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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 | 명품 브랜드가 공사판에 뛰어든 까닭은? - 펜디 분수, 불가리 계단, 토즈 콜로세움

Repo | 명품 브랜드가 공사판에 뛰어든 까닭은? - 펜디 분수, 불가리 계단, 토즈 콜로세움

사진: 허정연기자

수많은 고대 유적이 도시 곳곳에 자리한 이탈리아 로마. 그 가운데도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꼽힌다. 1762년 완성된 이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로마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곳은 특별한 전설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분수를 등지고 서서 어깨 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에서 오드리 햅번도 이 분수에 동전을 던졌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전설을 믿는 사람이 많아 이 분수에는 매일 평균 3000유로(약 400만원)에 달하는 동전이 쌓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9월, 트레비 분수의 시원한 물줄기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가을볕에 반짝여야 할 분수는 온데간데 없었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각상의 위용은 창살 같은 철골물 뒤에 모습을 감췄다. 물이 다 빠진 채 바닥을 드러낸 분수대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했다. 동전 던질 곳을 찾지 못한 수많은 인파만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분수대 앞에 작은 세숫대야 모양의 동전통을 두긴 했지만 화려한 분수를 기대했던 관광객들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적지 보호하고 브랜드 가치 올리고

트레비 분수는 공사 중이다. 지난해 초 공사가 결정된 후 올 6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원인은 심각한 노후화이다. 훼손된 건축물을 복구하고, 대리석의 묵은 때를 말끔히 벗긴다는 계획이다. 공사 일정은 내년 말까지로 잡혀있지만 “어렵게 시작한 공사라 언제 끝날지는 미지수”라는 게 현지인들의 일관된 반응이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공사임에도 218만 유로(약 29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간다. 그런데 이 공사의 주최는 이탈리아 정부나 로마시가 아니다. 바로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인 펜디가 로마유산관리협회와 협약을 체결해 전체 공사 비용을 후원했다. 명품브랜드로 알려진 펜디가 경기 침체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정부를 대신해 유적지 보호에 나선 것이다. 이곳이 전세계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누릴 광고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명품 브랜드의 후원으로 공사에 착수한 로마시내 유적지는 트레비 분수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관광 명소인 ‘스페인 계단’은 이제 ‘불가리 계단’이 될 전망이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인 불가리가 공사비150만 유로(약 20억원)를 지원해 현재 공사 중이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가 ‘로마 유적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11년부터다. 서기 72년에 세워진 콜로세움은 검투사들이 5만명의 관중 앞에서 대결을 벌인 장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자동차 배기가스로 건물이 검게 변하고, 자동차와 지하철 진동으로 기반도 약해졌다. 고고학자들은 이를복구하는데 2500만 유로(약 331억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11년 당시 이탈리아 경제는 유럽 재정위기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정부의 문화계 지원금도 대폭줄어들었다. 2004년 정부 총예산의 0.34%를 차지하던 지원금이 2011년 무렵에는 0.19%에 불과했다. 보다 못한 로마시가 문화부와 손을 잡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콜로세움 공사를 후원할 기업을 물색했다.

이때 지원군을 자처한 것이 구두·가죽제품으로 잘 알려진 명품 브랜드 토즈였다. 토즈의 디에고 델라 발레 회장은 2500만 유로 상당의 복원금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서명했다. 발레 회장은 당시 열린 기자회견에서 “토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며 “자국의 이미지를 높일 뿐 아니라 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후원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해 9월부터 복원 공사에 돌입했다. 건물의 일부를 가린 채 8개 단계로 나눠 진행 중인 공사는 애당초 2~3년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됐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이 앞다퉈 문화 유적 복원 공사 비용을 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 브랜드 제고이다. 이탈리아 몬자(Monza) 상공위원회 마케팅 연구소가 이탈리아 유명 유적의 브랜드 가치를 발표한 적이 있다. 1위는 콜로세움으로 약 91억 유로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봤다. 그 뒤를 밀라노 두오모 성당(82억 유로)과 로마 트레비 분수(78억 유로)가 차지했다. 이는 유적지 인지도와 연간 방문 관광객 수, 지역경제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한 값이다. 유적을 후원한 비용의 몇 배에 달하는 브랜드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심산이다.

좀 더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이탈리아 명품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예술과 문화 후원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의 3분의 1이 이탈리아에 있다. 그만큼 보호해야 할 유적도 많다. 이 때문에 민간 기업이나 문화 재단의 후원 없이 온전히 정부 세금만으로 이를 충당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앞서 로마의 스쿠데리에 델 퀴리날레 전시관은 출판그룹 레오나르도 몬다도리가, 카피톨리나 미술관은 피렐리 그룹이, 에르콜라노 고고학 유적지는 HP그룹이 복원 비용을 지원했다.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중소기업들은 여러 기업이 한 프로젝트에 공동 참여해 지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탈리아는 기업규모에 관계 없이 문화 사업에 대한 지원을 최고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여긴다.

이런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우려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 베니스에서는 후원 받은 기업의 초대형 광고판을 유적지 정면에 내걸어 국민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토즈 역시 콜로세움을 후원한 대가로 로마시로부터 콜로세움 로고를 15년간 독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발레 회장은 콜로세움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우려에 대해 “콜로세움에서는 절대 토즈 신발을 신지 않겠다”는 말로 순수한 의도임을 강조했다. 그는 “복원 비용 지원은 상업적인 투자가 아니다”라며 “수익의 일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돌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유적지 상업적 이용에 대한 우려도

기업의 후원과 그 대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많은 유적과 문화재는 여전히 후원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잔니 알레만노 전 로마시장은 2011년 콜로세움 복원 사업 서명식에서 “긴축 재정으로 정부 지원이 줄어든 만큼 민간 자본이 절실하다”며 “수많은 기업인의 지원을 기다린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토즈의 대규모 복원 사업 후원 이후 명품 패션 브랜드가 줄줄이 나서 문화 유적 복구에 팔을 걷어 부친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정부 살림은 여전히 팍팍한데, 복원 공사를 벌이는 유적지는 오히려 늘고있는 이탈리아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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