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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쟁이’ 대기업의 귀환

‘양복쟁이’ 대기업의 귀환

IBM의 중앙처리 컴퓨터는 전 세계 주요 은행과 수많은 기업의 필수 설비 중 하나다.
그야말로 ‘양복쟁이들의 역습’이다. 기술 업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타트업이 대세라는 사실을 안다. 스타트업은 파괴자이자 혁신가이며 투자자가 선망하는 대상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위대한 기업가들이 열정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세계를 미래로 이끌어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제너럴일렉트릭(GE), IBM, LG전자 같은 대형 기술 업체는 어떨까? 기술 업계에서 대기업은 존재감이 무척 희박하다. 움직임도 스타트업에 비해 아주 굼뜨다. 마치 스타트업이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먹잇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연결사회에 접어든 오늘날 대기업은 새로운 강점을 발견했다. 스타트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갈망하는 두 가지를 대기업은 갖고 있다. 바로 데이터와 시간이다.

데이터의 미덕은 16만 명이 참석한 2015 국제가전박람회(CES)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행사장 곳곳에서 LG전자, 삼성전자, 샤프, 소니 등 대기업들은 드라마 세트장만한 부스를 설치하고 커브드 4K TV와 휘어진 휴대전화 등을 선보였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기기들은 거의 전부가 최근 유리 가공 업계의 혁신을 받아들였다. 바로 1851년 설립된 대기업 코닝이 이룬 혁신이다.

CES 행사장 뒷편에 위치한 코닝의 부스에서 제프리 이밴슨 이사는 연구개발에 대한 회사의 접근 방식을 얘기했다. 거의 모든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광섬유와 강화 유리 ‘고릴라 글래스’를 발명한 코닝은 이미 유리 화학과 제조 과정에 관련된 막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코닝은 수많은 센서들을 공장과 연구소에 장착할 수 있다. 이 센서들은 종전에 확보하지 못했던 유리 제조에 대한 데이터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그 데이터는 이제 코닝의 경쟁 우위다. 데이터를 활용하면 컴퓨터로 새 유리 성분을 모델링하고 그 성능이 어떨지 예측함으로써 연구실의 실험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10년 전 코닝의 거의 모든 연구개발은 10년에서 15년을 기준으로 진행됐다. 지금은 만약 소비자가 잡지만큼 얇은 TV를 위해 이전보다 크게 얇은 유리를 필요로 한다거나, 지갑처럼 접히는 전화기를 원할 때 컴퓨터 모델을 활용해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 “TV 기술이 순식간에 발전하는 이유”라고 이밴슨 이사는 말했다. “우리는 연구개발을 무척 빠르게 한다.” 이는 데이터 덕분에 가능하다.

이밴슨 이사의 말을 들으면서 몇 달 전 GE 선진기술프로그램 이사 마이클 아이델칙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GE는 거의 모든 항공사에 제트엔진을 공급한다. 오늘날 이 엔진엔 모든 항공기의 테라바이트 분량 데이터를 수집하는 센서가 장착된다. 이 데이터가 아주 상세하고 컴퓨터의 엔진 모델도 매우 뛰어난 덕분에 GE는 고도, 오염 물질, 풍향 등이 도시마다 제트엔진이 어떻게 다르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컴퓨터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엔진을 개선하고 각 엔진을 주 항로에 맞춰 조정한다. 만약 스타트업이 제트엔진 분야에서 GE와 감히 경쟁을 벌이려 하더라도 GE가 축적한 데이터와 정교한 제조 기술을 따라잡는 데 족히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일어난다. 사물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똑똑한 기업들은 물리 세계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전환하고, 그 데이터를 모델로 바꿔 경쟁자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빨리 대응한다. 가장 좋은 데이터가 이기는 법이다. 대형 소매업체, 항공사, 식료품 업체, 제강업체는 좋은 데이터를 수집할 방법을 그 어떤 신흥 기업보다 많이 갖고 있다.

시간은 어떤가? 예전보다 시간 여유가 많은 기업은 없지만 스타트업은 그보다 더 빨리 질주해야 한다. 최근 내가 참여한 연구 프로젝트는 스타트업의 속도를 측정하는 평가 기준 ‘시가총액 달성시간’을 살펴본 결과 스타트업에 요구되는 성장 속도가 12년 전에 비해 3배나 빨라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스타트업은 깊이 있고 복잡한 기술을 개발할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사회는 깊이 있고 복잡한 기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지난 1월 14일 IBM은 최신 중앙처리 컴퓨터 ‘시스템Z’를 공개했다. 개발에 5년이 걸린 최신 기술의 역작이다. 모바일을 활공하는 우버나 슬랙 등 신흥 강자들을 보면 집채만한 중앙처리 컴퓨터가 둔해보일지는 모르지만 전 세계 주요 은행은 거의 모두가 IBM의 중앙처리 컴퓨터에 의존한다. 여행업체 프라이스라인부터 전력공급업체 케냐전력까지 수많은 기업들도 중앙처리 컴퓨터를 필요로 한다.

신흥 기업과 경쟁할 때 시간은 IBM 편이다. 대기업은 “종종 전문 지식, 지적 재산, 공급망, 충성 고객 등 필수적이고 소중한 자산을 갖고 있다”고 ‘어떻게 그들은 한순간에 시장을 장악하는가’의 공동저자 래리 다운즈는 말했다. 이런 요소들은 시간을 아껴준다. 스타트업에선 찾아보기 힘든 자산이다. 그럼에도 재무재표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대기업 경영자는 무엇이 가치있는지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다운즈는 덧붙였다.

실제로 많은 경영진은 자기 기업을 스타트업처럼 경영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기가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대기업은 소규모 신자들의 열성과 민첩성을 이길 수 없다. 정면충돌 대신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점을 살려야 한다.

대기업에 스타트업의 활약 무대를 빼앗으라고 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난 20~30년 동안 대기업은 작고 자유로운 기업의 ‘파괴’를 내려다보면서 피해다니기에 바빴다. 이제 대기업은 데이터와 시간을 활용해서 기술 업계에서 이전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후드티와 샌들의 시대 저편에서 멋들어진 양복쟁이가 돌아오고 있다.

- 번역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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