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제트셋족을 위한 신비스런 가방

제트셋족을 위한 신비스런 가방

패션 디자이너로도 활동하는 힙합 아티스트 패럴 윌리엄스가 무아나의 ‘폴린’ 여행가방을 들고 있다. 그는 무아나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증기기관차 시절의 여행가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핸드백 라인을 개발했다.
몇 년 전 제트셋족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을 쓰면서 비행기 여행이 동경의 대상이던 시절이 떠올랐다. 비행기 여행이 보편화된 지금은 그 신비감과 즐거움이 없어졌다. 또한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커다란 플라스틱 여행가방들이 줄줄이 늘어선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는 요즘 비행기 여행의 미학적 둔감성을 증명하는 듯하다. 요즘은 하드케이스 가죽 여행가방(hard-sided suitcase)과 장롱 겸용 트렁크(wardrobe trunk)는 시대극 영화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행수단의 발달이 흥미로운 여행가방의 탄생으로 이어져 왔던 걸 생각하면 요즘의 상황은 매우 유감스럽다. 철도여행은 여성용 핸드백과 포개놓거나 좌석 밑에 넣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옆면이 납작한 여행가방을 탄생시켰다. 또 자동차 여행은 발판 겸용 트렁크와 스페어 타이어 트렁크 등 재미있는 형태의 가방들을 등장시켰다.

비행기 여행 초창기의 여행가방은 저마다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다. 작품 속 광고의 대가인 작가 이언 플레밍은 ‘007’ 소설 ‘포 유어 아이즈 온리’에서 팬아메리칸 오버나이트 백(팬암 항공사에서 1등석 승객에게 제공하던 여행가방)을 ‘열대지방 여행의 새로운 필수품’이라고 소개했다.

요즘은 비행기 여행의 매력과 참신함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난 승객들 각자가 특색 있는 기내용 가방으로 그 묘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무아나(Moynat) 여행가방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던 이유도 그래서다.

오트 퀴진과 오트 쿠튀르가 있는 프랑스에서는 무아나 같은 최고급 피혁제품을 칭하는 말도 따로 있다. 오트 마로키너리(haute maroguinerie)다. 무아나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대다수가 그랬듯이 나폴레옹 3세 시대에 창업했다. 발자크와 에밀 졸라의 후기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당시 프랑스인의 미친 듯한 과소비 풍조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무아나의 창업자 폴린 무아나는 아름다운 백과 여행가방 등 다양한 형태의 고급 가방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일조했다.

무아나의 전성기 시절 몽마르트르의 공장에는 250명의 장인이 있었다. 이 회사는 19~20세기 초 명품 브랜드에 요구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세계박람회와 전시회에서 다수의 메달을 획득했다. 1925년 파리에서 열린 ‘현대 장식 미술 및 산업 미술 국제 박람회’에서는 금메달 5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를 받았다. 또 1905년부터 꾸준히 파리 모터쇼에 출품하면서 패셔너블한 자동차와 잘 어울리는 여행가방이라는 이미지를 굳혔으며 자동차 업체들로부터 대량의 맞춤형 여행가방 주문을 따냈다. 그리고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이동식 주방(스토브와 6인 가족을 위한 식탁 포함) 등 기발한 제품들도 개발했다.

1900년대 초반은 주문 제작되는 자동차들이 맞춤형 여행가방을 필요로 하고, 원양 정기선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데 거의 일주일이 걸려 장롱형 트렁크에 갈아입을 옷 여러 벌을 챙겨 넣고 다녀야 했던 시절이다. 또 여행객은 그 무거운 짐을 옮기기 위해 유니폼 입은 짐꾼과 운전기사에 의존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무아나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점보제트기의 보급으로 항공여행이 보편화된 1976년 무아나는 문을 닫았다. 이 회사는 그로부터 35년 후인 2011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마치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무아나는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며 이제 새로워진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 경제위기가 최악으로 치닫던 당시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아나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프랑스 최고 부자인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새 소유주가 됐다는 사실이다. 아르노 회장(그의 지주회사는 수십 개 명품 브랜드의 주요 투자자다)은 무아나를 명품 여행가방의 실험실로 만들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메시 나이르가 이 비밀 실험실을 지휘했다.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무아나를 인수해 명품 여행가방의 산실로 만들었다.
나이르는 매력적인 괴짜다. 냉소적인 영국식 유머 감각을 지닌 그는 최고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극소량의 초고가 가방을 만드는 일에 소년 같은 열정을 품고 있다. 이 모든 일이 파리 생토노레 거리의 공방에서 일어난다.

그의 임무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수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회사 고유의 스타일을 부활시키고 과거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되살려 현재에 맞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아나 특유의 ‘고양이 혓바닥 모양 자물쇠’와 ‘가죽을 씌운 금속 손잡이’를 되살렸다.

단지 모양만 흉내 낸 게 아니라 재료와 공정도 고유 방식을 따랐다. 나이르는 특별한 질감을 살린 숫송아지 가죽과 광택이 좋은 고급 송아지 가죽 등 무아나 특유의 재료를 사용한다. 그뿐 아니라 예전의 무아나 장인들이 그랬듯이 공정 하나하나에 광적일 정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소비자가 알아볼 수 없는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다. 딱딱하지 않은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만들 때는 고무 호스 대신 천으로 된 끈을 안에 넣고 가죽으로 감싼다.

단단한 손잡이를 만들 때는 금속 테를 안에 넣고 얇은 가죽 여러 겹을 덧댄다. 그런 다음 손에 잡기 편안한 둥근 형태가 나올 때까지 눌러서 단단하고 매끈하게 다듬는다. 지퍼 머리 부분은 안쪽에 다는 것이라도 모두 수작업으로 착색한다. 테두리 장식은 나일론 끈이 아니라 면 실을 안에 넣고 가죽으로 감싸서 만든다. 소비자로서는 가방이 오래돼 낡기 전에는 알아볼 수 없는 디테일이다.

무아나의 가방은 이렇게 여러모로 세심하게 신경 써서 제작되는 만큼 낡아서 수선이 필요할 때까지 쓰고 싶어지는 제품이다. 지퍼와 꼭 필요한 철제 버클을 제외하곤 금속가공물을 철저히 배제한 기적의 산물이다(내 생각엔 번쩍거리는 금속이 보이지 않는 게 이 브랜드의 품질을 말해주는 것 같다). 손잡이를 가방에 달 때도 눈에 보이는 금속 장식을 이용하지 않고 손잡이의 가죽 부분을 가방 위쪽의 찢어놓은 틈새로 통과시켜 연결한다. 그런 다음 가느다란 금속 막대들을 가죽과 안감 사이에 넣어 손잡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한다.

어깨끈 연결 부분에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D자 모양의 투박한 금속 링 대신 가죽 고리들을 이용하는 데 그중 하나는 옆 주머니 뒤쪽으로 밀어 넣도록 돼 있다. 가방 본체와 바깥 주머니 사이에 갈라진 틈 같은 공간이 있는데 여권이나 휴대전화 등을 꺼내기 쉽게 보관하는 곳이다. 바깥 주머니는 나이르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오래된 무아나 군용 가방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기발한 구조는 여행용 가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남성용 백과 서류가방의 중간쯤 되는 개념으로 사실상 가방의 앞판을 없애고 3종의 주머니(지퍼형과 개방형, 군대 배낭처럼 끈으로 묶는 형)가 그 자리를 채운다.

난 남성용 백을 좋아하지 않지만 최근 파리 패션 주간에 이 가방을 보고 반했다. 활동적인 패셔니스타를 위해 만들어진 듯 보였다. 지퍼형 주머니는 아이패드용, 파우치형 주머니는 휴대전화와 개인 소지품용, 개방형 주머니는 각종 초대장 보관용으로 사용하면 좋겠다.

그동안 무아나 제품들을 눈여겨봤는데 이 가방을 놓친 걸 보면 그다지 세심하게 보진 못한 듯하다. 이 제품이 공식적으로 출시됐느냐고 묻자 무아나 제품에는 ‘출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생산량이 워낙 적다 보니 제품이 생산되자마자 상점에 나오고 곧 어느 고객의 손에 들어간다.

- NICHOLAS FOULKES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중동 이슈에 출러이는 亞증시…달러·유가만 '고공행진'

2'2000명 증원' 물러선 정부 "내년 의대 신입생 자율모집 허용"

3중동서 전쟁 확산 우려에 국내 건설사들…이스라엘·이란서 직원 철수

4크로커다일 캐리어, 국내 최다 4종 캐리어 구성상품 런칭

5이스라엘-이란 전쟁 공포 확산에 환율 출렁…1380원대 마감

6노용갑 전 한미약품 사장,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으로

7KB금융, 홀트전국휠체어농구대회 지원…“장애인 인식 개선”

8SK하이닉스, 파운드리 세계 1위 ‘TSMC’와 협력…차세대 HBM 개발

9LG전자, 에어컨에 AI 탑재하니 판매량 30% ‘쑥’

실시간 뉴스

1중동 이슈에 출러이는 亞증시…달러·유가만 '고공행진'

2'2000명 증원' 물러선 정부 "내년 의대 신입생 자율모집 허용"

3중동서 전쟁 확산 우려에 국내 건설사들…이스라엘·이란서 직원 철수

4크로커다일 캐리어, 국내 최다 4종 캐리어 구성상품 런칭

5이스라엘-이란 전쟁 공포 확산에 환율 출렁…1380원대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