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오로지 최고만을 즐긴다

오로지 최고만을 즐긴다

명품 정장과 브레타 권총, 마티니를 빼면 본드는 그저 또 1명의 액션 주인공일 뿐이다. (왼쪽부터) ‘스펙터’의 한 장면, ‘골드 핑거’(1964)에서 션 커너리가 탔던 애스턴 마틴 DB5, ‘스펙터’의 애스턴 마틴 DB10.
명품 시계 업체 오메가의 초대로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007’ 영화 최신편 ‘스펙터’의 시사회를 봤다.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면서 팸플릿을 훑어보다가 ‘브랜드를 스크린 속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드립니다(We turn brands into screen icons)’라는 문구의 전면광고가 눈에 띄었다. ‘디지털 시네마 미디어(DCM)’라는 광고 회사에서 낸 광고다. 하지만 사치품을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하는 재주는 제임스 본드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

모든 장르의 드라마는 나름의 전통이 있다. 고전 연극의 3일치(시간·장소·행동의 일치)나 전형적인 복수 비극의 피로 얼룩진 결말이 그 예다. 본드 영화 역시 유명 브랜드의 향연이라는 전통을 고수한다.

모든 ‘007’ 영화는 예외 없이 제목이 나오기 전 활기찬 액션 장면이 한바탕 지나가고 한 과대망상증 환자(말투에 외국 억양이 살짝 섞이는 경우가 많다)가 등장해 대규모 파괴를 위협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대도시 폭파 장면이 나오고 새로 고안된 신기한 도구와 장치가 줄줄이 선보인다. 또 제임스 1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수준의 섹스와 폭력 장면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각종 상품이다. 본드를 본드답게 만들어주는 라이프스타일의 장비다. 고급 야회복 재킷과 애스턴 마틴 승용차, 브레타 권총, 보드카와 마티니를 빼면 본드는 그저 또 1명의 액션 주인공일 뿐이다. 그래서 본드 시리즈는 고전과 현대의 명품 브랜드를 다른 어떤 영화보다 환영하는 작품이 됐다.

작품 속 광고(product placement)는 본드 영화의 친숙하고 만족스런 흐름에 총격전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세심하게 짜인 자동차 추격 장면부터 이국적인 배경, 육박전과 성적 유혹의 대목까지. ‘스펙터’는 오메가 시계와 애스턴 마틴 자동차, 레인지 로버(SUV)와 볼링어 샴페인, 톰 포드 정장과 선글라스(특히 본드가 오스트리아에서 썼던 제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줄 것이다. 크로켓 & 존스 구두와 소니 휴대전화, 벨베데레 보드카와 브루넬로 쿠치넬리 가죽 재킷, N 필 스웨터와 선스펠 사각팬티, 글로브-트로터 여행가방과 질레트 면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본드의 공식 면도기는 질레트 플렉스볼이다.

난 ‘스펙터’에서 본드가 면도하는 장면을 놓쳤다. 하지만 영화 개봉 전 상품 광고를 통해 007이 어떤 면도기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사전 광고의 전통은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인번호’(1962) 개봉 이전에 나온 스미르노프 보드카 광고가 그 시초다. 이 광고는 사람들이 ‘007’ 영화를 잘 몰랐을 때 나왔기 때문에 배우 션 커너리가 본드 역에 완벽하게 어울려 캐스팅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걸어 다니고 말을 하며 사람을 죽이는 카탈로그 모델같은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는 영화 시리즈보다 먼저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소설에서부터 탄탄하게 형성됐다. 상영 시간이 2시간 30분이나 되는 최신작 영화 ‘스펙터’에서 제시하는 호화스런 생활은 플레밍의 세계관을 훌륭하게 반영한다. 로버트 마컴이라는 필명으로 본드 소설을 발표해온 킹슬리 에이미스는 이 현상을 ‘플레밍 효과’라고 부른다.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힘이다. 플레밍 효과는 물질 세계에 정통한 플레밍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20세기 영국 작가 앤서니 버저스는 “사람보다는 물질에 정통한 것이 플레밍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플레밍은 유명상품 마니아였다. 일상용품의 상표명까지 작품 속에 언급할 정도다. ‘문레이커’ 1장 다섯째 줄에 전기 선풍기 브랜드 ‘벤탁시아’가 처음 등장한다. 플레밍은 풍족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그의 소설들은 빈티지 와인과 호화스런 케이스 안에 담긴 특별한 담배에 대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흥미롭게도 플레밍은 본드가 입는 옷의 브랜드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상표보다 옷의 재단과 원단에 초점을 맞췄다(소설이 나올 당시에는 기성복보다 맞춤 양복이 유행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플레밍은 본드보다 악당들의 옷에 훨씬 더 세심하게 신경 썼다.

‘문레이커’의 악당 드랙스가 입은 옷은 이렇게 묘사됐다. ‘그는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짙은 청색의 가벼운 플란넬 정장을 입었다. 단추가 두 줄로 된 상의에 칼라가 빳빳한 두꺼운 흰색 실크 셔츠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회색과 흰색의 작은 체크 무늬가 들어간 점잖은 넥타이를 맸다. 수수한 커프스 단추는 카르티에 제품처럼 보였으며 검정색 가죽 줄이 달린 파텍 필립의 금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당은 ‘산다볼 작전’의 조연 악당 캐릭터 리피 백작이다. ‘그는 재단이 잘 된 베이지색 헤링본 무늬 트위드 재킷을 입었다. 앤더슨 앤 셰퍼드의 제품처럼 보인다. 그 안에는 흰색 실크 셔츠에 검붉은색의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매고 비쿠냐 울로 짠 듯한 부드러운 암갈색 V넥 스웨터를 입었다.’ 리피 백작은 또 샤르베(프랑스의 명품 셔츠 메이커, 76쪽 참조)의 셔츠를 좋아하고 보라색 벤틀리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플레밍은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의 첫 줄에 ‘비밀요원의 삶에는 매우 호화스런 순간들이 있다’고 썼다.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가라면 누구든 인생의 더 좋은 것들을 즐길 줄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또 플레밍이 악과 아름다움의 추구를 나란히 놓은 것은 그의 첫 소설이 출판된 1953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폭력적인 미치광이들이 세상을 위협해도 아름다운 시계와 빠른 자동차, 멋진 정장과 질레트 플렉스볼 같은 위안을 주는 것들은 언제나 있다는 사실이다.

‘스펙터’에서 본드는 여자친구에게 ‘템퍼스 퓨지트(tempus fugit, 세월은 유수와 같다)’라는 라틴어 구절을 말한다. 악당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크리스토프 월츠)에게 오메가 시계 폭탄을 던지라는 암호 지시다. 시사회가 끝나고 앨버트 홀을 나오면서 또 다른 라틴어 문구가 떠올랐다. ‘카르페 디엄(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앨런 베이츠 주연의 1964년 영화 ‘오로지 최고일 뿐’의 한 구절도 생각났다. “썩어서 악취가 나는 세상에도 기막히게 좋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 NICHOLAS FOULKES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 日기시다 "북일 간 성과를 내는 관계 실현은 쌍방 이익에 합치"

2삼성 반도체 매출 세계 1→3위로 추락…인텔·엔비디아 선두로

3“먹는거 아닙니다, 귀에 양보하세요”…품절대란 ‘초코송이’ 이어폰 뭐길래

4마침내 ‘8만전자’ 회복…코스피, 2800선 돌파 기대감 ‘솔솔’

5최태원 SK 회장 둘째딸 최민정, 美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차렸다

6 이재명 인천 유세현장서 흉기 2개 품고 있던 20대 검거

7영천 최무선과학관, 새단장하고 오는 30일부터 운영 재개

8조각 투자 플랫폼 피스, ‘소비자 추천 글로벌 지속가능 브랜드 50′ 선정

9어서와 울진의 봄! "산과 바다 온천을 한번에 즐긴다"

실시간 뉴스

1 日기시다 "북일 간 성과를 내는 관계 실현은 쌍방 이익에 합치"

2삼성 반도체 매출 세계 1→3위로 추락…인텔·엔비디아 선두로

3“먹는거 아닙니다, 귀에 양보하세요”…품절대란 ‘초코송이’ 이어폰 뭐길래

4마침내 ‘8만전자’ 회복…코스피, 2800선 돌파 기대감 ‘솔솔’

5최태원 SK 회장 둘째딸 최민정, 美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