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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인 듯, 강제 아닌, 강제 같은’

‘강제인 듯, 강제 아닌, 강제 같은’

지난 7월 5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산업시설 중 한 곳인 하시마의 모습.
지난 7월 5일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의 메이지 산업시설 23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예상대로 한국에선 각계각층에서 한국 외교가 또 한번 일본에 속아넘어갔다고 분노했다.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성명을 내고 “이번 등재는 결코 한국이 합의해서는 안 되는 굴종외교”라고 지적하며 “정부는 ‘대일굴종외교’를 즉각 중단하고, 일본정부의 야비한 번복 시도에 강력하게 항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 각종 시민단체에서도 반발이 거세다. 시민모임측은 6일 성명을 통해 이번 등재를 “한국 정부의 외교적 야합이자 수치”라고 표현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일본측에선 이번 결정을 적극 환영해 마땅할 듯하다. 사실은 조금 다르다. 일본 언론과 시민단체 등은 이번 등재로 손해를 본 것이 다름아닌 일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한국인이 일부 시설에서 강제노동을 당했다’는 한국측의 주장에 배려를 보였다”며 “커다란 화근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지지통신은 “일본 측이 양보를 강요당했다”고 비판하는 한편 “등재 결정 직전까지 농락당한 일본 정부 내에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강제로 일했지만 강제노동 아니다?
양측의 입장이 이처럼 엇갈리는 이유는 유네스코 일본 대표의 발언문 때문이다. 사토 구니 주 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메이지 산업시설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 후 연설을 통해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왔고, 혹독한 조건 하에 강제로 일했다”고 영어로 발표했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강제로 일했다(forced to work)’는 부분이다. 통상 강제노동은 영어로 ‘forced labor’라고 표현한다. 일본측이 사용한 ‘forced labor’라는 표현은 ‘일하도록 강제됐다’는 뜻이다. ‘강제노동’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일부러 피해간 것이다.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어감이 다르다. 한국에서 17년 동안 영어 교육 분야에 종사한 한 캐나다인은 “‘forced labor’쪽이 훨씬 더 나쁜 의미”라고 뉴스위크 한국판에 설명했다. “강제로 일을 시킨다는 점에선 뜻이 같지만, ‘forced labor’엔 아주 괴로운 중노동을 시킨다는 뜻이 포함되는 반면 ‘forced to work’엔 그런 뜻이 없다. 강제로 사무실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더라도 ‘forced to work’에 해당 한다.” 한국어로 치면 ‘노동’과 ‘노역’ 정도의 차이다.

이처럼 어감의 차이가 있다 보니 강제노동이라고 옮길 수도, 옮기지 않을 수도 있는 여지가 생긴다. 한일 양측의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측은 ‘forced labor’를 강제노동으로 해석했다. 외교부는 메이지 산업시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해당 부분을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했음’이라고 옮겼다. 일본측은 다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이후 구니의 발언문이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발언문의 일본어 번역문에서 ‘forced to work’는 ‘일하게 됐다(働かされた)’고 완곡하게 번역됐다.

기시다 외무상의 발언이 알려지자 한국 내 비판 여론은 더 커졌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언론 기고를 통해 “일본이 이와 같이 표리부동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배경에는 한국 외교부의 안이한 대응과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 총장은 강제 노역 사실이 유네스코 등재 결정문이나 주석에 직접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 한국 정부가 당초 요구했던 강제노동의 뜻이 명확한 ‘forced labor’가 아니라 ‘forced to work’로 표현을 완화해줬다는 점, 노역을 강제한 주체가 정부인지 민간인지 불분명하게 됐다는 점 등을 외교부의 실책으로 꼽았다.
 강제노동 부정은 어려울 것
일제강점기 때 일본 탄광에 끌려가 일했던 노역자들.
물론 모든 것이 한국에 유리하게 결정됐다고 보긴 어렵다. 애초에 강압이 없는 한 외교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성과를 거두기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이익을 모두 챙겼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도 없다. ‘forced to work’ 발언은 등재 결정문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영향력이 없다는 일각의 우려만 해도 그렇다. 세계 각국 언론은 이번 등재 사실을 보도하면서 ‘forced labor’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강제노동(forced labour) 사실을 인정한 일본 유적지가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독일 도이체벨레지 역시 “일본이 강제노동(Zwangsarbeit)을 인정했다”는 제하에 이번 논란을 다뤘다. ‘Zwangsarbeit’는 동성애자, 유대인 등을 대상으로 나치가 행했던 강제노동을 일컬을 때도 사용하는 단어다.

해외 언론의 반응은 이들이 일본의 ‘forced to work 발언을 사실상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당국자의 입에서 최초로 ‘강제’라는 말이 나온 것이 한국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기무라 간 고베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어찌 됐든 강제노동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역사인식문제 해결에 “앞으로는 해외에서의 소송이 중심이 될 것”이라며 “소송 등 법적 절차가 해외에서 전개될 경우를 생각하면 해외 국가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전망했다. 기무라 교수는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 역시 해외 소송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한일 역사문제 해결에 실마리 될까
해외 소송 가능성은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이라는 말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유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강제노동을 ‘어떤 처벌의 위협 하에 놓인 개인으로부터 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청구한 노동 혹은 서비스’라고 규정한다. 일본측은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ILO가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강제노동 사실을 둘러싼 분쟁은 향후 재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재판에서 일본이 패한다면 성질이 비슷한 위안부 문제에서도 일본측이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베 정부로선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아베 정부를 비롯한 일본 우익 세력은 ‘한국 식민지배는 합법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강제징용 역시 마찬가지다. 스가는 6일 기자회견에서 “1944년 9월부터 1945년 8월 사이에 국민징용령을 근거로 한반도 출신 인력이 징용됐다”며 “이는 강제노동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변함없는 견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의 징용은 ILO의 강제노동조약 및 이 조약이 금지하는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강제로 끌고 와서 일을 시키기는 했지만 국민징용령이라는 정당한 절차에 따른 것이니 강제노동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다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결국 이번 논란 역시 한일기본조약 이후 계속돼 온 해묵은 논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으로선 이 긴 논쟁에서 강력한 신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다. ‘강제로 노동했다’는 발언이 전부가 아니다. 일본측은 메이지 산업시설에 “정보센터 설립 등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을 설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법적 구속력이 없다 할지라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선언한 내용을 그리 쉽게 무시하진 못한다. 향후 한국 정부가 일본을 압박할 때 꺼내들기 좋은 카드다. 현재 일본 각 지자체가 실시 중인 메이지 산업시설 홍보 문구엔 강제징용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아시아폴리시포인트의 민디 코틀러 소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새로 등재된 세계문화유산 시설에 연합국 전쟁포로의 역사를 포함시킬지는 분명하지 않다”며 “일본이 과거사 전체를 알리도록 하는 것은 연합국 정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기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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