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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⑦ 베르나르 브네 ‘세 개의 비결정적인 선들(Three Indeterminate Lines)’ - 단단하고 차가운 그러나 부드럽고 따뜻한

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⑦ 베르나르 브네 ‘세 개의 비결정적인 선들(Three Indeterminate Lines)’ - 단단하고 차가운 그러나 부드럽고 따뜻한

‘세 개의 비결정적인 선들’ 1993년 작, 216.5 x 108 x 110cm
다섯 살 무렵 서울을 떠나 경상남도 소도시로 이사를 갔습니다. 마을은 조용해서 누군가 마을을 통째로 우물에 빠뜨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는 화물 철도길이 나 있었는데, 팬티바람으로 소꿉놀이를 하거나, 누가 철로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더 오래 걷나 내기하며 놀곤 했습니다. 기찻길은 제 어린 시절 놀이터였습니다.

혼자서 놀다 심심해지면 쪼그려 앉아 가만히 철로에 귀를 대보았습니다. 쉬이이익, 신기하게도 거기선 항상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웅웅, 덜컥, 슈우욱, 지잉…. 먼 세계의 낯선 소리가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철길은 늘 아득한 분위기를 풍겼고, 영원할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고립된 곳의 열린 길처럼 두근거리는 바람이 부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그 때 내 귀와 뺨에 닿는 철로는 늘 손을 델 정도로 뜨겁거나 혹은 무섭도록 차가웠던, 가장 거대하고 미스터리한 바깥세상이었습니다.
 모순 속에서 단련된 철, 가벼워지다
한동안 잊고 있던 강철의 느낌을 다시 맞닥뜨린 것은 2010년 겨울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이었습니다. 어른 키보다 큰 지름의 원형 쇳덩어리들이 하얀 벽면에 붙어 있었습니다. 나무 그루터기의 나이테 같기도 하고, 액체가 마르면서 얼룩진 모양 같기도 했습니다. 보자마자 저는 베르나르 브네의 그 작품에 완전히 매혹되었습니다.

브네의 작품이 매력적인 건 이중성 때문입니다. 강철은 단단하고 절대 부서지지 않는 차가운 금속입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한 형태를 가집니다. ‘비 결정적인 선들’은 이 이중성을 매우 잘 드러내는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애초 브네는 미술이 단순한 ‘아름다움’보다 ‘지식’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작품을 통해 모호한 다중적 의미보다는 수학공식처럼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조차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죠. 작품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수학책을 아무데나 펼친 다음 공식이 잔뜩 그려진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으로 담거나, 검고 끈끈한 타르가 제멋대로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기도 했습니다. 증시 상황판을 찍은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이미지를 고르게 해서 전시하기도 했고요.

강박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없애는 작업을 계속 하던 브네는 결국 막다른 벽에 부딪칩니다. 자신을 지우다 보니 1971년부터는 아예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남동 일신빌딩에 있는 ‘비결정적인 선들’는 브네가 5년 간의 공백을 깨고 나와 만들기 시작한 작품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작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작가의 흔적을 지우려는 작품의 정체성 사이에서 브네는 어떻게 탈출구를 발견했을까요?

추측하건대 자신의 의도가 작품과 부딪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계관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명에서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비결정적’이라는 단어가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비결정적’이란 단어는 20세기 초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오면서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결정’되어 있다고 믿던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전자는 입자일까요, 파동일까요.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입자이자 동시에 파동입니다. 한쪽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죠. 브네는 양자역학에서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작품의 정체성이 한 작품 안에서 양립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비결정적인 세 개의 선들’은 브네의 가치관 변화에서 탄생했습니다. 그가 다루는 강철은 너무 무겁고 딱딱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의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 온도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워질 수 있는 게 강철입니다. 결국 이 작품도 구부려지지 않으려는 철의 성질과, 그것을 구부리려고 하는 작가의 의지가 투쟁하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비결정적인 선들’은 이 선을 완성한 것은 작가인지, 강철인지, 신인지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뜻도 되겠네요. 이제 딜레마를 벗어난 브네의 작품은 날개를 단 듯 더욱 가벼워졌습니다.
 강철 같은 세상에서 강철이 주는 위로
강철은 제게 여전히 낯선 세계이며 무뚝뚝한 도시 이미지입니다. 너무 뜨겁거나 서럽도록 차가워서 되도록 살갗이 닿는 것을 피하고 싶어지는, 철강과 시멘트와 유리로된 도시. 그러나 이곳에서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습니다. 굳세고 딱딱한 것에 몸을 의지하노라면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하니까요. 살다 보면 도처에 숨어있는 모순된 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휘청대지만, 원래 한 몸에 극단의 양면성을 가진 존재는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도시 한 켠에서 문득 마주친 브네의 조각에서 받는 뜻밖의 감동도 강철의 영혼을 엿본 기분이랄까, 딱딱한 세상의 속살을 봐버린 느낌입니다. 한없이 육중하고 거칠면서도 극히 섬세하고 유연한 것이 눈앞에 실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감동. 물리학 이론으로는 세상 모든 물질이 ‘결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의심할 여지없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이 쇳덩이의 가벼움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를 둘러싼 무겁고 거친 세계도 실은 이토록 유연하고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는 은밀한 표식 같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감상일까요. 그래서 브네의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이렇게 은근하고도 뜨거운 위로를 받나 봅니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98 일신빌딩 섬유제품 제조업체 일신방직의 종속회사인 일신산업개발이 유지·관리하는 일신빌딩 1층 정문에 ‘세 개의 비결정적인 선들’이 설치돼 있다. 미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의 일신빌딩 건물은 이우환·김환기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 com

베르나르 브네 - 1941년생으로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이자 개념미술가. 니스에 있는 시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프랑스에서 수여하는 미술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도 1994년 토탈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동국제강 사옥 페럼타워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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