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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제흐 레드닷 회장

페터 제흐 레드닷 회장

최근 한국 기업이 레드닷·iF·IDEA 등 세계 3대 디자인상을 휩쓸며 한국의 ‘디자인 파워’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레드닷의 디자인상 측정법을 직접 고안하는 등 국제 디자인계의 구루로 불리는 페터 제흐 레드닷 회장을 직접 만나 한국 기업의 디자인 경영에 대해 들어봤다.
페터 제흐 회장의 집무실은 독일 에센의 촐퍼라인 광산지대에 있다. 1986년 폐광을 개조한 이 복합단지에는 레드닷 본사와 디자인 박물관(사진 배경)이 들어서 있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 많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각인시키기엔 부족하다고 봅니다.” 지난 11월 3일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한국경제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글로벌 인재 포럼(Global HR Forum)에 연사로 초대 받아 한국을 방문한 페터 제흐(Peter Zec, 59) 회장의 말이다. 그는 일주일 전에도 서울시장 정책자문기구인 서울국제경제자문단(SIBA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고 했다. 2001년 설립된 SIBAC은 세계 유명기업 최고경영자 22명과 자문역 5명이 매년 서울시장에게 경제·사회·문화 분야에 걸쳐 자문하는데 제흐 회장은 디자인 분야의 유일한 자문역이다.

1992년, 제흐 회장이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는 삼성·LG가 세계 디자인상 명단에 막 이름을 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많은 한국 기업이 기술적 스펙과 합리적인 가격을 넘어 차별화할 수 있는 혁신 도구로 ‘디자인’을 선택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경영자들은 디자인을 비용(cost)으로 취급한다고 아쉬워했다. 제흐 회장은 “좋은 디자인의 상업적 가치를 측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전략적인 면에서 디자인 평가는 기업의 디자인 가치(design value)를 높일 좋은 기회”라며 자신이 레드닷 디자인상을 고안한 까닭을 밝혔다.

“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습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저는 보이지 않는 디자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론(methodology)을 고안한 것인데, 이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레드닷 디자인상을 평가하는 잣대입니다.” 제흐 회장은 또 “디자인을 통한 성공의 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오랫동안 이 길을 추구해 성공을 거둔 다른 기업의 사례를 좇아 경영의 방향을 다시 조정해가는 하나의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기자에겐 그가 말하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고, ‘가치’라는 단어도 여전히 애매했다. 기자의 고민를 이해한다는 듯 제흐 회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예술과 구별해야 합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면, 디자인은 타인과의 계약을 통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객관성을 요구하고, 남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즉, 예술가가 타협을 배제하는 ‘작품’을 만든다면 디자이너는 지적 타협을 해야 하는 ‘상품’을 만든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렇다면 이런 ‘상품’을 평가하는 디자인 가치는 어떻게 계량화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제흐 회장은 수년 전 자신이 개발한 레드닷 디자인상은 장기간의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디자인의 ‘기획 의도’와 ‘연속성(continuity)’을 중요하게 따진다고 답했다. 기획 의도의 경우 “제품 그 자체로 우수한 산업적 형태를 띄는가?”를 주로 평가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제품이 제 기능을 잘하도록 만들어졌는지를 따진다는 뜻이다. 예컨대 와 인잔의 모양·크기·직경이 와인의 맛(기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와인에 알맞은 글라스(제품)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단, 제품의 효용성과 품질의 최적화를 목표로 하되 디자인은 제품 개발 과정에 통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연속성을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구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연속성은 기업이 사업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지를,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품의 디자인이 실제로 연속성을 띄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개별 기업의 EBIT(이자 및 세전 영업이익)를 비교한다고 했다. 그는 “대개 10년을 기간으로 잡는데, 처음 5년과 나중 5년을 비교해보면, 실제로 제품이 이익을 내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BITDA(법인세 이자 및 감가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 보다 감가상각비나 무형자산상각비의 비중이 영업이익 규모에 비해 적기 때문에 규모가 다른 업체끼리 비교하기에도 적당하다고 했다.
 디자인상 중 가장 권위 있는 레드닷
수상자들이 훈장처럼 붙이는 레드닷 마크는 미술 경매에서 팔린 물건에 빨간 동그라미 모양 스티커를 붙이는 데서 착안했다.
제흐 회장이 직접 개발한 이같은 방법론은 세계 디자인상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위치에 레드닷을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널리 알려진 iF·IDEA와는 무엇이 다른걸까? 제흐 회장은 의외의 답을 내놨다. “레드닷과 IDEA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지요. 디자인상을 놓고 보자면, 레드닷과 iF가 독보적이라고 봅니다.” 이유를 묻자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IDEA는 미국 산업디자인협회(IDSA)와 공동으로 주관하는데, 평가가 인터넷상에서 이뤄집니다. 한마디로 제품의 ‘사진’만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레드닷과 iF의 디자인상은 다양한 응모 분야에서 시상하고 종합 평가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심사 위원단의 구성과 그 규모에도 큰 차이가 있다. 올해 레드닷은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만 세계 56개국에서 4928개의 작품이 출시됐고, 응모한 제품들은 25개국에서 38명의 심사 위원단(디자인 전문가로만 구성)이 평가했다. 이에 반해 iF는 5가지 응모 분야를 합쳐 전 세계 53개국에서 총 4783개 제품이 출품돼 전 세계 53명의 전문가(기업 관련 인사 포함)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평가를 받았다.

레드닷은 각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전문가들의 종합적인 평가를 통해 심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레드닷 디자인상을 받는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 혁신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선정된 최고 디자인 제품 수상작은 독일 에센에 있는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에서 1년 동안 특별 전시되고 책자로 발행하는 『레드닷 디자인 연감(Red Dot Design Yearbook)』 에 전문가의 품평과 함께 수록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레드닷의 1등상을 받은 모든 기업들은 앞으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는 것일까?

기자는 제흐 회장을 만나기 전, 레드닷 웹사이트에 공개된 최근 5년간의 ‘레드닷 디자인 랭킹’ 상위 15위 기업을 들여다봤다. 공교롭게도 이 중 한국·중국·대만 3개국이 90% 이상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자가 “산업 디자인은 미국과 독일이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랭킹을 보면 아시아 기업이 독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묻자 그는 “레드닷 디자인 랭킹’은 레드닷의 제품·커뮤니케이션·콘셉트 디자인의 3가지 부문 중 콘셉트 부문의 수상을 한 기업을 대상으로 순위를 매긴 것이다. 이같은 방식은 싱가포르와 공동으로 기획해 2005년부터 시작하게 됐다”고 답했다.

콘셉트 디자인 부문은 제품을 기획하기 이전 ‘창조적이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출품하는 분야다. 즉, 디자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자리와 같다. 제흐 회장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제품 디자인: 1950년~, 커뮤니케이션: 1993년~) 이 부문 시상식에 대해 “솔직히 처음 기획할 때는 성공여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했다. 서양은 디자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반면 아시아 기업이 이런 부문에 많이 참여하는 원인에 대해 제흐 회장은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가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최고경영자의 디자인 안목 중요해
기아차는 2009년 쏘울이 한국차 최초로 레드닷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수상한 이래, 7년 연속 수상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올해 본상을 받은 쏘울 EV. / COURTESY OF KIA
한국·중국·대만의 기업이 레드닷 디자인 랭킹에 자주 오르는 현상은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와 혁신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는 레드닷 디자인상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약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흐 회장은 “일등상을 받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살펴보면 디자인의 범위를 다양하게 확장했다는 면에서 세계적인 디자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잠재력보다는 이미 성공적인 디자인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어디일까?

한국의 가장 성공적인 예로 기아(KIA) 자동차를 꼽은 제흐 회장은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은 아주 완벽한 디자인 전략을 세웠다”면서 “품질 뿐만 아니라 K5로 시작해 K3·K7 등 라인업을 확대하며 브랜드를 안착시켰고, 디자인 아이덴티티까지 구축해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호평했다. 제흐 회장은 삼성에 대한 평가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누구나 삼성은 알지만 삼성 제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브랜드를 생각했을 때 관련 제품이 단번에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는 브랜드가 아니라 이름(name)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디자인 경영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애플’의 혁신적인 디자인은 예외적인 성공담이라고 딱 잘랐다. “흔히 좋은 디자인이 브랜드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브랜드는 성공적인 결과 그 자체일 뿐”이라며 “기업들은 단순히 다른 기업을 모방하기보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흐 회장은 한국의 대기업 중심 기업 문화가 디자인 경영을 하기에 어렵게 만든다는 진단도 내렸다.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디자인을 보는 관점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제품 판매 실적같은 ‘숫자’ 등을 통해 근시안적으로만 디자인에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고경영자가 디자인의 중요성을 “느끼고, 이해하고, 실천” 하는 게 관건인데 많은 경영진들은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전략에 대해 반신반의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부류의 경영자들은 디자인을 통해 성공의 길을 추구하고 전략을 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나 방법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디자인 관련 예산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제흐 회장은 마지막으로 디자인이 하나의 산업 분야를 넘어 제조·지식 서비스·창조 산업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이 시기 경영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디자인이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기업 활동 중심에 두는 전략은 보다 성공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 임채연 포브스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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