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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경영 9단의 조건

[정수현의 바둑경영] 경영 9단의 조건

일본 마쓰시타전기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 사진:중앙포토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9단’이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정계의 고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일본에서는 [정치 9단]이라는 만화도 나왔다. 이 예처럼 9단은 어떤 분야의 최고수를 상징하는 용어로 쓰인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도 9단이 있을까? 경영 분야에서는 경영의 잘잘못을 얘기하지만 능력의 수준을 특별히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경영에도 고수가 있을 것이다. 허술한 기업을 알짜배기 회사로 만든 CEO나 조그만 업체를 글로벌 기업으로 만든 경영자를 경영 9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둑의 품계에 따른 경영자의 등급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바둑 기술의 9단계:
실력으로 승부가 분명하게 갈리는 바둑에서는 기력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아마추어들은 보통 18급에서 시작해 7단까지 올라갈 수 있다. 실력의 단계가 무려 25개의 수준으로 나뉜다. 이와는 별도로 프로기사들은 초단에서 9단까지 나눠져 있다. 오늘날에는 이세돌·박정환 같은 신진 고수들의 등장으로 프로 단위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렇지만 단위를 구별하는 제도는 존속되고 있다. 관례적으로 바둑에서는 프로, 즉 전문가의 수준을 9단계로 나눈다. 각 단계에는 재미있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각 단계의 특징을 나타낸다.



1단 수졸(守拙): 졸렬하게나마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음

2단 약우(若愚): 어리석은 것 같지만 나름의 실력을 갖춤

3단 투력(鬪力): 싸워야 할 상황에선 싸울 수 있음

4단 소교(小巧): 작은 기교를 부릴 줄 앎

5단 용지(用智): 지혜를 사용할 줄 앎

6단 통유(通幽): 깊고 그윽한 경지로 통함

7단 구체(具體): 모든 것을 갖추어 완성에 이름

8단 좌조(座照): 가만히 앉아서 꿰뚫어봄

9단 입신(入神): 신의 경지에 이름
이렇게 9단계로 나눈 것을 ‘위기구품’이라고 한다. 위기구품은 고대중국의 바둑이론서인 [기경13편]에 나온다. 옛날 중국에서는 바둑 단위제도가 없었지만, 이렇게 9품으로 구별하여 실력을 구별했다. 이것을 이어 받아 오늘날의 프로기사의 단위 면장 즉 라이선스에는 여기에 나오는 이름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프로 초단이 되면 ‘수졸’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인 9단을 ‘입신’ 즉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다. 동서식품에서 후원하는 9단들의 타이틀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입신최강전’이다. 입신이란 말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수는 거의 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영 능력의 9단계:
경영자의 능력도 수준에 따라 단계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경영자의 능력은 조직관리, 리더십, 의사결정, 전략선택, 마케팅관리 등 여러 면이 있지만 이것을 종합하여 실력을 구분해 볼 수 있다. 크게 경영의 고수와 하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나 좀 더 세분화해 볼 수도 있다. 위기구품을 토대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1단: 졸렬하지만 경영자로서의 자격을 얻은 상태

2단: 어리석은 듯하지만 지모를 부릴 수 있는 수준

3단: 힘이 붙어 싸워야 할 상황에서 싸울 수 있음

4단: 작은 기교, 즉 전략적 행보를 할 수 있음

5단: 경영을 하는 데 있어 지혜를 쓸 줄 아는 단계

6단: 경영의 깊은 맛을 이해하는 단계

7단: 경영에 관한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단계
다소 추상적이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경지가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이 중 어느 단계에 속하는가? 만일 5단인 ‘용지’ 수준만 되어도 경영자로서는 상당히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올라가 7단인 ‘구체’의 단계에 이르면 사실 뛰어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경영에 관한 여러 가지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보다 더 높은 수준도 있다.



8단: 가만히 앉아서 사태를 꿰뚫어보는 단계

9단: 신의 경지에 도달한 단계
8단인 ‘좌조’는 직접 현장에 가지 않고도 사무실에 앉아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꿰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 되어야 회사의 경영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9단은 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말한다. 경영에서 신의 경지라면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회사의 방향을 미리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타 고노스케 같은 경영자를 9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구품의 시사점:
바둑의 9단계에 따라 경영자의 수준을 9품으로 나눠보았다. 경영자의 수준을 정확하게 9품에 대입하기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자신의 경영능력이 어느 수준인지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영구품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우선 경영에도 실력이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경영자의 수준에 따라 고수다운 경영을 할 수도 있고 하수의 경영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업을 하수처럼 경영한다면 도산의 위험에 처하기 쉬울 것이다. 깨어진 대마불사의 신화를 만들거나, 괴로운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할 수도 있다. 하수와 같은 판단이나 수읽기로는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을 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경영자들은 자신의 경영스킬을 계속 향상시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바둑에서 프로기사들은 최소한 통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실력을 연마한다.

경영자들이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자신의 경영능력이 수졸이나 약우 수준인데도 마치 구체나 좌조의 수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 자만심으로 인한 패착을 둘 수 있다. 5, 6단 수준인 사람도 마치 자신이 경영의 신인 양 생각하다가 오판을 하는 수가 있다. 한편, 입신의 경지라는 9단도 사실은 완벽하지 않다. 바둑에서 9단이 되어도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초보자나 범할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입신이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는 심심치 않게 나온다. 경영의 신이라고 해도 이런 실수를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 9단이라고 해도 겸손한 자세로 신중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경험에서 오는 감으로 결정을 하면 ‘고수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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