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넴초프 암살의 진짜 배후는?

넴초프 암살의 진짜 배후는?

보리스 넴초프는 지난 2월 28일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 부근의 다리 위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푸틴의 정적이던 보리스 넴초프의 암살은 할리우드 영화 저리 가라다. 그 어떤 감독도 그보다 더 처절하게 표현하거나 거기에 더 많은 상징을 담을 순 없을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가랑비 내리는 늦은 밤, 인적 끊어진 다리를 건너가는 넴초프와 여자친구 뒤를 총잡이들이 자동차를 타고 미행한다. 총 6발이 발사된다. 넴초프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그 뒤에는 성 바실리 대성당 돔과 크렘린 첨탑이 거대하게 서 있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정권의 적은 모두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누가 보냈을까? 또 누구에게 보내는 메시지일까? 사면초가에 몰린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인가 아니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인가? 가장 간단한 설명은 크렘린이 야권 인사들을 겁줄 목적으로 넴초프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진보적인 반체제 인사들은 그렇게 믿는다. 세계 체스 챔피언 출신 야권 지도자 가리 카스파로프는 “넴초프 암살 책임은 반드시 푸틴에게 물어야 한다”며 “누가 지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암살을 누가 지시했는지가 중요하다. 만약 암살범이 푸틴의 지시를 받았다면 그만해도 섬뜩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더 무시무시하다. 넴초프 암살이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련된 암살단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용의자 5명이 체포됐는데 전부 체첸 출신이다(여섯 번째 용의자는 생포 되기 직전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KGB의 후신)에 따르면 넴초프 암살의 주모자는 자우르 다다예프다. 체첸 자치공화국 수반 람잔 카디로프와 가까운 인물이다. 카디로프는 체첸 반군 출신으로 푸틴 충성파로 변신했다.
 푸틴에게 ‘엿 먹어라’는 메시지?
체첸 자치공화국 수반 람잔 카디로프(가운데)가 군 지휘자들과 함께 그로즈니의 스타디움에서 체첸 특수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다다예프(범행을 자백했다가 나중에 고문을 당했다며 진술을 철회했다)는 체첸 내무부 산하 준군사조직의 부사령관이었다. 그 조직은 오랫동안 카디로프의 근위대 역할을 했다. 다다예프가 체포되자 카디로프는 그를 “진정한 러시아 애국인사”라고 불렀다. 또 넴초프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피살된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만화가들을 지지한 것에 다다예프가 불만을 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샤를리 엡도 공격이 있기 한참 전부터 다다예프가 넴초프의 아파트를 감시했다는 증거가 모스크바의 한 일간지에 폭로됐다. 그 직후 카디로프는 다다예프의 결백을 주장하며 러시아 언론이 다다예프와 자신을 음해할 목적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암살을 누가 지시했든 카디로프가 넴초프를 러시아의 반역자이자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2011년 넴초프가 모스크바에서 푸틴의 대통령 복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을 때 카디로프는 그의 체포를 촉구했다. 당시 넴초프는 “카디로프는 심리적으로 심하게 병든 사람”이라고 응수했다.

올해 들어 카디로프는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반마이단’ 운동의 주된 배후였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친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린 반정권 시위(마이단) 같은 사태가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그 운동의 목표다. 모스크바에서 크림반도 합병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넴초프는 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러시아 지도부 제재를 강화하라고 촉구해 러시아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러시아 국영 TV는 넴초프와 그의 동료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 꼭두각시라고 조롱했다. 푸틴도 러시아 내부에 적과 내통하는 “제5열”이 있다고 말했다.

카디로프와 각을 세우다가 살해된 건 넴초프가 처음이 아닐지 모른다. 탐사보도 전문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와 나탈리아 에스테미로바도 체첸의 부패와 폭력사태를 취재하던 중 피살됐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2006년 카디로프를 “우리 시대의 스탈린”이라고 부른 직후 모스크바에 있는 아파트 밖에서 살해됐다. 에스테미로바는 2009년 카디로프가 고문과 임의처형에 관여했다(본인은 부인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쓴 뒤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납치된 후 사살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지금도 카디로프가 푸틴에게 복종하는지 여부다. 러시아의 한 유력 일간지 편집인으로 최근까지 일했던 한 인사는 넴초프가 반역자라는 데 푸틴이 동의한다고 해도 “그를 암살해도 좋다는 건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그는 은퇴하기 전엔 푸틴과 참모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했으며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익명을 요구했다). “물론 크렘린도 넴초프 사건으로 충격 받았다. 누군가 모스크바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임의로 표적을 골라 암살하는 건 절대 옳지 않다. 이 사건은 푸틴에게 ‘엿 먹어라’는 것과 같다. 암살자들은 푸틴에게 ‘좋다. 당신이 보스니까 규정을 만들지만 우린 그들을 마음대로 처형하겠다’고 말하는 셈이다.”

푸틴이 모든 공공 조직을 개인적으로 통제하는 러시아 같은 체제 아래선 궁중정치의 불문율이 가장 무섭다. 러시아 연구가들을 위한 영향력 있는 블로그 ‘파워 버티컬(The Power Vertical)’을 운영하는 브라이언 위트모어는 “신호와 제스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고위층에겐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넴초프처럼 잘 알려진 인사를 모스크바 붉은광장 부근에서 살해하는 것은 그런 불문율에 어긋난다.”

위트모어를 비롯한 크렘린 관측통 다수는 넴초프 암살을 실로비키(러시아어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뜻하며 FSB를 비롯해 정보기관과 군, 경찰 출신의 유력 인사를 일컫는다) 내부의 권력투쟁 산물로 본다. 카디로프는 러시아에서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는 무장 친위대 수천 명을 거느린다. 2004년 부친이 암살당한 뒤엔 “푸틴을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푸틴도 카디로프를 각별하게 배려했다. 심지어 넴초프 피살 직후 푸틴은 체첸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카디로프에게 명예훈장까지 수여했다(넴초프 암살 용의자들과 카디로프의 관계가 드러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카디로프에게도 위험한 적이 있다.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부터 크렘린 고위 참모(세르게이 이바노프 비서실장 포함)까지 숱하다. 넴초프 암살을 실제로 누가 지시했든 간에 정보기관 내부의 카디로프 적들은 그에게 불리한 정보를 언론에 흘리며 그를 압박하고 있다.
 실로비키 내부의 권력투쟁
푸틴 참모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정적을 암살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만약 카디로프가 실제로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푸틴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원의원 출신의 진보적인 야권 정치인 콘스탄틴 보로보이는 “카디로프가 푸틴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며 “체첸 통제가 너무 힘들어 푸틴은 그를 처벌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푸틴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푸틴의 평전 ‘얼굴 없는 남자’를 쓴 마샤 게센은 “러시아의 의사결정 과정만이 아니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까지 푸틴이 독점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초 푸틴이 열흘 동안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자 러시아 정계는 노심초사했다. 인터넷에는 쿠데타, 뇌졸중, 늦둥이 출산 등 다양한 소문이 떠돌았다. 러시아 대중은 푸틴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지만 푸틴의 일시적인 잠적은 러시아 국가 전체가 얼마나 푸틴에게 의존하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가 없으면 러시아가 혼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피해망상과 폭력의 판도라 상자
지난 2월 21일 모스크바에서 반마이단 운동원들이 ‘우크라이나 혁명을 용서하지 말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늘 그랬던 건 아니다. 3년여 전만해도 이임하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진보 성향의 중산층 시민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메우며 공정 선거와 정치·표현의 자유를 요구했다. 요즘은 그 거리가 애국주의를 외치는 극우 인파로 가득하다. 그들은 ‘크림반도는 우리 것, 오바마는 우리를 부러워하지 마라’ ‘미국은 간섭하지 마라’ ‘조국이 자랑스럽다’고 적힌 깃발을 흔든다(러시아 소셜미디어 사이트에 오른 사진은 그들이 집회 참가 대가로 돈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2012년 대선에서 푸틴에 맞서 출마한 신흥재벌 미하일 프로호로프의 선거참모로 일한 블로거 안톤 크라소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옛 진보적 야권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 넴초프의 죽음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젊은 개혁가들, 광장 시위 지도자들이라는 옛 전설도 그와 함께 죽었다.”

지난 3월 중순 크림반도 합병 1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후 푸틴은 러시아 국영 TV 로시야1이 방영한 다큐멘터리 ‘크림,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출연해 나토의 위협에 대비해 전술핵무기 사용의 승인을 고려했다고 엄숙하게 말했다. 같은 날 저명 언론인이자 반체제 운동가인 크세니아 소브차크는 자신의 이름이 체첸인의 암살 표적 명단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안 뒤 러시아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푸틴이 넴초프의 암살을 지시했다면 어떻게 보면 우려가 덜할 수 있다”고 소브차크는 블로그에 썼다. 소브차크의 부친이 소련 붕괴 후 레닌그라드 초대 시장으로 푸틴의 상사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그는 푸틴을 어려서부터 잘 안다. “그건 끔찍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얘기다. 관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넴초프 암살은 그런 게 아니다. 푸틴이 살해 지시를 내렸을 리 없다. 하지만 푸틴은 자신의 손으로 무시무시한 터미네이터를 만들어 놓고는 이젠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됐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다. 관영 언론이 매일 조장하는 혼돈의 증오심만 가득할 뿐이다.”

어쩌면 크렘린은 피해망상과 폭력이 담긴 판도라 상자를 열어놓고는 도로 닫지 못해 버둥거리는지 모른다. 넴초프가 암살된 지난 2월 28일은 진보적 야권이 지도자 한 명을 잃고, 극단적인 국수주의 암살단이 모스크바 거리로 처음 진출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소브차크는 “넴초프의 목숨을 앗아간 총탄 6발은 닥쳐올 암살의 서곡일 뿐이다. 앞으로 더 험난한 시기가 온다”고 말했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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