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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약자를 위한, 시시한 강자와의 싸움

시시한 약자를 위한, 시시한 강자와의 싸움

‘송곳’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노사갈등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지난해 한국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드라마는 단연 ‘미생’이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된 ‘미생’은 케이블TV에서 방영됐음에도 8.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직장인의 삶과 애환, 비정규직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전국 곳곳에서 ‘미생’의 대사나 등장인물 이름을 차용한 운동이 일어났다. 심지어 정부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 ‘장그래법’이라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았을 정도다.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미생’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미생’에 종종 제기된 비판 중 하나는 그 작품이 구태의연한 회사의 악습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당연하다는듯이 매일 야근하고, 야근이 없을 때면 회식하고, 여타 직무와 전혀 상관없는 잡일(가령 임원을 만족시키려고 사탕을 열심히 고른다)에 시간을 소비한다. ‘미생’ 속에서 그런 장면들은 생존을 위한 직장인의 숭고한 투쟁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개선돼야 마땅한 비합리적 노동 관행일 뿐이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그런 점에서 ‘미생’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송곳’의 주인공 이수인은 대형 유통업체 지점의 과장이다. 이야기는 어느날 점장이 그에게 판매직 직원들을 전부 내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된다. 정규직 직원들을 보다 인건비가 낮은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기 위한 지시다. 이수인은 이 지시를 거부하고 노조를 결성해 회사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미생’이 다음 웹툰에 연재되고 약 2년 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 이 작품은 직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 사회 현실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미생’과 종종 비교된다. 최근 JTBC가 드라마화를 결정하면서 ‘미생’처럼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규석 작가는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 사회 문제를 드러낸 작품들로 유명하다.
언뜻 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비슷하다. 장그래가 본래 있던 기원을 떠나 원 인터내셔널에 들어갔듯이, 이수인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 생활을 하다 조기 전역 후 유통업체 푸르미에 입사한다. 두 인물 모두 익숙한 공간에서 기업이라는 ‘전쟁터’로 떠밀려 간 이방인들이다. 그럼에도 이 두 인물은 전혀 다르다. 장그래는 비정규직이지만 이수인은 정규직이다. 장그래가 조직에 녹아들어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인다면, ‘송곳’의 주인공 이수인은 조직이 마련해준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군분투한다.

대척점에 있다고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송곳’이 지향하는 바는 ‘미생’과 전혀 다르다. ‘미생’이 직장인 판타지 내지는 성장기라면 ‘송곳’은 노동법·노조 학습만화에 가깝다. ‘송곳’의 지향점은 공감대 형성이 아니다. 노조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한국에서 독자들이 노조원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그보다는 노동 문제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작가 스스로가 한 인터뷰에서 “노동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젊은 독자가 많은 네이버”를 연재처로 택했다고 할 정도로 이 작품의 목표 의식은 분명하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노동법과 관련된 부분에서 이 만화는 조금씩 삐걱댄다. 법이라는 딱딱한 요소를 만화 속에 녹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작중에 등장하는 노동운동가 구고신이 노동법을 설명할 때가 그렇다. 심지어 구고신은 한 화 전체를 털어 노동법을 줄줄 읊기도 한다. 이런 대목은 만화 ‘송곳’이 아니라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한 켠에 실릴 법한 노동법 홍보 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송곳’이 훌륭한 학습 만화인 이유는 있다. ‘송곳’에서 노조와 기업의 대결은 단순한 선악구도가 아니다. 작가는 노조를 미화하거나 노조에 어떤 숭고함을 부여하지 않는다. 작중의 노조측 인물들은 대체로 어떤 대의보다 스스로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은 “착하고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이며, 이들의 투쟁은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언뜻 영웅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이수인조차 때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인간임을 작가는 빠짐없이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선악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혹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송곳’의 내용은 현재진행형이다. 3부까지 연재됐으며, 단행본은 3권까지 출시됐다. 내년 봄 5부로 막을 내릴 계획이다. JTBC의 드라마판 ‘송곳’은 올가을께 방영된다. 영화제작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있다. 내년 초쯤엔 국회에서 ‘이수인법’이 발의됐다는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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