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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여인네의 ‘일거삼득’ 노리개

[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여인네의 ‘일거삼득’ 노리개

장식과 향을 즐기는 것은 물론 약재를 넣을 수 있게 만든 의료용 장신구인 구슬향 노리개, 각향 노리개, 향갑 노리개(왼쪽부터).
“이 땅의 귀부인들은 허리춤에 금색 방울(金鐸)과 금실로 짠 향낭 노리개를 매달고 다닌다. 특이하면서도 아름답다.” 약 1000여 년 전 고려 중기 때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인 송도(개성)에 다녀가면서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서긍은 송도에 한 달 간 머물면서 관찰한 당시 고려의 사회상을 상세히 기록해 자기네 나라의 임금인 휘종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보면 아마도 당시의 고려 여인들은 노리개를 즐겨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여인들의 장신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반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옛 노리개의 용도는 치장뿐만 아니라 향기를 내고 위급할 때 사용하기 위한 의료용 목적도 있었습니다. 요즘 여성들이 보석으로 치장하고 향수를 뿌리고 핸드백에 비상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옛 여인네들은 노리개 하나로 다 해결했던 것입니다.

 약재가 내는 향은 벌레도 퇴치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향낭(香囊) 노리개입니다. 향낭 노리개는 비단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향이나 구급약을 넣어서 옷고름이나 치마 춤에 매달고 다닐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 주머니 안에 향기로운 약재인 사향·한충향·정향·목향·부용향을 넣었으니 화려한 비단 노리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은은한 향기도 즐겼던 것입니다. 이들 약재가 내는 향은 벌레도 퇴치할 수 있었으니 ‘일거삼득’이었겠지요.

향낭 노리개 말고 향갑(香匣) 노리개라는 것도 많이 썼습니다. 향갑 노리개는 아랫 부분이 열리도록 개폐식으로 만들거나, 앞뒤를 따로 만들어서 그 안에 약재나 향을 넣었습니다. 향이 날아가거나 약재가 오래돼 효과가 떨어질 것 같으면 바꿔 넣을 수 있게끔 했습니다. 금속 실을 엮어 만든 향갑 노리개 안에는 향기 나는 약재를 가루로 내어 뭉치거나 환약으로 빚은 다음 얇은 천으로 싸서 넣었습니다.

향낭이나 향갑 노리개 안에 넣는 으뜸 약재는 사향(麝香)이었습니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배꼽 옆 향낭 안에 있는 사향선의 분비물을 건조한 겁니다. 막힌 기운을 통하게 하고 강심(强心) 작용이 있기 때문에 중풍, 졸도, 인사불성이나 정신이 혼미해지고 체기가 있을 때 효과가 있는 한방의 대표 구급약입니다.

사향(麝香)은 노루(鹿)의 향기가 멀리(射) 가는 향이라는 의미입니다. 양이 많으면 조금은 역한 냄새가 나지만 아주 소량을 지니고 있으면 은은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워낙 귀하기 때문에 보통은 목향이나 정향 같은 약재를 소량의 사향과 섞어 환약으로 만들어 향낭이나 향갑에 넣었습니다. 평소에는 사향을 향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노리개 안에 지니고 있다가 심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지거나 체기, 토사곽란의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생기면 바로 지니고 있던 약을 갑이나 주머니 안에서 꺼내어 먹였습니다. 사향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뱀도 피해 갔다고 하니 여인들의 호신에도 최고였을 겁니다.

향낭이나 향갑처럼 안에 넣지 않고 약재 자체를 노리개로 만들어 패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각향 노리개라고 합니다. 각향 노리개 중에는 향과 함께 한약재를 사각형 등으로 모양을 내어 찍어내고 아랫 부분은 술로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약용으로 전해 내려오는 각향 노리개 중에는 경면주사라는 한약재를 넣고 만든 것이 가장 많습니다. 경면주사는 ‘주사’라고 통칭하는 진정작용이 있는 천연광물 한약재인데 경기와 경련에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예로부터 정신질환에 처방한 약재로 향기가 은은하고 붉은 빛깔을 내기 때문에 곱게 갈아서 부적을 만들 때에도 씁니다. 주로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어 경련이나 불면증이 심할 때 처방하는 대표적인 한약재입니다. 수은 물질이 함유된 약재라 그냥 복용할 수는 없고, 물과 함께 곱게 갈아낸 다음 가루를 다시 물에 넣어 위에 뜨는 것만 약재로 씁니다. 이를 수비(水飛)라고 합니다. 그래야 수은물질이 완전히 제거되고 소화도 잘 돼 약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은 수은물질이 제거되었다 해도 법에 의해 처방과 복용이 금지돼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사향이나 경면주사를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어린이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온몸에 열이 나면서 뻣뻣해지거나 어른이 졸도하고 경련을 일으킬 때 이를 치료하는 한방 치료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경풍(驚風)이나 전간(癲癎)이라 하고 현대 의학에서는 열성경련이나 뇌전증이라고 합니다.

경풍에는 강직성 경련과 간대성 경련이 있습니다. 온몸이 지속적으로 뻣뻣해지는 강직성 경련은 어린아이에게 많이 볼 수 있고 근육이 오그라들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는 간대성 경련은 어른에게 많습니다. 강직성 경련일 때에는 숨도 멎는 것 같은 증세를 나타내기 때문에 엄마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게 되는데 대부분 가는 도중에 깨어나게 됩니다. 이때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당황하지 말고 아이를 흔들거나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조용한 방에 눕혀놓고 혀를 깨물지 않도록 나무젓가락 등을 손수건으로 싸서 치아 사이에 물고 있게 하고 머리는 옆으로 돌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의식이 없을 때에 물이나 약을 먹이는 것은 금물입니다. 자칫하면 기도로 넘어가서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열이 나면 미지근한 물로 닦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에는 윗입술과 코 사이에 있는 인중(人中)혈과 양 눈썹 사이에 있는 인당(印堂)혈을 손톱이나 이쑤시개 등으로 눌러주는 것이 가정에서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응급요법입니다.

 여인뿐 아니라 선비도 패용
전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간대성 경련에는 십선(十宣)혈 출혈이 효과적입니다. 십선혈은 열 손가락 끝 중심에 있는 혈인데 여기를 바늘로 찔러 피를 한 두 방울 내면 빨리 깨어납니다. 손톱 아래를 바늘로 따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경련이 빨리 멎지 않고 손톱발육에도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단 경련이 멎고 깨어나게 되면 미지근한 물을 먹고 침을 맞는 것이 빠른 치료와 재발 방지를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이외에 의료용 장신구로 줄향 노리개라는 것도 있습니다. 줄향 노리개는 체기나 경련에 쓰는 약재와 향(香)을 가루로 내어 꿀과 함께 반죽한 다음 작은 알약으로 빚습니다. 여기에 붉은색의 색실로 망을 떠서 알약을 감싼 다음 염주처럼 꿰어서 지녔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증세가 나타나서 약을 쓰거나 침을 맞을 수 없을 때 몇 알씩 떼어 먹도록한 것입니다. 장식과 향을 즐기기 위한 노리개에는 물론이고 약재의 효능을 보기 위해 만든 줄향 노리개에도 아랫 부분에는 술을 달아 모양을 내었습니다.

노리개는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뿐만 아니라 평민의 여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노리개는 혼례나 축일 때 필요했지만 단순하고 수수하면서도 구급시 쓸 수 있는 의약용 노리개는 여인들뿐 아니라 선비들도 패용했습니다. 몸 치장뿐만 아니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물건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45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워 관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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