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왜 유연근무제인가] 저출산 극복-노동생산성 개선에 특효약

[왜 유연근무제인가] 저출산 극복-노동생산성 개선에 특효약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73%가량인 생산가능인구가 2040년이면 56%로 줄어들 전망이다.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국내 가임여성 1인당 평균 출생아 수가 세계 최하위권(1.21명)인 영향이 크다.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긴 어려운 탓에 출산을 꺼리거나 일을 그만두기 일쑤다. 국내 30대 기혼여성 10명 중 4명은 이른바 ‘경단녀’였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열악한 노동환경도 저출산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국내 전체 취업자의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2위였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할 탈출구는 없을까? 유연근무제 활성화가 해법이 될 수 있다. 국내외 사례를 중심으로 유연근무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봤다.
저출산 문제로 고심 중인 정부는 지난해부터 일과 삶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근로문화를 만들자는 ‘일가(家)양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연근무제 활성화도 그 일환이다. 12월 1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일가양득 협약식에서 이재흥 고용노동부 고용정책실장 등이 일가양득 실천을 위한 젠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울 강남에서 일하는 직장인 박혜연(34)씨는 유치원생 아이를 둔 ‘워킹맘’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9시까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일로 시작된다. 회사 동료들이 모두 출근해 있을 시간이지만 부담은 없다. 출근시간을 오전 10시로 늦추는 대신 퇴근시간도 오후 7시로 늦춘 유연근무(柔軟勤務)를 하고 있어서다. 박씨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외국계 회사라서 가능한 일 같다”며 “나뿐만 아니라 스무 명 정도의 동료가 출퇴근시간을 조정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정학사전]을 펴낸 이종수 한성대 명예교수는 유연근무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정한 시간과 장소, 형태를 요구하는 정형화된 근무제도에서 탈피한 신축적인 근무제도.’ 이런 유연근무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박씨처럼 자신이 편리한 시간에 회사에 나가 근무하는 유연출퇴근제 외에도 하나의 일자리를 두 명 이상이 나눠 갖는 일자리공유제, 일일 근무시간을 길게 갖는 대신 추가로 휴일을 받는 집중근무제, 일정 기간 동안만 근무시간을 줄여 갖는 한시적시간근무제 등이다. 회사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만 근무하는 재택근무제도 유연근무제의 한 유형이다.

유연근무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 진행된 지는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국은 걸음마 단계다. 국내 30대 그룹 중 삼성과 SK, LG, 롯데 등의 주요 계열사 15곳이 이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일부 직군 위주로만 혜택을 누리고 있다. 롯데그룹이 그간 계열사 10여 곳에서 시행하던 유연근무제를 올해 말까지 모든 계열사로 확대 시행하기로 한 게 눈에 띄는 점이다. 아직은 이름난 대기업이나 일부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 아니고서는 유연근무를 꿈도 꾸기 어렵다. 충남 천안에서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하모(32)씨는 “회사에서 주말에 근무하러 나오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며 “그나마 특근 수당도 없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사정이 이런 가운데 정부는 유연근무제 활성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10년 일부 공공기관에 유연근무제를 시범 도입한 이후 매년 도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까지 국내 전체 공공기관에서 유연근무제를 택한 인원은 총 4만2455명으로 전년 동기(3만3925명) 대비 25% 늘었다. 행정자치부는 지난 9월 정부부처 중 최초로 시간 선택형 유연근무제를 전 부서로 확대했다. 주당 40시간인 전체 근무시간은 그대로 두고, 하루 일과는 4~12시간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도 유연 근무제 참여 인원을 해마다 늘리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
유연근무제는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고 직장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유용한 제도 가운데 하나다. 한국은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960년 국내 가임여성 1인당 6명이던 평균 출생아 수는 지난해 1.21명으로 급감했다. 세계 190여개국 가운데 도시 국가인 홍콩(1.20명)과 마카오(1.19명)를 빼고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현재 국내 전체 인구의 73%가량인 생산가능인구가 2040년에는 56%로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2040년 국민 1인당 짊어질 복지비 부담이 최대 491만원(최소 164만원, 올해 현재 137만~366만원)에 달할 전망이다. 저출산 문제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후대의 사회적 부담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젊은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아니 낳지 않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투명한 미래, 자녀 교육 부담 등도 있겠지만 워킹맘으로 생활하기 버겁기 때문이다. 직장인 이현정(28)씨는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사실상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육아를 비롯한 가사(家事)보다는 오직 회사 일에만 전념하는 구성원을 선호하는 조직문화가 뿌리 깊게 박힌 한국에서는 일과 육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얘기다.

과연 이씨만의 생각일까.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국내 30대 기혼여성 10명 중 4명은 이른바 ‘경단녀’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경력 단절 여성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15~54세 기혼여성의 21.8%인 205만명이 경단녀다. 특히 임신과 출산, 육아에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30대 경단녀가 109만명이었다. 전체 경단녀의 53.1%이자 30대 기혼여성의 37.5%였다. 이들은 직장을 그만둔 이유로 결혼(36.9%), 육아(29.9%), 임신 및 출산(24.4%)을 차례로 꼽았다.

문제는 한 번 경력이 단절되면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력 단절 기간에 대해 응답자의 25.3%가 10~20년, 24.2%가 5~10년이라고 답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00~2013년 사이에 한국 기혼여성들의 경력 단절로 든 사회적 비용이 180조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남편 혼자 버는 외벌이로는 가뜩이나 먹고 살기 팍팍한데, 아이를 낳으려면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하니 출산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혼여성이 일하면서도 육아를 병행할 수 있게끔 근무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2월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저출산 극복을 위한 경제계 실천 선언식’에서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라며 “당장 2017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내수 부진, 노동력 부족으로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실천하려면 기업의 인식·문화·제도가 변해야 한다”며 “결혼 후에도 장시간의 근로로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기 어려워 (기혼여성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기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저출산이나 기혼여성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유연근무제는 한국의 남성 근로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른바 ‘헬(Hell)조선’ 담론은 한국 사회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옥 같은 한반도라는 뜻으로, 삶의 질을 포기하게 하는 한국의 노동환경 등을 종합해 풍자한 신조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체 취업자의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2124시간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중 2위(1위는 멕시코, 2228시간)였다. 34개국 평균치가 1770시간이었으니, 주당 평균 6.8시간은 더 일하는 셈이다.

근로자들이 그렇게 힘들게 일한 한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조4495억 달러(약 1700조원)였다. 같은 기간 한국 보다 훨씬 적게 일한 독일의 GDP는 3조8526억 달러(약 4600조원)로 한국의 2.7배 수준이었다. 지난해 독일의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1371시간에 불과했다. 한국 전체 취업자가 1년 중 8개월만 일한 수준이다. OECD 전체로 봐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5위로 하위권이었다. 이를 보면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근로자들이 훨씬 많이 일하고도 생산성은 크게 못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근로자가 더 집중해 일할 수 있도록 근무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한다면 시간 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긴 근무시간으로는 한국에 뒤지지 않던 일본이 최근 정부 차원에서 재계에 유연근무제 도입을 주문하고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찌감치 유연근무제 활성화에 나섰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해 가임여성 1인당 출생아 세계 최하위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유연근무제에 참여한 서울시 직원 917명 중 앞으로도 유연근무를 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87.4%에 달했다. 특히 영유아 자녀를 둔 직원의 97.2%는 계속 참여할 의사를 나타냈다. 유연근무제에 만족하면서 일하는 근로자가 늘어날수록 생산성도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4월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이기우 원장은 “직원 개개인의 책임감에 맡기는 자율적 근무가 가능해져 더 창의적인 연구활동이 이뤄질 수 있게 됐다”며 “유연근무제 도입 이전보다 연구생산성이 개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이창균 기자 lee.changkyun@joins.com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스마일게이트 오렌지플래닛, 올해 상반기 19개 스타트업 선발

2CJ ENM, 빌보드와 MOU 체결…“K-POP 글로벌 영향력 확대 기대”

3LG유플러스, 1020대 겨냥한 실속형 스마트폰 ‘갤럭시 버디3’ 단독 출시

4中, 1분기 경제성장률 5.3%… 예상치 상회

5대구은행, 중소·사회적기업 대상 퇴직연금 수수료 감면 확대

6스마트폰처럼 맘대로 바꾼다...기아, ‘NBA 디스플레이 테마’ 공개

7‘이스라엘의 對이란 보복 공격’ 쇼크…증권가 “금융시장 불안 확산”

8한국토요타, 車 인재양성 위해 13개 대학·고교와 산학협력

9한 총리, 오후 3시 의대증원 관련 브리핑…조정 건의 수용할 듯

실시간 뉴스

1스마일게이트 오렌지플래닛, 올해 상반기 19개 스타트업 선발

2CJ ENM, 빌보드와 MOU 체결…“K-POP 글로벌 영향력 확대 기대”

3LG유플러스, 1020대 겨냥한 실속형 스마트폰 ‘갤럭시 버디3’ 단독 출시

4中, 1분기 경제성장률 5.3%… 예상치 상회

5대구은행, 중소·사회적기업 대상 퇴직연금 수수료 감면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