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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ESSION - 스코틀랜드의 ‘그날 후’

SECESSION - 스코틀랜드의 ‘그날 후’

(위 왼쪽부터) 분리독립 주민투표가 끝난 다음 날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의사당 맞은편에 위치한 퀸스 갤러리. 에든버러의 한 상점에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을 상징하는 기념품들이 진열돼 있다.

9월 19일 가랑비 내리는 아침.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에서 분리독립안 부결이 확정됐다. 주도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의회 밖에 모인 주민들은 기뻐하기보다 그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독립찬성 여론이 성급하게 최고조에 달했다가 식어버렸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고령자와 부자들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급진파는 말했다. 반면 기득권층은 “주민들의 확고한 의지였다”고 말했다.

그날 아침 분리독립안이 부결됐지만 그 결과가 스코틀랜드나 영국 전체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아무튼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그게 바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민주주의가 아니었을까? 그동안 잠시나마 영국 정치는 칙칙한 회색을 벗어버리고 화색을 띠는 듯했다.

투표가 실시되기 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이라는 연합체의 기반이 흔들렸다. 지적, 정치적, 정서적 에너지가 분출됐다. 민주화를 촉구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사람들은 마침내 그 이상적인 모습을 봤다. 일부는 군중심리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기존 체제 이면에 다양한 삶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세계는 과거 생각했던 것처럼 정치에서 영구히 단절 된 게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재미, 두려움, 격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투표소에서 간단한 한 표 행사로 끝났다. 스코SECESSION틀랜드 분리독립 논쟁은 2년 정도 내면에서 끓어 오르다가 주민투표를 앞두고 마지막 2주 동안 현란하게 터져 나왔다.



영국 연합 운명의 날

투표일 아침 스코틀랜드 중부 퍼스. 습도가 높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이라는 사실만 아니라면 여느 9월의 그곳 날씨와 다름없었다. 런던 타임스 신문 1면의 제목은 ‘영국 연합 운명의 날(D-day for the Union)’였다.

퍼스 외곽의 오크뱅크 주민자치센터에 설치된 투표소 밖에는 이른 아침의 축축한 풀밭에 표지판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더 나은 스코틀랜드를 위해 찬성표를!” 분리독립 찬성을 호소하는 청색의 메시지였다. 옆에 있는 표지판에는 “사양합니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독립할 경우 닥칠 수 있는 위험 여섯 가지가 열거돼 있었다. 논쟁은 이런 식으로 양자 간 선택이었다. 이미 진행된 여론의 양극화를 한층 더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현실은 늘 더 미묘하다. 절충을 원하는 한 친구는 투표 전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역의 찬반론이 반반으로 나눠질 뿐 아니라 각 유권자의 마음 자체도 긴가민가하다.”

투표 전까지 16세 이상 스코틀랜드인 전체 441만 명의 97%인 428만 명이 유권자 등록을 마쳤다. 우리 모두 는 똑똑한 사람들이 내세운 복잡한 주장을 읽고 들으며 그것들을 소화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투표소에 들어서면 자신 혼자뿐이다. 연필 하나, X표를 그려 넣을 수 있는 작은 칸 두 개, 짧은 단어 6개, 물음표 하나. 투표가 끝난 뒤에도 그 두 칸 중 어느 것이든 스코틀랜드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나의 경우 초기의 희망이 다소간의 실용주의로 변했다. 투표 부스에 섰을 때 나는 각 칸에 이 결정의 미묘함과 중요성을 나타내는 비율을 써넣고 싶었다. 그러나 둘 중 하나의 칸에 하나의 X표를 그려 넣어야 했다. 종이에 연필을 대기 전에 3분 정도 서 있었다. 용기가 필요한 결정처럼 느껴졌다. 이전에도 바로 이곳에서 투표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신중하면서도 별 부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진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걸 해냅시다!”

오랜 찬반 유세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은 다양한 부류의 정치인을 만났다. 각 주장들은 도시와 시골길에서 검증되느라 닳고 닳은 듯했다. 테니스 스타 앤디 머레이는 이런 정치에 개입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 듯했다. 2013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이래 진정한 영국의 스포츠 영웅인 그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투표일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스코틀랜드인들은 머레이가 약간은 모호하게 ‘독립 찬성’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걸 해냅시다!”라는 그의 말이 트위터를 통해 재빨리 퍼져나갔다.

머레이의 고향 던블레인에 설치된 빅토리아홀 투표소 밖에는 대형 ‘찬성’ 표지판이 서 있었지만 그 글 위에 ‘반대’라는 글이 조잡하게 페인트로 덧칠해져 있었다. 그곳에 SUV 레인지 로브 한 대가 도착했다. 사이드 미러가 자동으로 접어지고 차체가 낮아지더니 근엄한 표정의 한 남자가 발을 쿵쿵 굴리며 나와 투표소로 들어갔다. 몇 분 뒤 그가 투표소 밖으로 나왔다. “내가 어떻게 투표했는지 말하지 않겠다. 내 이름도 묻지 마라.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다. 이 투표는 취소돼야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어서 투표했다고 말했다. “정보가 충분치 않았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결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보가 필요했지만 그런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투표소 입구에는 노인 두 명이 통로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대개 고령의 연금 수령자들은 독립을 원치 않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계층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평생 스코틀랜드국민당(SNP) 당원인 찰스 맥휴(83)는 기쁜 마음으로 찬성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난 이런 날이 오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독립 반대파인 피터 맥그리거(67)는 불행해 보였다. “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건 정치 이상이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표시로 이곳에 왔다. 어떻게 과반수 투표로 나라를 떼어낼 수 있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안이 부결된 뒤 에든버러 시내에 실망한 독립 지지자들이 모여 있다. / 글래스고의 한 호텔에서 분리독립안이 부결된 투표 결과를 보고 환호하는 독립 반대파(아래).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앨릭스 새먼드 SNP 대표가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맨 아래).



침묵하는 다수

찬성 진영이 더 사교적이었다. 녹색당원, 급진파, SNP 당원들은 서로 악수하며 투표하러 온 사람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머리를 푸르스름한 색으로 파마한 중년 여성이 근엄한 표정으로 조용히 지나가자 맥그리거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봤어? 윙크를 했어. 그녀는 반대표를 던졌어.” 그녀는 독립 반대파가 매달린 ‘침묵하는 다수’ 중 한 명이었다.

국방부 기숙학교 퀸빅토리아에서 스쿨버스가 투표소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투표하는 유권자들이었다. 버스 창문을 통해 짓궂은 야유가 쏟아졌다. “찬성 투표자는 악마숭배자다!” 버스 밖에 서 있던 제이드 매카트니는 16세로 독립에 찬성했다. 그녀는 “하지만 학교에는 반대파가 더 많다.” 이번에 처음으로 16세가 투표를 했다. 그들은 자신들도 투표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했다.

스코틀랜드 최대의 도시 글래스고는 최대 격전지였다. 늦은 오후 바이어스 로드에서 바이올린과 기타 트리오가 연주하는 앞에 던컨 그레이(42)가 덧셈을 하고 있었다. “5만이야”라고 그가 계산한 결과를 내놓았다. 5만이라고? “내 돈 5만 파운드를 썼다는 뜻이다.” 그는 말그대로 전 재산을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썼다. “나는 주로 아란 섬에 산다. 캠핑카를 사서 지난해 내내 전국을 돌며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을 홍보했다. 이제야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게 어떤지 실감이 난다. 난 무신론자이지만 사람들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느끼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 것 같다.”

그는 투표 당일 반대파 4명을 설득해 독립 찬성파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매력을 풍겼다. 독립 지지 운동가들은 좌익의 다양한 부류로 구성됐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는 양 행동했다. 따뜻하고,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가졌으며, 다양성이 보장되는 나라. 분리독립 운동을 이끈 앨릭스 새먼드 SNP 대표 겸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이 시사했듯이 그들은 가능성의 정치를 바탕으로 모인 ‘지도자 없는 집단’이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따뜻이 대했다. 그들의 매력을 모른 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꽃

그런 열정 앞에서 헛된 패배의 가능성은 엄청난 비극처럼 보였다. 던컨 그레이는 가진 돈을 거의 다 썼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축구 경기 후반전 중간에 선수에게 이번에 지면 기분이 어떨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선수는 울면서 집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열성파들에겐 그날이 심판의 날이었다.

글래스고대학교 정문 밖에는 신입생 환영 행사가 한창이었다. 대학로는 다양한 거리 운동가들로 가득했다. 각각 아주 다른 공약을 내걸었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판촉 직원들이 술 한 잔 값에 두 잔을 주고 나이트클럽에 무료입장을 제공한다며 토큰을 나눠주고 있었다. 20년 전 내가 이곳에 학생으로 왔을 때는 스코틀랜드의 독립 가능성은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다. 독립 지지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 정치는 한물갔고 독립은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낼 소지가 큰 해결책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그 이래 정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글래스고에서 빈곤율이 높은 구역인 포슬파크는 보통은 침울한 곳이다. 그러나 투표 당일 맥패든 가족의 3대는 독립 찬성을 외쳤다.

글래스고 중심부의 조지 광장에는 고매한 야망을 가진 독립 찬성파들이 모여 있었다. 독립 지지파들의 주된 모임 장소였다. ‘독립 광장’이라고 적힌 종이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저녁 10시 투표가 마감되자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의회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모여 서성거렸다. 젊은이들은 “스코틀랜드의 꽃”이라고 외쳤다. 그들에게 합류하고는 싶지만 그런 민족주의 발현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초조한 분위기였다. 투표는 끝났고 이제 기다림이 시작됐다.



사라진 일생일대의 꿈

다음 날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 사이에 개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서히 나중엔 급속히 독립파의 희망이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곧 지난 몇 달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이 거부하려 했던 바로 그 정치와 정치인들이 다시 TV에 나와 안도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영국 연합 보존의 의미를 떠들어댔다. 거의 즉시 독립의 희망이 사라진 듯했다.

개표 최종 결과 독립 찬성이 45%, 반대가 55%로 나타났다. 앨릭스 새먼드에겐 일생일대의 꿈이 현재로선 사라졌다. 그는 우아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싸울 가능성이 크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스코틀랜드 유권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존중합니다.”

다양한 부류로 구성된 독립 지지파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렸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확실치 않다. 묵묵히 독립에 반대한 사람들의 마음도 착잡할 따름이었다.

그 모든 것이 끝난 뒤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종이 한 장 위의 작은 X표에 가진 것을 몽땅 쏟아 넣었을 때는 그렇게 허망하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필자 핀레이 영은 스코틀랜드의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스코틀랜드 독립 논쟁을 심층 분석한 전자책 ‘두 친구와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Two Friends, One Thorny Argument)’를 최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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