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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 좌우하는 9인의 심판관

미국 사회 좌우하는 9인의 심판관

동성결혼을 허용한 이번 역사적 판결은 종종 보수·진보 세력에 분노와 희망을 번갈아가며 심어온 미 연방대법원이 역대 가장 혁명적(혹은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1998년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임명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미국 동성애자에 대한 다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그들은 외로움 속에 살도록 방치돼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도로부터 배제당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법의 이름 아래 동등한 존엄성을 요구했다. 헌법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케네디는 대법관 취임 이후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동성애자 인권 수호자로 떠올랐다. 2003년 동성 간 성행위 금지법 철폐에 표를 던졌다. 2013년 결혼한 동성애자 커플에 부부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미국 대 윈저 판결에서도 동성애자의 손을 들었다.

2년 뒤 윈저를 혁명적이라고 비난했던 보수 세력은 최근 판결에 더욱 분노했다. 대법원장 존 로버츠를 포함한 대법원 내 보수파는 강하게 반발했다.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레이건 시절 임명된 대법관 앤토닌 스캘리어는 오버거펠 대 호지스 판결이 나라를 망치는 결정이며 ‘포춘 쿠키’에서나 나올 법한 논리라고 혹평했다.

로버츠는 보다 신중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이번 결정을 로 대웨이드 판결에 빗댔다. 1973년 낙태금지법을 폐지한 판결이다. “만약 여러분이 성적 성향에 관계 없이 동성결혼의 확대를 달가워하는 미국인 중 한 명이라면 이번 판결을 축하할 만하다”고 로버츠는 썼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기뻐하시라. 그러나 헌법을 끌어 들이진 말라. 이번 판결과 아무런 상관없으니 말이다.”

로버츠와 스캘리어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이번 판결은 아주 대담한 적극주의적 결정이었다. 지난 15년 간 미국인의 삶에 일어난 정치적·사회적 변화 가운데 단연 눈에 띈다. 적극주의란 기존 질서에 따르는 소극적 법리해석 대신 시대에 맞는 새로운 법리해석을 중시하는 태도다. 동성결혼 확대에서 대법원의 역할은 보수·진보 양측의 열렬한 적극주의를 반영한다. 모든 대법관이 법원의 적극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이를 멀리하진 못한다. 관점에 따라 대법원을 혁명적이거나 위선적, 아니면 양쪽 모두에 해당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이유다.

2005년 로버츠가 대법원장에 취임한 이래 미 대법원은 100년 넘게 논란의 대상이었던 선거자금조달법을 개정하고 왜곡된 선거권법의 주요 부분을 철폐했다. 당시 선거권법은 미국 역사상 가장 존중받던 법 중 하나였지만 로버츠가 이끄는 대법원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로버츠의 운동가적 면모는 2005년 자신이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심판”에 불과하다며 눈에 띄지 않는 대법원을 만들겠다던 선언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진보 세력은 기업의 선거자금 기부 규제를 철폐하고 슈퍼팩(무제한 모금이 가능한 민간 정치자금 단체)이 2016년 대선에서 활개치게 만든 시민연합 판결에 격분했다. 또 선거권법 개정으로 인해 미국이 과거의 암흑기로 퇴보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로버츠의 대법원이 철폐한 법률 수는 전임 대법원장보다 적지만 그 중요성에선 단연 압도적이다. 선거자금조달법과 선거권법은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동성결혼 판결은 다가오는 대선이 향후 수 년에 걸쳐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케네디(78), 스캐일러(79),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82), 스티븐 브레이어(76) 등 고령 대법관이 차기 대통령 임기 중에 교체되면 대법원의 성향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보수 세력은 더 이상의 얼 워런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워런은 드와이드 아이젠하워 전 미 대통령에 의해 1953년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공화당 출신임에도 공립학교 기도 금지, 범죄자 인권 보장 등 진보적인 판결을 잇따라 내리며 진보 세력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보수 세력과 아이젠하워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윌리엄 브레넌, 포터 스튜어트 등 아이젠하워가 임명한 다른 대법관들도 워런을 따랐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조지 H W 부시 등 전임 대통령들 역시 보수 인사들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을 선별해 대법관직에 앉혔다. 그럼에도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낙태 금지법을 철폐한 해리 블랙먼을 필두로 존 폴 스티븐스, 데이비드 스쿠터 등 믿었던 대법관 상당수가 진보 성향 판결로 실망만을 안겨줬다. 이런 경향은 동성결혼에 찬성표를 던진 케네디에게로 이어졌다(진보 대통령은 그런 상황을 훨씬 덜 겪었다. 아마 진보측에서 배신자로 여겨졌던 대법관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임명한 바이런 화이트가 유일할 것이다).

이제 공화당 후보들은 더 이상의 앤서니 케네디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실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어떤 대통령도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이 이념적 순수성을 간직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현 대법원의 적극주의는 동성결혼 같은 진보적 판결이든 다른 보수적 판결이든 상관없이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로버츠는 이제 60세다. 앞으로 한동안은 운전대에서 손떼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 번역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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