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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자라는 ‘분노의 포도’

이스라엘에서 자라는 ‘분노의 포도’

8개 이스라엘 정착촌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골란 하이츠 와이너리.
이스라엘 서안지구의 프사고트 유대인 정착촌에 있는 프사고트 부티크 와이너리(이하 프사고트)는 2개월 전 온라인 상점을 열었다. 프사고트 창업자 야코브 베리(39)는 “이스라엘의 좋은 점은 세계 곳곳의 동지(특히 미국 내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착촌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국제 바이어들에게 직접 판매함으로써 유럽 밖 시장으로의 진출을 꾀한다.

베리 창업자의 사업은 꽤 잘된다. 그가 생산하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국제 와인대회에서도 수상했다.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한창이던 2003년 문을 열었을 때 연간 생산량은 3000병에 불과했지만 2015년엔 25만 병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성장세에 제동이 걸렸다. 서안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상표 표기에 관한 유럽연합(EU)의 새 지침 때문이다. 베리 창업자는 “지난해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온라인 사업을 시작한 데는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철학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동안 세계 인권단체들과 반이스라엘 운동가들은 동예루살렘과 서안의 237개 유대인 정착촌 내 업체들에 대한 금수 조치를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이에 따라 최근 EU는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생산된 제품이 역내에 들어올 경우 (정착촌에서 생산됐음을 나타내는) 별도의 원산지 표기를 의무화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원산지 표기법은 과일과 채소, 와인 등에 적용된다. 따라서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산된 와인 병에는 ‘이스라엘 정착촌(Israeli settlement)’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상표를 붙여야 한다. 정착촌의 와인업체들(서안에 최소 30개가 있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다. 유대인 와인업자 대다수가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어떻게 하면 세계 곳곳에 와인을 팔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서안의 와인업자들은 기존 고객을 유지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방법을 모색한다. EU의 원산지 표기 지침을 피할 묘수도 궁리한다.

베리는 온라인 사업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우 간단한 논리”라고 말했다. “EU의 원산지 표기 지침에 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성서에서 지칭하는 서안지구)의 와인업체들이 그 결정 이후 판매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EU 지침을 ‘사악한’ 결정이라고 비난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생산한 와인 병에 원산지를 ‘점령지(occupied territories)’나 ‘이스라엘 정착촌’이라고 표시한 상표를 붙이지 않겠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그 와인이 어디서 생산됐는지 정확하게 쓸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수치심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골란고원의 유대인 정착촌(현재 50만 명 이상의 유대인 정착민이 거주한다)은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강제로 점령해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11일 EU가 새로운 상표 표기 지침을 발표했을 때 이스라엘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EU 관리들은 이 결정이 단지 기술적인 문제라고 설명했다. 소비자에게 제품의 원산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구매를 도와주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전체 수출 물량 중 정착촌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0.1%(2013년 이스라엘의 대EU 수출 물량 중 1.5%)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 관리들은 이 지침이 유대인에게 노란 배지를 달게 했던 나치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이 조치가 이스라엘 상품 전반에 대한 보이콧의 문을 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샤일로 정착촌에서 와인업체(샤일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아미차이 루리(49)는 이 상표를 편견이 아니라 명예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는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 ‘이스라엘 정착촌’ 상표를 붙이게 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그 상표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표시라고? 우리는 어차피 다르다. 내가 사는 곳은 바로 여기 정착촌이다. 내가 만든 와인 병엔 모두 ‘샤일로’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란다. 따라서 와이너리의 이름을 바꾼다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이 전혀 없다.”

연간 1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샤일로는 EU 지침이 발표된 후 유럽 매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지침의 세부사항이 아직 결정되지 않아 수입업자들이 정착촌 와인의 수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유럽 판매는 그야말로 제로가 됐다. 전혀 팔리지 않는다”고 루리가 말했다. “타격이 크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다.”
골란 하이츠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각종 국제 와인대회에서 수상하며 우수한 품질을 인정 받았다.
루리는 이스라엘인의 자존심을 걸고 이 지침을 당당히 받아들인다. “우리는 원산지가 정착촌이라는 상표를 붙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윗왕의 큰 별도 붙일 생각이다. 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지침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싸울 이유가 뭔가?”

원산지 표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EU의 조치가 팔레스타인인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사고트 같은 정착촌의 일부 와인업체는 팔레스타인인 근로자를 고용해 팔레스타인보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2013년 이스라엘 시민사회기구 케렌 나보트의 보고에 따르면 1997~2012년 서안과 동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운영하는 포도원 부지로 사용된 농지 중 56%는 이전에 팔레스타인인이 소유했던 사유지였다. 반이스라엘 운동가들은 “포도원 설립은 유대인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하고 정착사업을 ‘정상화’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정착촌 상품에 대한 상표 지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유대인 와인업자들은 이 조치로 유럽이 더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골란고원의 와이너리 바젤렛 하골란의 창업자 요아브 레비는 연간 8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에 복무한 사람만 고용하며 루리처럼 EU에 수출하는 와인 병 ‘코르크 마개’에 이스라엘 국기를 새겨 넣을 생각이다. “최근엔 세계 곳곳에서 반이스라엘 감정이 고조됐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인의 독창성 없이 한번 살아봐야 한다.”

거시 에치온 같은 소규모 와인업체들은 아직 EU 회원국에 와인을 팔아본 적 없지만 앞으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논란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 “우리는 와인을 제조하지 정치인을 키우진 않는다”고 거시 에치온의 영업부장 에얄 북스붐이 말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북스붐 부장은 자사가 와인을 수출하는 유럽 국가는 EU 회원국이 아닌 스위스뿐이라고 덧붙였다.

서안의 많은 와인업체가 스위스나 유럽 이외의 국가들을 중요한 교역 상대로 생각한다. EU의 결정에 따른 현재나 미래의 손실을 보상해줄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카르네이 숌론 정착촌의 와이너리 가트 숌론의 수출 책임자 드보라 브랜드(56)는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질 좋고 이국적인 와인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일본과 홍콩, 중국은 정착촌 와인업체들의 새로운 희망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시아 국가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고급 와인을 구매할 소비력이 생겼다”고 브랜드는 말했다. “아시아에는 EU 같은 골칫거리가 없다.”

레비와 루리, 브랜드는 EU 결정에 대항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그 지침이 사업에 손실을 가져올 경우 온라인 상점을 개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온라인 사업의 선두주자인 베리는 “서안의 모든 와이너리에 (온라인 사업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월 초 몇몇 와인업자를 만나 공동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사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EU가 우리에게 준 좋은 기회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됐다.”

- 잭 무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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