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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신소재 그래핀 산업화의 꿈] 기업-정부-학계 통합 연구·투자 급하다

[꿈의 신소재 그래핀 산업화의 꿈] 기업-정부-학계 통합 연구·투자 급하다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Graphene)의 산업화 바람이 세계 각지에 휘몰아치고 있다. 일상에서 그래핀이 휘는(Flexible)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초고속 트랜지스터,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자동차 외장재, 바이오메디컬 소재 등으로 다양하게 구현되는 모습을 볼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핀은 지난 2004년 처음 발견됐다. 그간 전 세계적으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특허 출원 등으로 기술 확보에 힘쓰던 각국 정부, 학계, 산업계는 최근 상용화의 초석 마련에 힘쓰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시장의 움직임에 우리나라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래핀 강국’ 도약을 노리고 있다. 물론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높은 생산비용과 한정된 수요 등이 걸림돌이다. 그래핀 연구와 산업화 물결의 면면을 짚어봤다.
지난 2010년 10월 5일(현지시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전 세계의 이목이 스웨덴 왕립고등과학원에 집중됐다. 이날 영예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두 명. 영국 맨체스터대의 과학자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였다.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의 존재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역사적인 그래핀 발견 이야기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400만 달러(당시 약 43억원)의 상금을 걸고 ‘우주 엘리베이터에 사용할 견고하고도 빠른 도체 신소재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때 두 사람은 스카치테이프와 연필심을 이용, 흑연 덩어리에서 흑연 원자층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연필심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내면서 탄소 한 층으로 된 그래핀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흑연을 원자 크기 수준으로 얇게 벗겨낸 것이 바로 그래핀이다. 학계는 이 놀라운 신소재를 흑연을 뜻하는 영단어 ‘Graphite’에다 탄소의 이중결합 분자를 일컫는 ‘-ene’를 결합해 그래핀(Graphene)이라 이름 지었다. 모양을 보면 탄소 원자들이 육각형의 벌집 모양으로 배열된 평면 구조물이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2004년 10월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려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불과 6년 만에 발견의 주인공들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한동안 비판 여론도 들끓었다. 그래핀에 대한 첫 논문이 과대평가됐으며, 그 전후로 있었던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과소평가됐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예컨대 한국인이면서 세계적 석학인 김필립 미국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가 2005년에 더 명확하게 그래핀의 개념과 가능성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고, 따라서 노벨상 수상의 영예도 그에게 똑같이 돌아갔어야 했다는 주장 등이 있었다. 여하튼 일련의 논란은 그래핀이 그만큼 파급력 큰 신소재로 혜성처럼 등장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접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 현실로
전 세계 학계와 산업계가 그래핀의 등장에 이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그래핀이 소재로서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 때문이다. 그래핀은 실리콘보다 전기가 100배 빠르게 흐를 만큼 전도성이 강하면서 강철보다 200배 강한 나노 물질이다. 사람 머리카락의 25만분의 1에 불과한 두께에도 성능은 다른 어느 물질보다 탁월하다. 투명하고 신축성까지 좋아 학계는 ‘꿈의 신소재’라는 별명을 붙였다. 전자부품연구원(KETI)은 올해 300억 달러(약 32조원) 규모인 세계 그래핀 시장이 2030년에는 6000억 달러(약 641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본다. 학계 한 관계자는 “그래핀은 물성 자체가 이론의 여지가 없이 뛰어나다”며 “관련 기술만 잘 개발된다면 꿈의 신소재라는 표현은 허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핀의 활용성이 가장 큰 분야 중 하나일 것으로 예상되는 디스플레이를 예로 들어보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같은 기존의 평면 디스플레이를 제조할 때 주로 소재로 쓰이는 것은 인듐주석산화물(ITO)이라는 물질이다. ITO로 만든 터치패널은 밝기가 우수한 대신 구부리면 깨진다는 한계가 있어 요즘 전자 업계의 트렌드인 휘는(Flexible) 디스플레이 제조에는 쓰기가 어렵다. 그래핀을 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얇은데다 특유의 신축성과 투명성을 겸비해 휘는 디스플레이 제조 소재로 더없이 좋다. 또한 전도성까지 탁월해 휘는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면서 구부러져도 회로가 단선이 되지 않는다. 그래핀의 장점이 고스란히 발휘될 수 있는 분야인 셈이다. 이 경우 영화에서나 보던 ‘손으로 접을 수 있는’ TV와 PC가 우리 앞에 펼쳐질 수 있다. 양우석 KETI 책임연구원은 “2017~2018년을 기점으로 휘는 디스플레이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라며 “그래핀처럼 ITO를 대체하는 소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2015년 현재 전체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휘는 디스플레이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극히 미미하지만 2017년에는 1%, 2018년에는 3~4%로 점차 성장해 2020년 무렵 9~10%로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삼성전자 등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들은 이에 대비해 수년 전부터 그래핀을 휘는 디스플레이에 응용하기 위한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 확보가 관건이지만 전문가들은 ITO의 2배 수준으로 그래핀 가격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래핀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디스플레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터치패널 등 다른 투명 전극은 물론이고 전도성 잉크나 전자파(EMI) 차폐용 제품 같은 인쇄전자 소재로도 유용할 전망이다. 태양전지 같은 에너지용 전극에도 효과 만점일 것으로 보인다. 태양광 사업에 사활을 건 한화그룹이 지난해 11월 삼성 테크윈 인수를 결정하고, 이 회사가 영위하던 그래핀 관련 연구와 개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관련 업계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유다. 초고속 트랜지스터나 무선고주파집적회로(RFIC) 같은 차세대 반도체로도,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나 후면광원장치(BLU) 같은 방열 재료로도, 자동차 외장재나 항공우주부품같은 초경량고강도 복합재로도 그래핀은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 조금만 더 과감한 상상을 해본다면 미래형 방탄복 소재나 차세대 콘돔 소재로 그래핀이 쓰이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이 좀 더 발전하면 신약 개발을 위한 바이오이미징이나, 병원성 세균 감별을 위한 바이오센싱 등에 유용한 바이오메디컬 소재로도 쓰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그래핀 산업화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각종 연구·개발(R&D)이 꾸준히 진행됐다. 가장 활발한 곳은 미국과 유럽이며 중국·일본도 적극적이다. 무엇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그래핀 산업화를 도모하고 있다. 삼성테크윈을 거쳐 해성디에스에서 플렉스개발팀장직을 맡고 있는 류재철 박사는 “현재 가장 착실하게 그래핀 산업화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는 곳은 유럽”이라며 “유럽 각국 정부가 나서서 학계의 그래핀 연구를 돕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부분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아직까지 가시적인 산업적 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류 박사는 “산업화는 (그래핀이) 연구의 영역을 넘어 여러 제품에 대한 의미 있는 투입으로 이어졌을 때 이뤄지는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그래핀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계속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논의가 아직 산업계보다 학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영국이 최근 그래핀전구 개발에 성공하는 등 그래핀 산업화에 있어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일로 점쳐지는 성과는 조금씩 나오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일단 연구 성과 면에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을 자랑한다. 특허청에 따르면 그래핀 관련 국내 특허 출원 건수는 지난해 10월 기준 4255건으로 미국(3559건)과 일본(1583건)을 제쳤다. 해외에서도 우수한 성적표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기준, 미국 이외의 국가들이 미국에서 출원한 그래핀 관련 특허 1262건 중 가장 많은 603건이 한국 몫이었다. 좀처럼 후발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소재 분야와 달리 그래핀 분야에서만큼은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 김필립 교수 외에 홍병희 서울대 화학부 교수, 김상욱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교수, 조길원 포스텍 화학공학과 교수, 김수영 중앙대 화학신소재공학부 교수, 한중탁 한국전기연구원 박사 등 세계적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했다. 자연히 학술 논문 실적도 우수하다.

우리 정부도 최근 그래핀 산업화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미래창조과학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4월 6일 공동으로 ‘그래핀 사업화 촉진 기술 로드맵’을 발표하고 “2020년까지 핵심기술 85개를 확보하고 2025년까지 세계 1등 제품을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배 미래부 창조경제조정관은 “2025년까지 그래핀으로 19조원의 매출을 달성하고 약 5만2000명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그래핀 응용제품 개발과 원소재 개발 등에 다각도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응용제품 개발에서는 EMI 차단 필름과 초고용량 축전지(Super Capacitor) 등 국내 기술 수준이 높고 시장성이 좋은 6개 분야부터 사업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 ‘그래핀 사업화 촉진 기술 로드맵’ 발표
그러나 갈 길이 아직은 험난하고 멀다. 정부는 이미 2013년 그래핀 기술 선점과 새로운 시장 창출을 목표로 ‘그래핀 소재·부품기술 개발사업’을 출범시켰지만, 당초 우리 산업계나 학계의 기대와 달리 실제 정부 지원은 크게 축소된 바 있다. 그 사이 다른 경쟁국들이 그래핀 관련 R&D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린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자연스레 이 기간 국책과제 사업자로 선정됐던 기업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관련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각계 전문가나 관계자들의 응집력 강화를 도모하면서 지원 사업에 나선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응집력 강화란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지금까지처럼 따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공동의 목표를 갖고 일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리자는 것이다.

“최근 영국에서 국립그래핀연구소가 문을 연 것을 사례로 꼽을 수 있겠죠. 영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 연구소에는 내로라하는 학계 전문가들이 모였고, 세계 여러 기업들과 공동으로 그래핀 관련 제품 개발에 나설 계획이라고 합니다. 체계적인 산학연 협력 체제를 구축한 겁니다. 우리도 영국처럼 국가적·통합적으로 그래핀산업을 키워야 할 시점입니다.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한 곳에 모여서 시장부터 창출하고 키우는 게 급선무입니다. 양산 가능성에 초점을 둬야죠. 한국에 실력파 전문가들이 수두룩하지만 지금은 너무 따로 연구하다 보니 비효율적입니다. 지금처럼 했다가는 그래핀산업의 돌파구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정부 바뀌어도 장기적 관점서 투자해야”
아울러 업계 관계자들은 학계를 넘어 산업계 전반으로 그래핀에 대한 논의 지평이 넓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투자 의지를 가진 기업들에 학계가 거꾸로 자문을 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형성되면 시장 확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대학이나 국책연구소는 국가과제 수행을 중심으로 (그래핀을) 논의할 수밖에 없고 연구비가 안 나오면 그래핀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며 “냉철한 관점에서 수익을 올리기 위해 그래핀에 투자를 하는 기업들이 많아져야 무한경쟁의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그래핀 관련 경쟁력도 그만큼 강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석태 중앙대 화학신소재공학부 교수도 경험담을 통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는 지난 2012년 소량의 그래핀 용액만으로 스마트폰 터치패널 등에 쓰이는 11인치 면적 정도의 얇은 투명 필름을 균일하게 만드는 새 코팅기술을 개발해 주목받았다. 그동안은 그래핀 용액이 많이 필요할뿐더러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리는 스핀코팅, 스프레이코팅, 진공여과법, 다층박막적층법 등이 필름 코팅에 주로 쓰였다. 장 교수가 개발한 신기술은 용액의 양을 기존의 1만분의 1 수준까지 줄이는 한편, 작업 시간도 단축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신기술도 상용화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장 교수는 “논문 발표 직후 국내 대기업과 중견기업 10곳에서 접촉을 해왔지만 상용화가 진행되지는 않았다”며 “더 연구를 진행하면서 코팅기술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지만, 기업들은 코팅기술과 장비는 기존의 것 그대로 두고 용액만 바꾸기를 희망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은 바로 상용화가 가능하며 당장에 성과가 나올 수 있는 기술을 원해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연구실 차원에서 따로 연구하다 보면 우리가 개발한 성과물을 산업체와 연결해 또 다른 성과로 이어갈 기회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정부가 로드맵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과거에도 카본나노튜브(CNT)가 신소재로 각광받으면서 곧 상용화될 것처럼 논의되다가 흐지부지된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핀도 CNT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까 싶은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정부가 3~4년 해보고 말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그래핀 산업화 정책의 중요성을 인지하며 투자·관리한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따를 겁니다. 몇 년 후 정부가 바뀌더라도 꾸준히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소재 자체뿐 아니라 공정과 장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육성한다면 더 빠르게 차세대 산업으로 커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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