에 10억원을 투자해 첫 달 1%, 둘째 달에는 3%, 셋째 달에는 -2%의 성과를 낸 경우를 가정해보자.

월 지급을 하지 않는 일반 펀드라면 순자산은 첫 달 말 10억1000만원, 둘째 달 말 10억4030만원, 셋째 달 말 10억1949만원이 된다. 그런데 투자액의 1%를 월 지급하는 펀드라면 첫 달 말 10억원, 둘째 달 말 10억2000만원, 셋째 달 말 9억9960만원이 된다. 월 지급 펀드는 수익에 수익이 쌓이는 복리효과가 거의 없는 것이다.

월 지급식 펀드는 대개 국내 또는 글로벌 채권을 편입해 운용한다. 주식은 워낙 변동성이 심해 기피대상이고 비교적 안정적인 채권을 선택한다. 은행금리+α의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중위험·중수익 전략이다. 그런데 금리가 요동을 쳤던 지난해 호된 시련을 겪었다.

미국의 출구전략 축소에 따른 금리인상 우려로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서 대부분의 펀드 수익이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원금에서 지급금이 나갔음은 물론이다. 장사를 제대로 못했는데도 매달 ‘월급’은 차질 없이 주어야 하니 골병이 들 수밖에 없다. 이에 실망한 가입자들이 무더기로 해약하면서 지난해 하반기에만 1조8000억원이 빠져나갔다.



연 7~8% 수익 내줘야 원금 지켜운용 보수가 비싼 것도 문제다. 수익이나 나면 모를까 벌어주지도 못하는 운용사에 보수를 지불하는 억울함을 당할 수 있다. 월 지급식 펀드는 대개 투자금의 0.5% 안팎의 수익을 매달 지급하는 것으로 계약한다. 펀드수수료는 연간 1.5%를 뗀다. 이 경우 펀드는 연 7~8% 수익은 내줘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 수익은 아주 뛰어난 운용실력이 아니면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연 7% 이상의 수익을 거둬 이름값을 하는 월 지급식 펀드는 ‘프랭클린월지급미국인컴자(주식혼합)A’를 포함해 극소수에 불과하다.

세금도 별로 유리한 게 없다. 과세시점 분산으로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해갈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 과세시점이 ‘독’이 되기도 한다. 수익이 나는 경우 지급금에 대해 15.6%의 배당소득세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금이 손실이 났다고 세금을 돌려받을 수도 없다.

월 지급식 펀드는 노후의 현금흐름 문제를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퇴직 후 살아갈 날이 30~40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과연 이 같은 소극적 자산 운용으로 안정적 은퇴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자산증식을 원한다면 월 지급식은 탈락인데도 용돈·월급이란 말에 이끌려 가입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금리·고령화 시대엔 노후에도 좀 더 위험수용적인 자세로 자산을 불려가는 기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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