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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⑨ 홍동희 ‘시간의 결(Layer of Time)’ - 시간의 결 따라 흐르는 원시의 속삭임

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⑨ 홍동희 ‘시간의 결(Layer of Time)’ - 시간의 결 따라 흐르는 원시의 속삭임

산을 오른다. 바람에 풀들이 소시락거리는 소리, 등산화에 마른 잎들과 흙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만 들린다. 나뭇가지가 자꾸만 길을 막아도 손을 훠이 저으며 산을 오른다. 숨은 차올라도 이렇게 한 걸음씩 가다 보면 언젠가는 꼭대기에 닿을 것을 알기에 계속해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홍동희 : 1964년생. 흙과 나무, 바위 등의 자연을 소재로 10년 넘게 작업해 온 아티스트. 199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8년부터 배대 용 공간디자이너와 협업해 건축 스킨과 아트월 작업을 했다. 가구 작업도 병행하는 홍 작가는 2011년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아 시아 국가들의 다실 문화를 보여주는 기획전시의 총괄 아트디렉 터로 참여했다. / 스테이트 타워 남산 로비 벽면, 홍동희, 2011
건강에 좋다는 이유 정도를 뺀다면, 어차피 다시 내려와야만 하는 길이다. 그런데 굳이 귀찮게 왜 산을 오르고 싶어지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꾸벅꾸벅 졸고 싶은 게으름을 이기는 이 엄청난 동기유발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산 정상에서 느끼는 정복감과 상쾌함만으로는 왠지 설명이 부족하다.

저 아래 미니어처 장난감보다 작아 보이는 빌딩들, 습자지로 붙인 듯 아스라한 먼 산들, 높고 거칠었던 나무들. 이 모든 게 나와 아주 멀어진 산마루에 서면 신기하게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걱정이나 근심거리도 어느새 꽤나 만만하게 가벼워진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도 산비탈을 내려올 무렵엔 문제가 스르륵 녹아버리는 경험이 자주 있다. 그 이후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산 속 찬 공기가 그리워지나 보다.
 감당하기 힘든 압도감에서 오는 안도감
이런 느낌은 일상을 벗어나 산 정상에 오를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우연히 창 밖으로 보이는 산맥들을 발견하거나, 거대한 우주나 바다 혹은 광활한 사막에 채워진 수천억 개의 모래알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때도 찾아오곤 한다. 미학에서는 이런 것을 ‘숭고미’라 부르는데, 엄청나게 크고 무한히 강한 힘이나 위대함 앞에서 경험하게 되는 압도적인 감흥을 뜻한다. 지극히 큰 것과 그 앞에서 내 자신이 상대적으로 지극히 작은 존재라는 자각이 동시에 찾아들 때, 우리는 이중적인 느낌을 동시에 경험한다. 달콤한 두려움이랄까. 위대함 앞에서 불가피하고도 완전한 굴복이 이루어진 후에 남는 것은 의외의 안도감이다. 그 순간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런 때가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그 앞에서 인간의 지성이나 자존심, 존재라는 것은 사소해지고 거추장스러웠던 자기애도 내려놓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인간의 의식을 고양하는 ‘숭고함’의 순간을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끌어들이려 끊임없이 시도해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예술가들도 인간이기에 그 스케일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친 실제의 자연에서 영혼을 채취해 일부를 재현하는 노동집약적인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자연의 숭고미를 경험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 중구 회현동 스테이트타워 남산의 로비에 설치된 ‘시간의 결(Layer of Time)’과 같은 작품이 그렇다.

이 작품을 설치한 홍동희 작가는 스테이트타워 로비의 높은 벽면을 거대한 지층 이미지로 채웠다. 거친 실제 자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효과를 충분히 거둔 작품이다. 홍 작가는 아예 큰 돌산을 깎은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석재 느낌의 패널들을 붙였다. 마치 진짜 암석 같은 불규칙하고도 거친 표면 질감은 무수한 가로줄무늬로 인해 오래된 나무의 피부 같기도 하고 지층의 단면 같기도 하다. 그냥 무늬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우리나라 산들의 부드러운 형상을 담아놓았다. 흔히 회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법인, 앞은 짙은 회색으로 대비를 또렷하게, 뒤로 갈수록 점점 흐려지도록 하는 공기원근법을 사용하여 ‘조각 산수화’를 만든 것이다.

스테이트 타워의 로비는 호화로운 외국 호텔처럼 넓고 높은 공간이 특징이다. 편안하고 넓은 가죽소파까지 비치돼 있어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상당한 장점은 로비의 거대한 벽면 전체를 작품화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상이 인테리어의 일환인지, 조각품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유리 액자 속 고고한 예술품처럼 정색하고 관객과의 선을 긋고 있지 않으니 기대어 만져볼 수도 있다. 벽 가까이 서면 동굴 속 돌의 표면을 연상케 하는 검고도 묵직한 숨소리가 불규칙한 가로선들을 따라 전해진다.

홍동희 작가는 자신이 깊은 촌구석에서 태어나 자연이 뿜어내는 매력에 익숙하고 친근하다고 말한다. 특히 나뭇결, 돌에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는 작가인 자신의 의지보다는 나무들이 그 자신의 역사로 인해 가지게 된 독특한 실루엣과 무늬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가구를 만든다. 홍 작가가 건축이나 가구, 인테리어와 접합된 방식의 작업을 즐기는 이유도, 관객이 작품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역할에서 좀 더 가까이에서 만지고 호흡하며 삶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가 시골에서 가지고 놀고 매만지며 체화했던 자연이란, 아마 느리고도 변함없이 오래오래 흐르는 시간의 결인 듯하다. 나무의 나이테를 만들고, 여러겹의 껍질을 만들고, 차곡차곡 단층을 쌓는 그 천년만년의 단단한 시간 앞에 하루살이 식의 고민은 작고도 가벼워진다. 매일의 피곤함, 먹고살기의 빠듯함, 머릿속을 채우는 이런 저런 고민과 걱정거리를 잠재우는 자장가 같은 바위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는 바랐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일상에 바빠 예민하게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청정한 원시 동굴에서 들었을 법한 은근한 속삭임을 닮은 그의 작품이 우리의 정신의 무게를 한 겹이나마 덜어 주기를.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서울시 서울 중구 회현동2가 6-11 스테이트타워 남산 로비
홍동희 - 작가의 ‘시간의 결(Layer of Time)’이 설치된 곳은 스테이트타워 남산 로비다. 스테이트타워 남산의 소유주는 아랍에미리트(UAE)아부다비투자청이다. 하지만 홍동희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시점은 아부다비투자청이 건물을 매입하기 전이다. 당시 건물 소유주는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이었다. 공간 디자인을 의뢰받은 파라스코프는 서미갤러리 등으로부터 아트 컨설팅을 받아 로비 벽면에 홍동희 작가의 작품 설치를 결정했다.
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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