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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ISM - 종군기자의 삶과 죽음

JOURNALISM - 종군기자의 삶과 죽음




대다수 실종자 가족처럼 종군 사진기자 제임스 폴리의 가족도 2012년 추수감사절 직전 시리아에서 실종된 아들이 언젠가는 현관문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리라 믿었다.

폴리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착했다. 그런 미덕 때문에 폴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기를 거부했다.

폴리의 친구 니콜 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퉁은 그가 납치되기 직전 함께 있었고 그를 찾으려고 시리아 북부 지방을 혼자 여러 차례 다시 방문했다. 그녀는 시리아 북서부 도시 알레포에서 일하는 동안 누군가를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폴리가 어느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지, 안전한지, 살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8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폴리를 “동료 인간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전한 사람”이었다며 그의 정신을 기렸다.

그런 상황에선 우리 언론인들, 특히 유대감이 강한 종군기자들은 더욱 한데 뭉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실종된 기자를 찾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부사항을 보도 하지 않고,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폴리의 최후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을 보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 참혹한 동영상이 공개된 다음 날 우리 기자들은 너무도 암울했다. 폴리는 동료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던 사진기자였다(그는 2011년에도 리비아에서 납치된 적이 있다). 그의 죽음은 이전의 다른 기자들 죽음처럼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2년 2월 시리아 홈스에서 포탄에 맞아 사망한 미국인 기자 메리 콜빈, 2000년 시에라리온에서 반군에게 살해당한 전설적인 로이터 종군기자 커트 쇼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인물의 죽음은 우리 기자들이 하는 일과 우리 기자들이 믿는 바의 핵심을 뒤흔든다.

폴의 참수 동영상이 공개되자 시리아에서 일하고 취재하는 우리 기자들을 위한 비공개 페이스북 페이지 'S-Logistics'에 곧바로 감동적인 헌사들이 올랐다. 살해당한 동료와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검게 지웠다. 그러나 우리 다수가 가진 진정한 의문은 이것이었다. IS 같은 야만인들이 우리를 납치하고, 참수하고, 억류하고, 강간하는 데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폴리가 그처럼 야만적인 방식으로 살해됐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그 야만인들이 아직도 미국 마이애미 출신의 재미있고 용감한 젊은 기자 스티브 소틀로프를 억류하고 있다.


2012년 시리아 어디선가 소틀로프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는 어느 시리아군 지휘관의 집에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 앉아 있었다(그 지휘관은 그후 곧 살해됐다).

우리는 손전등을 사용해 배터리가 소진돼가는 PC로 작업을 해보려고 애썼다. 비참한 상황이었다. 음식도 없었다. 너무 추웠고, 포탄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때렸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틀로프는 프로 미식축구의 점수를 알아내는 내기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극한의 상황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은 ‘역사의 초안’으로 불린다. 하지만 임무 수행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초안이 기록될 수 있을까?2011년 리비아에서 폴리와 함께 납치됐던 클레어 모거나 질리스는 억류돼 있는 동안 롤링스톤스 멤버 키스 리처즈의 회고록 ‘라이프(Life)’를 읽었다고 이야기했다.

소틀로프는 젊고 재미있고 권위를 싫어한다. 그는 리비아의 도시 벵가지에서 살았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현지에서 살아야 한다고 느낀 몇 안 되는 프리랜서 기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인 동시에 똑똑하고 열성적이다.

그가 실종된 지 며칠 후 나는 페이스북에서 그의 메시지를 받았다. 나중에 그의 컴퓨터를 발견한 친구가 보낸 것으로 확인됐지만 당시엔 섬뜩했다. 폴리가 납치됐다는 사실은 공개됐지만(그의 가족이 그를 찾는 데 도움일 될지 모른다고 판단하고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소틀로프에 관한 소식은 공개되지 않았다. 우리 중 몇몇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그냥 지구에서 사라진 듯했다.


이제 소틀로프의 운명은 IS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다음 행동"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를 참수하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전쟁과 분쟁을 취재한 지 20년이 넘었다. 초기에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하면서 내가 느낀 가장 큰 두려움은 저격과 박격포였다. 그때는 어디를 가려면 거리 모퉁이에 모여 있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언덕 위에서 우리를 노리는 저격수들이 우리의 다리나 심장을 겨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박격포탄이 날아오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도 했다.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이미 피하기에 늦었다는 뜻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쟁 지역에 들어가는 우리에게 아무도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의 첫 ‘교사’는 신참을 데리고 다니기 싫어하는 거칠고 무례한 종군 사진기자였다. 중부 보스니아에서 장갑 보호가 없는 차에 올라타고 포위된 수도 사라예보로 총알처럼 차를 몰고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그는 나에게 공격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박격포탄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검문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데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내 생애 최악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마침내 ‘저격수 골목’을 통과하고 나자 그는 폭격 당한 홀리데이 인 호텔의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밴 로비에 나를 홀로 떨어뜨려 놓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그곳에 나를 버려두고는 사라예보의 다른 쪽 지역에 있는 보스니아 친구들과 함께 지내려고 가버렸다.

나는 전선에서 어떻게 돌아다녀야 하는지 재빨리 체득해야 했다. 적 부대와 너무도 가까워 그들의 깃발이 보이는 곳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얼굴을 씻거나 하루를 지낼 물 한 병을 담배와 맞바꾸는 법도 터득했다. 나는 저널리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도 배웠다. 지휘관들을 설득해 그들의 트럭이나 순찰차를 얻어 타는 법, 며칠 동안이나 참호 속에서 생존하는 법 등. 2000년 희생된 또 다른 동료 미구엘 데 모레노 데 모라가 말한 폭격 속에서 미치지 않도록 정신을 가누는 법”도 알게 됐다.

그후 체첸에 갔을 때는 위험 수준이 한층 더 높아졌다. 박격포와 공습도 있었지만 거기선 납치가 더 큰 위험이었다. 그 몇 달 전 체첸 반군이 사업가 일행을 참수해 머리를 창에 꽂아 도시 입구에 세워뒀다는 보도를 접했다. 내가 납치된다면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더플백을 꾸렸다.

2000년 1월 체천 수도 그로즈니로 떠나기 전 당시 내가 일하던 영국 신문사 더 타임스의 편집국장이 나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영국 정부는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네.” 그가 매정한 게 아니라 솔직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곳으로 홀로 떠나려는 사람에게 결코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납치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로즈니의 함락을 목격했고 내가 원하기보다 더 오래 그곳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마침내 그곳을 빠져 나왔을 때 우리 신문사는 나를 ‘적대적 환경 적응 과정(Hostile Environment Course)’에 등록시켰다. 그때 처음 생긴 프로그램으로 지금은 모든 종군기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거기서 나는 전투 중의 응급구호, 지뢰 종류 식별법, 납치됐을 때의 행동 요령, 부비트랩 제거법을 배웠다.

별을 보고 방향을 파악하는 법과 동료가 심장 부근에 총을 맞았을 때 필요한 지혈법도 배웠다. 하지만 그런 교육은 사실 내게 별 필요가 없었다.

그때쯤은 이미 내가 교관이 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술에 취한 세르비아계 민명대원들에게 잡혔고, 검문소에서 강도를 당했으며, 17명이 사망한 공습에서 살아남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여러 차례 매복을 당했고, 아프리카에서 쿠데타를 여러 번 겪었다. 함락된 도시들, 야간 공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애석하게도 그때쯤 우리는 동료들을 더 많이 잃기 시작했다. 그들 각각의 죽음은 폴리의 경우처럼 무의미하고 잔혹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기사를 읽거나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하는 일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게 됐다. 우리의 일이란 전쟁의 증인으로서 전쟁을 직접 보도하는 것을 말한다(to bear witness, to bring back first hand reporting of war).

그러나 그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시리아의 처절함에는 제대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국제단체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J)는 시리아를 “언론인에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라고 부른다. CPJ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기자 69명이 시리아 내전 취재 중 목숨을 잃었다. 그들 중 다수는 시리아인이다. 납치된 기자는 80명이 넘는다. 약 20명이 아직 실종 상태이며 IS가 그중 다수를 억류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기자들이 시리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자세히 밝힐 순 없다. 나를 포함해 시리아에서 계속 활동하는 기자들에게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는 행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곳으로가는 다른 방법은 터키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시리아 ‘반군’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지금 그 반군들은 사실상 IS의 손에 들어갔다. 이젠 그 테러리스트들이 안내자다.


지금 주요 TV 방송사와 신문사는 종군기자들에게 전담 경호원을 붙여준다. 하지만 그럴 사정이 되지 않는다면 순전히 자신의 기지와 통찰력 또는 연락책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순 없다. 사라예보 사무실을 함께 썼던 디디에 프랑수아가 1년 이상 억류됐다가 지난 4월 풀려났다. 디디에는 내가 아는 어느 기자보다 노련했다. 따라서 신참들만 납치된다는 견해는 옳지 않다.

저널리즘은 ‘역사의 초안(the first draft of history)’으로 불린다. 하지만 임무 수행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초안이 기록될 수 있을까? 폴리는 작업은 알레포처럼 끔찍한 상황에 처한 곳에서 민간인들이 당하는 고통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기자가 표적이 된 지금 기자들이 어떻게 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폴리의 가족은 그가 참수되는 잔혹한 동영상이 공개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들의 아들이자 형인 폴리가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무슨가치가 있을까?

사라예보 포위에 관한 커트 쇼크의 뛰어난 기사는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그의 시신은 사랑하던 사라예보 중심부에 보스니아를 지키다 숨진 젊은 전사들과 함께 안장됐다). 하지만 그 기사가 후세에게 큰 의미가 있을까? 그의 죽음, 그리고 워싱턴 DC에 있는 뉴지엄(Newseum, 저널리즘 박물관)에 이름이 새겨진 모든 순직 기자들의 죽음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런던에 가면 BBC의 종군기자 출신인 본 스미스가 설립한 ‘프런트라인 클럽’이 있다. 종군기자들이 모여 정보와 기사를 교류하는 장소다. 이런 일을 계속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일종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곳이다. 최근 그곳에서 언론인들이 모여 폴리와 소틀로프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그들의 용감함과 헌신을 기리며...

20년 전 본과 나는 사라예보에서 다큐멘터리를 함께 찍은 적이 있다. 그 당시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거리를 배회하는 탈영병들이 우리 방탄조끼(flak jacket)를 훔쳐가는 것이었다(실제로 우리 방탄조끼가 도난당했고 본은 나의 무모함을 탓했다).

이제 우리는 방탄조끼만 잃는 게 아니다. 내 동료들은 전쟁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살고 죽는다.




마지막 편지제임스 폴리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가슴 아픈 메시지가 공개됐다

제임스 폴리는 IS에게 억류된 상황에서 가족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보냈다. 간수 몰래 편지를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함께 억류된 동료에게 자신이 불러주는 메시지를 외우도록 했다. 폴리는 다른 인질과 달리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료인 덴마크인 사진기자 다니엘 리예 오토센에게 편지 내용을 불러주었다. 오토센은 그 메시지를 외웠고 지난 6월 그가 풀려났을 대 폴리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그대로 전했다.

“힘이 빠지는 날도 있고 힘이 펄펄 나는 날도 있어요(“I have had weak and strong days).” 폴리는 그 메시지에서 말했다. “누군가가 석방되면 너무 기뻐요(We are so grateful when anyone is freed). 하지만 물론 우리 자신의 자유도 갈망해요(but of course, yearn for our own freedom).”

“가족과 함께 지내던 그 수많은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상상으로나마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I remember so many great family times that take me away from this prison). 가족과 친구들이 꿈에서 나타나면 나는 자유를 느끼고 행복이 내 가슴에 가득하죠(Dreams of family and friends take me away and happiness fills my heart).”

폴리는 포로 17명과 함께 한 감방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발한 게임으로 소일했다. “영화, 수수께끼, 스포츠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 가르쳐줘요(endless long conversations about movies, trivia, sports, and teaching each other). 그런 게임과 서로 가르쳐주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죠(The games and teaching each other have helped the time pass). 그게 큰 도움이 되요(They have been a huge help).”

마지막 문단은 형제자매와 할머니에게 보내는 가슴 아픈 메시지다. 그는 형제자매가 자랑스럽다며 할머니에게 댄스 교습을 계속 받으라고 말했다. “할머니, 제발 약 잘 챙겨 드세요(Grammy, please take your medicine). 내가 집에 가면 함께 멕시코 식당에 가요(I plan to take you out to Margarita’s when I get home). 제 삶을 되돌려 받으려면 할머니 도움이 필요하니 건강하셔야 해요(Stay strong because I am going to need your help to reclaim my life).”

편지 전문은 페이스북의 ‘Free James Foley’ 페이지에 올라 있다. 수천 명이 ‘좋아요’를 클릭했고 그 메시지를 널리 공유했다. - MARIA VULTAG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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