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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 멀리 가려면 쉬엄쉬엄 가라

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 멀리 가려면 쉬엄쉬엄 가라

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ted.com
목적지를 향해 액셀을 힘껏 밟다 보면 산을 지나쳤는지, 강을 건너왔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든지 휙휙 지나가 버리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다. 큰 맘 먹고 장만한 스마트폰의 기능을 얼추 익혔다 싶으면 금방 새로운 게 나와 버린다. TV에 새로 나온 연예인 이름을 겨우 외울라 싶으면 벌써 은퇴해서 장사하고 있단다. 학창시절 끼고 살았던 FM 라디오를 틀어 봐도 죄다 모르는 DJ들의 해독불가 멘트 뿐이다(배철수 형님에게 훈장이라도 줘야 한다). 이제 익숙한 것들의 자리를 점점 새로운 것들이 메워가고 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저 멀리 북유럽, 노르웨이 방송국의 한 프로듀서는 세상을 향해 이제 제발 좀 천천히 가자며, 그게 아니면 잠깐 쉬었다 가자며 반기를 들었다. 그것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패스트 세상에 도전하는 슬로우 TV
베르겐 기차 여행의 한 장면.
2009년 어느 날, 노르웨이 국영 방송국 NRK의 프로듀서 토마스 헬름(Thomas Hellum)은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엉뚱한 아이디어 하나를 떠 올렸다. 그 해 개통 100주년을 맞은 노르웨이 베르겐(Bergen) 철도를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좀 더 리얼(?)하게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베르겐 철도를 타고 노르웨이를 동서로 횡단하는 데는 7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리얼하게 7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 전 세계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슬로우 TV’가 탄생한 순간이다(슬로우 TV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천천히 보여준다는 의미).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밤 황금시간대,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아무런 줄거리, 대본, 극적 상황, 절정의 순간도 없다. 그저 기차가 달리는 차창 밖 풍경과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만 들린다. 열차 맨 앞 운전실에 고정시킨 카메라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눈 덮인 풍경과 아찔한 교각, 컴컴한 터널을 고스란히 프레임에 담았다. 기차가 역에 서면 그대로 화면도 정지한다. 160여개에 달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는 철도와 관련된 기록물 들을 잠시 보여줬다.

후티그루텐 크루즈 여행의 한 장면.
경쟁 채널에서는 인기 정상의 오디션 프로 ‘엑스팩터(X-Factor)’를 내보낸 상황. NRK 방송사의 제작진은 가슴을 졸이며 시청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 500만명 중 약 120만명이 이 기차여행을 지켜본 것이다. 심지어 다른 채널의 뉴스 진행자가 뉴스 중간에 지금 기차가 무슨 역에 도착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채널을 돌릴 정도였다. 어떤 남자 시청자는 기차여행의 마지막 역에서 자신의 짐을 들려고 일어나다가 커튼대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그곳이 거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수천명의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마치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것처럼 차창 밖 풍경에 대해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이야기를 나눴다.

슬로우 TV의 가능성을 본 NRK는 더 과감한 편성을 시도한다. 후티그루텐(Hurtigruten)의 크루즈는 베르겐에서 키르케네스까지 거의 3000km에 달하는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을 항해한다. 2011년 6월, NRK는 무려 6박 7일, 134시간 동안 후티그루텐 유람선에서 바라본 해안 풍경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감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베르겐 철도 여행의 거의 3배인 약 320만명이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생방송을 보던 시청자 들은 유람선 경로를 미리 파악한 뒤 자발적으로 다음 행선지에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카메라에 포착되기 위해 육지에서 손을 흔드는 정도였지만 며칠 뒤엔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여객선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결국엔 노르웨이 여왕까지 이 행렬에 동참할 정도로 전 국민이 열광했다.

어떻게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무미건조한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전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방송사 측에서 ‘시간(timeline)’을 편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슬로우 타이밍으로 내보내 시청자들이 실제 촬영 현장에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도록 한 것도 주효했다. 유람선 여행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 한적한 해안가에 있는 아름다운 농가의 풍경을 무려 10여분간 계속 보여줬다. 그러면 몇몇 시청자는 농부가 집에 있는지, 또 다른 시청자는 화면에 잡힌 소 한 마리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시청자들의 감성과 상상에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 슬로우 TV의 핵심인 것이다.

NRK의 슬로우 TV 제작팀은 그 후에도 여러 편의 히트작을 냈다. 양의 털을 깎고 실을 잣아, 털실 옷을 만드는 8시간 반짜리 방송(뜨개질 솜씨가 좋았던 한 출연자는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벽난로의 불타는 모습 12시간 생방송, 강 상류로 회귀하여 알을 낳으려는 연어들의 여정 18시간 생방송, 전국에서 모인 합창단이 900여곡의 찬송가를 나눠 부르는 2박 3일 방송 등이 연이어 히트를 쳤다. 슬로우 TV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슬프게 웃긴 유머 하나. 변호사인지 의사인지 아무튼 엄청나게 돈을 번 사람이 꿈에 그리던 멋진 단독 주택을 장만했다. 어느 날 서둘러 출근하다가 뭔가 놓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되돌아 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파출부 아줌마가 파란 잔디 위에 놓인 하얀 파라솔에 앉아 잡지를 보며 우아하게 커피 한잔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허겁지겁 돈을 벌었던 것은 결국 파출부 아줌마를 위한 일이었다.
 편집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시간
‘슬로우TV’ 강연 동영상.
우리는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점점 더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 왔다. 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개 줄’을 찰 수는 없다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자의 반 타의 반 삐삐를 허리춤에 차면서부터 서서히 속도에 취해 갔다. 몇 년 뒤 핸드폰이 나오자 서둘러 ‘익사이팅’한 속도에 뛰어들더니, 스마트폰부터는 출시 날짜에 맞춰 줄을 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첨단 기술은 항상 우리 삶을 더 편리하게 해 줄 것을 약속한다. 1시간이 걸리던 일을 10분만에 해 치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식이다. 일견 맞다. 문제는 나머지 50분이다. 그 50분을 휴식과 사색으로 채울 지, 아니면 새로운 일거리로 채울 지가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후자를 택해 왔다.

번잡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날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기게 해준 슬로우 TV. 사실 슬로우 TV는 ‘빨리빨리’라는 신묘한 성장촉진제에 취한 나머지 한꺼번에 밀려든 조로(早老)의 부작용을 어쩌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더 필요하다. 다행히 ‘집 밥’으로 상징되는 슬로우 푸드에 이어 슬로우 예능 프로가 하나 둘 등장하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다만 최근의 슬로우 열풍이 그저 지나간 것들에 대한 향수나 가지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슬로우 라이프는 슬로우하게 즐겨야 한다. ‘삼시세끼’를 흐뭇한 미소로 보면서 주문한 피자가 왜 이리 안 오는지 조바심 내는 건 왠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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