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내 안에 잠든 엔진을 깨워라!] 펴낸 이현순 두산 부회장 -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라”

[내 안에 잠든 엔진을 깨워라!] 펴낸 이현순 두산 부회장 -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라”

사진:전민규 기자
“무모했지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대한민국엔 정말 무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현순 두산 부회장은 현대자동차 출신이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에는 미국 제네럴모터스(GM)에 입사해 자동차 엔진을 연구했다. 1980년대 들어 현대차는 자체 엔진 개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1984년 이 부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무모한 도전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자동차 엔진이 등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부회장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그가 활동해온 CTO(최고기술경영자) 모임에서였다.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CTO들의 모인 자리에서 ‘공대생 출신 경영자들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자’는 의견이 나왔다. 모임 참석자 상당수는 박사 출신이기도 했다. 이 부회장도 2011년부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이공계에 다니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고등학생, 그리고 사회 초년생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 수익금은 모두 대학 장학금으로 사용한다.

책 내용은 서울대 강의와 이 부회장이 살아오면서 겪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모아서 구성했다. 모두 192쪽인데, 원래 이보다 분량이 많았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너무 두꺼우면 사람들이 안 읽는다 해서 내용을 많이 덜었다. 집필 기간은 8개월 정도 걸렸다. 이 부회장은 “집필 과정을 통해 걸어온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특히 엔진 개발 과정에서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사장이 보여준 신뢰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를 그냥 믿어 주셨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현대차에 입사할 당시 서른세 살이었어요. 새파란 친구가 엔진을 만들어 놓겠다고 큰소리를 쳤지요. 다른 임직원들 눈에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대차에서 연락이 왔을 때, 이 부회장은 물었다. “어떤 엔진을 만들어야 할까요?” 답은 이랬다. “아무거나 싸고 좋은 놈으로 부탁드립니다.” 기획은커녕 방향도 못 잡던 상황이었다. 그는 중소형 승용차 엔진 개발을 목표로 삼고, 유럽 엔진을 벤치마킹했다. 미국 엔진은 중대형인데다 연비보다는 파워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고, 일본 엔진은 미쓰비시와의 관계 때문에 따로 연구팀을 만들기 어려웠다. 현대 마북리연구소에 팀을 꾸렸지만 모든 일이 순탄치는 않았다. 회사에선 “정 회장이 사기꾼에게 당하고 있다”는 말이 퍼졌고, 나중엔 정부 관계자까지 “실패할 게 뻔한데 왜 엔진을 개발하고 있느냐”며 불편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정 회장은 회사 주요 임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 박사 말을 내 말처럼 생각하라”며 힘을 실어줬다. 따로 불러서 엔진개발 할 때 쓰라며 백지 수표를 준 일도 있다.

1980년대 초반 현대차의 주력 차종은 포니였다. 미쓰비시의 엔진과 변속기가 들어갔다. 현대차 내부에선 미쓰비시와 기술 제휴를 강화해서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데 미쓰비시의 눈 밖에 날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현대차가 엔진 개발에 나서자 미쓰비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연구를 중단하면 로열티 비용을 절반으로 낮춰주겠다는 제안까지 들어왔다. 정주영 회장은 이 부회장을 불러 “미쓰비시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제안할 리가 없다”며 “이 박사가 설계한 엔진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격려했다.

1985년 10월, 첫 번째 엔진 시제품을 완성했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다. 하지만 계속 문제가 발생했다. 엔진 시제품은 개당 2000만원을 호가했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다. 500개의 엔진 시제품을 만들었고, 150대의 자동차에 이를 달아서 성능을 검사했다. 250명의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먹고 자며 매달렸다. 1991년 마침내 이 박사 팀은 한국 최초의 자동차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통쾌한 순간은 2002년에 벌어졌다. 미쓰비시에 ‘세타엔진’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엔진설계도와 기술이전, 직원파견 및 주요 부품 수출 건으로 미쓰비시는 현대차에 1000억원을 지불했다. 이 부회장은 이를 ‘상전벽해’라고 표현했다. 10년 만에 로열티를 내던 위치에서 받는 자리로 위상이 변한 것이다. 과거 포니에 들어가는 엔진부품은 미쓰비시에서 수입했다. 현대가 주요 부품을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하면 미쓰비시는 다른 부품 가격을 올렸다. 아무리 부품을 개발해도 미쓰비시에 내야하는 비용은 비슷했다. 억울했지만 기술이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2003년 이 부회장은 미쓰비시 본사를 방문했다. 미쓰비시 회장이 건물 입구까지 나와있었다. 그는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달라고 부탁했다. “갑과 을의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 기술의 힘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피와 땀을 흘려가며 쌓은 기술이 있어야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요즘 대기업에서는 이공계 바람이 강하게 분다. 기술 변화가 빠르기에 전문적인 시각의 중요성을 느껴서다. 이 부회장은 산업화 1세대다. ‘하면된다’는 도전정신으로 달라붙었다. 그때는 못하면 정말 죽어야 했던 시대다. 지금은 다르다. 풍요한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지금은 실패를 경험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시대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길 바랍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야권의 승리로 끝난 제22대 총선…향후 한국 사회의 변화는

2‘님’은 없고 ‘남’만 가득한 멋진 세상

3"돈 주고도 못 사"...레트로 감성 자극하는 '이 핸드폰'

4아워홈 '남매의 난' 다시 이나...구지은 부회장 이사회 떠난다

5신라호텔 '애플망고빙수' 가격 또 올랐네...10만원 넘겨

6최태원, 日 닛케이 포럼 참가...아시아 국가 협력 방안 논의

7의대 증원 합의점 찾나...총장들 "증원 규모 조정해달라"

8한화투자證 “코리안리, 순이익 감소 전망에도 견조한 배당 기대”

9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 내주 출범...'의료개혁' 본궤도 오르나

실시간 뉴스

1야권의 승리로 끝난 제22대 총선…향후 한국 사회의 변화는

2‘님’은 없고 ‘남’만 가득한 멋진 세상

3"돈 주고도 못 사"...레트로 감성 자극하는 '이 핸드폰'

4아워홈 '남매의 난' 다시 이나...구지은 부회장 이사회 떠난다

5신라호텔 '애플망고빙수' 가격 또 올랐네...10만원 넘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