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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인가 사기꾼인가

영웅인가 사기꾼인가

소리넷 그룹의 계열사 케슘항공 비행기 앞에 선 바바크 잔자니. 그는 석유수출 대금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사형이 선고됐다.
야심만만했던 이란의 억만장자 바바크 잔자니는 지난 3월 6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한때 이란 경제의 총아였던 그는 지난 2년 동안 수도 테헤란의 에빈 교도소에 갇혀 세계의 관심사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충격적인 사형 선고를 계기로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잔자니는 무명인사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이란 정부에 ‘불법’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사상 최대의 돈세탁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의 몰락 역시 급작스럽고 잔인했다.

잔자니는 이란이 직면했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를 해결한 걸물이었다.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고집스럽게 추진하자 서방은 국가 경제를 붕괴할 정도로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금수 조치로 최대 수입원인 석유를 수출할 길이 막혔다. 그런 막다른 상황에서 잔자니는 제재를 교묘히 우회해 이란산 석유를 세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도록 거래를 주선하면서 개인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2012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그를 제재 대상에 올리면서 잘 나가던 그의 사업은 순식간 무너졌다. 이란의 정권 교체 후 잔자니는 국고에서 27억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제 그는 이란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가장 큰 범죄를 지칭하는 ‘지상천하의 부패’ 혐의로 유죄가 확정돼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란에서 사형은 주로 교수형이다.

2013년 말 잔자니가 구속된 후 나는 수 개월에 걸쳐 그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다. 이란과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의 업계 소식통과 분석가, 외교관과 가진 인터뷰 등 언론 보도를 샅샅이 훑었다. 그는 타지키스탄, 아랍에미리트, 터키에서도 사업을 벌였다. 구속되기 전인 2013년 초 39세였던 그는 이란 잡지 아세만에서 재산이 135억 달러에 이르며 은행·항공사·화장품회사 등 6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사업제국을 운영한다고 자랑했다. 물론 잔자니가 서방 제재의 허점을 이용한 유일한 이란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방면의 최고 권위자였다.

미국 정책연구소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선임연구원으로 잔자니를 오랫동안 추적한 에마누엘레 오톨렌기는 “서방의 가혹한 제재로 극도로 열악해진 경제 환경에서도 이란이 쓰러지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사실 잔자니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 “그의 수완은 특출했다. 어느 누구보다 더 효율적으로 재빨리 이란 정부에 도움을 줬다.”

일부 이란인에겐 잔자니는 만연하는 부패와 정실주의의 상징이었다. 겸허가 미덕인 이란에서 그는 엄청난 부를 과시했다. 갑자기 통화 가치가 40% 하락하고 우유 가격이 2배로 오르는 등 이란 국민이 서방의 제재로 고통 받는 동안 잔자니는 최고가 롤렉스 시계를 차고 고급 승용차와 전용 비행기를 타면서 사진 포즈를 취했다.

그는 젊은 나이 탓에 1979년 이란 혁명이나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에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대신 이란에서 부와 명예를 얻는 다른 유일한 길을 택했다. 최정예 부대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혁명수비대에 든든한 연줄을 댔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당시 혁명수비대는 이란 경제를 완전히 장악했다. 겉으로 허약하고 상냥해 보이던 잔자니는 하산 미르카제미(2009년 녹색운동 시위자 구타 사건으로 악명 높은 정권 내부자)와 사이드 모르타자비(고문과 살해를 일삼았다고 알려진 검사) 같은 수상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일부 이란인은 잔자니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영화 감독과 프로축구단에 거액을 투자하는 등의 제스처로 호사만 추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경제의 바시즈(이란 보수 세력의 핵심층인 혁명수비대 소속 민병대)’를 자칭하며 자신이 알라의 과업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 이란의 양대 일간지 독자들은 그를 ‘올해의 인물’ 3위로 선정했다(하산 로하니 신임 대통령과 외무장관 다음이었다). 잔자니는 아세만 잡지에 “내가 한 모든 일에 알라의 도움이 있었다”며 “내 인생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테헤란 빈민가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시장에서 보석을 팔다가 이란 중앙은행 총재의 운전기사로 발탁됐다. 총재는 그에게 시장에서 환전 사업을 맡겼다. 시장과 공식 환율 사이의 차이가 컸던 1990년대 환전업으로 많은 젊은이가 한몫 잡았다.

잔자니는 그 돈으로 인스턴트 커피와 치약을 수입하는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곧 그는 더 큰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국제적인 연줄을 동원해 혁명수비대가 운영하던 엔지니어링 업체 하탐 알-안비야가 9000만 달러어치의 석유 주문을 받도록 중개하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당시 이란 석유장관 로스탐 가세미가 그를 주목했다.

서방의 이란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가세미 장관에겐 거액의 자금을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고 갈수록 비판받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정부와 기꺼이 손잡으려는 인물이 필요했다. 하와이대학의 이란 문제 전문가 파리데 파리 교수는 “아마디네자드 정부에서 석유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경제장관 등 막강한 실력자들이 비공식적으로 잔자니에게 석유 판매 중개권을 줬다”고 말했다.

잔자니는 6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소리넷 그룹을 통해 석유 수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소리넷 계열사 중 일부는 합법적인 회사였지만 나머지는 위장업체였다. 잔자니는 1만7000명을 고용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규모의 회사는 찾을 수 없었다. 잔자니의 한 여동생은 고급 양식당인 VIP 소리넷을 운영한다. 그녀는 나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소리넷 그룹 소속 자니스 그룹으로 등록된 테헤란 교외의 주소지로 찾아갔을 때 그곳엔 투박한 철문과 녹슨 물탱크가 있는 3층짜리 주택이 있었다. 발코니에 서 있던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에게 물었지만 자니스 그룹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업체들은 조잡한 비주얼과 엉터리 영어로 소개된 웹사이트뿐이었다.
잔자니는 이란 정부가 석유를 수출할 수 있도록 여러 국가에 세운 위장업체를 통해 수출 대금을 돈세탁했다.
오톨렌기 연구원은 제재를 우회하는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불투명해 책임자를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잔자니가 친 그런 연막은 정부 돈을 횡령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오톨렌기 연구원은 “잔자니가 국제사회의 눈에 띄지 않게 이란의 흔적을 감추는 책략을 이란 정부를 속이는데도 사용한 듯하다”고 말했다.

2014년 초 나는 잔자니 제국의 본거지를 방문했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섬이었다. 해안 가까이 떠 있는 유조선이 내려다보이는 거리에 의심스런 사업가 여럿이 근엄하게 나다니는 것을 보면 고객은 그런 은밀한 곳을 선호하는 게 분명했다. 누구에게나 사업 내역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조세피난처와 같았다. 잔자니의 이름을 대자 몇몇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에 관해 아는 것은 전혀 없는 듯했다. 한 업계 소식통은 잔자니와 그의 측근들을 두고 “지독한 마피아 같았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의 조사에 따르면 라부안에 있는 이란 선박들이 한밤중에 수백만 배럴의 석유를 외국 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유조선으로 옮겼다. 잔자니는 말레이시아의 FIIB 은행 지분을 인수했다. 이란은 2012년 초 서방의 제재로 외국 은행과의 자금 거래에 필요한 국제은행간금융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됐다. 그러나 잔자니와 이란 관리들은 FIIB의 SWIFT 코드를 이용해 자금을 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타지키스탄으로, 다시 터키의 자회사로 송금했다. 터키에선 현금을 금으로 바꿔 주로 두바이를 거쳐 이란으로 밀반입했다. 그와 비슷한 다른 책략도 동원됐을 것이다. 아무튼 잔자니는 모두 합해 석유 2400만 배럴의 판매를 주선했다고 인정했다.

라부안의 이란 관련 업체에 대한 나의 조사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 일부 유조선은 글래머린이라는 회사가 임대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글래머린은 다른 위장업체를 통해 이란 국영석유회사(NIOC)와 연결됐다. 나는 한 법률회사에 소속된 글래머린 대리인을 찾아갔다. 그는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글래머린이 오프라인 사무실을 갖고 있는지 묻자 그는 “내가 아는 한 없다”고 했다. 글래머린의 직원이 있는지 물었을 때도 그는 똑같이 답했다.2012년 말 EU가 잔자니와 FIIB, 소리넷 그룹을 제재 대상에 올리면서 그의 사업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4월 미국도 그들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잔자니는 자금을 돌릴 길이 막혀 석유 수출 대금을 정부 계좌로 입금할 수 없었다. 이어 이란의 정치 바람이 달라지면서 마침내 그의 운도 다했다. 2013년 8월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부패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개혁 성향의 표를 휩쓸었다. 3개월 뒤 잔자니는 체포됐고 얼마 후 국고에서 약 27억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비잔 장가네 이란 석유장관은 서방의 제재 해제에 따라 외국 에너지 기업들과의 대폭 완화된 계약 조건을 공개했다.
잔자니는 그 돈을 정부에 돌려주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변호사 조레 레자이는 이란 정부가 잔자니에게 밀린 돈을 갚는 데 1년의 말미를 줬으면서도 기한이 4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그를 체포했다고 말했다. “이란에선 장관의 약속도 권위가 없는 것 같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바꾼다. 잔자니의 기소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란의 역대 정부를 위해 열심히 일한 은행가이자 사업가였다.”

잔자니의 기소는 이란에서 끊이지 않는 정치권력 투쟁의 일부이기도 하다. 현 정부는 적어도 공개적으론 아마디네자드 시대의 정실주의와 단절하려 한다. 잔자니는 그런 과정의 희생양이다. 로하니 대통령은 잔자니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를 원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래 사법부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법이다. 잔자니가 정부에 석유 수출 대금을 갚을 길이 없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파리 교수는 “추적되지 않는 돈을 손에 넣고 다른 목적으로 그 돈을 사용한 사람들이 잔자니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잔자니를 처형한다고 해서 이란 정부가 그 돈을 받을 순 없다. 그러나 그의 처형은 한 시대의 종식을 상징한다.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서방의 제재는 이제 말끔히 사라졌다. 잔자니가 사형 선고를 받는 바로 그날 서방의 이란 금수 조치가 풀린 후 처음으로 이란산 석유를 실은 유조선이 유럽에 도착했다.

- 수네 엥겔 라스무센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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