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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고티에

장 폴 고티에

이 시대 가장 혁신적인 디자이너의 원형으로 손꼽히는 장 폴 고티에. 고티에는 남성에게 치마를 입히고 남녀의 성별 구분이 없는 ‘앤드로지너스 룩’을 선보여 정형화된 성의 개념을 재해석했다.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장 폴 고티에 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장 폴 고티에. 파격과 혁신의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이 시대의 패션 거장이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패션에 별 관심이 없다 해도 팝스타 마돈나가 입었던 원뿔형 브라와 코르셋을 입은 여인의 상체를 본뜬 향수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를 알고 있는 것이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 속의 전위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의상 역시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고티에의 파격적인 패션에 담긴 메시지들은 기존의 규범을 재치 있게 뒤흔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패션의 규범과 관습을 비트는 도발적인 시도들을 통해 ‘패션계의 악동’이라 불리는 장 폴 고티에는 1952년 프랑스 파리 인근의 아르쾨유(Arcueil)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어 교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고티에는 할머니의 미용실에서 드로잉 습작을 했고, 아름답게 변신하는 여인들에게 매료됐다. 이후 패션잡지 속 피에르 가르뎅과 이브 생 로랑의 작품을 보며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했고, 옷을 통해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을 현실화시키는 기쁨을 배웠다.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통해 장 폴 고티에는 차별과 편견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패션 세계를 창조했다. 1994년 파이낸셜 타임즈의 투표에서 가장 창의적인 디자이너로 뽑혔고, 1995년 텍스타일 저널(Le Journal des Textiles)에서 최고 인기 디자이너로 선정된 그의 역량은 200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4개의 기성복 라인 컬렉션과 에르메스를 위한 2개의 컬렉션을 감독하며, 여전히 전 세계 패션계를 주름잡는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할머니의 옷장이 영감의 원천
다른 나라에서 열린 전시와 달리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오프닝 패션쇼도 함께 진행됐다. 마린룩, 프랑스, 웨딩드레스의 3개 컬렉션이 공개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곰 인형을 사주지 않았다. ‘나나’라는 곰 인형을 어렵게 구해 웨딩드레스나 원뿔 모양의 브래지어를 만들어 입혀보며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 옷장 속의 코르셋과 스타킹의 아름다운 곡선은 내 영감의 원천이었다.”

지난 3월 25일, 현대카드의 21번째 컬처프로젝트 ‘장 폴 고티에 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장 폴 고티에는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유머러스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마련된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할머니와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고티에는 “미용실을 운영했던 할머니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조언할 정도로 패션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다”며 “할머니 옷장에 있었던 코르셋이나 스타킹을 보며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옷장에서 처음 본 코르셋은 어린 고티에에게 영감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여성을 구속하던 코르셋을 동경한 것은 아니다. 고티에는 ‘여성은 약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강인한 여성성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1990년 ‘블론드 앰비션 월드 투어(Blond Ambition World Tour)’ 콘서트에서 마돈나가 입었던 원뿔형의 가슴 컵이 달린 코르셋은 세계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고티에는 기존 관습을 뒤엎는 독특한 옷과 실험적인 패션쇼를 선보이며 세계 패션계에 이름을 날린다. 금발의 스웨덴 미녀를 선호하던 당시의 패션쇼들과는 달리 흑인 여성이나 몸집이 큰 여성을 쇼에 세우고, 박제·아프리카 가면·투우사의 볼레로에서 영감을 받은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등 그가 선보이는 패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특히 샤넬이 가방에 끈을 달아 여성의 손을 자유롭게 했고 이브 생 로랑이 여성에게 바지를 선사해 치마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면, 고티에는 남성에게 치마를 입히고 남녀의 성별 구분이 없는 ‘앤드로지너스 룩(Androgynous Look)’을 선보여 정형화된 성의 개념을 재해석했다.

고티에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고 통조림을 따다가 ‘아프리카의 팔찌’를 떠올리고 이를 멋진 팔찌로 완성시킨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원래 용도가 아닌 것으로 상상해볼 때 아름다움을 뽑아낼 수 있다”며 “아름다움은 틀에 박힌 어떤 것이 아니다. 남을 모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피에르 가르뎅의 어시스턴트로 발탁돼 패션계에 입문한 고티에는 기성복 디자인의 선구자 장 파투 하우스를 거쳐 1976년 자신의 첫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고, 여러 유명 인사들이 그의 옷을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조적인 패션 세계를 풀어내는 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그는 “오트쿠튀르는 자신만의 패션을 풀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영역”이라고 말했다.
 패션 거장이 전하는 다름의 미학
줄무늬 선원복을 입은 고티에를 만날 수 있는 ‘오디세이’ 섹션. 다양한 인물에 투영된 선정적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오는 6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장 폴 고티에의 패션 세계를 조망하며 그가 지닌 패션에 대한 철학과 예술성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뜻 깊은 기회다. 캐나다 몬트리올 미술관과 프랑스 장 폴 고티에 하우스가 2년간 협업해 마련한 이번 전시는 2011년 몬트리올을 시작으로 지난 5년간 샌프란시스코, 마드리드, 스톡홀름, 뉴욕, 런던, 파리, 뮌헨 등 8개국 11개 도시에서 200만 관람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월드투어의 마지막이자 아시아 유일의 전시로 기록될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150여 점 이상의 오트쿠튀르 의상과 1976년부터 2016년 사이에 디자인된 기성복들을 포함해 수많은 오브제, 문서자료 등 총220여 점의 작품들이 공개된다. 또 마돈나, 카일리미노그와 같은 세계적인 팝스타들을 비롯해 영화감독, 댄서들과 빚어낸 다양한 협업의 결과물들, 앤디 워홀·신디 셔먼·피터 린드버그 등 저명한 아티스트 및 사진작가들과 함께 탄생시킨 아트 프린트들과 패션 사진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들이다.

작품들만 옮겨와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이번 전시만을 위한 디자인 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특징이다. 다양한 조명과 영상, 무대장치 등을 통해 꾸며진 전시장뿐만 아니라 의상을 입혀놓은 마네킹도 특별하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표정의 마네킹은 3D 프로젝션 기법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 장 폴 고티에를 포함해 모델, 영화감독 등 유명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각각의 영역이 긴밀하게 연결된 총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남과 여’라는 성의 이분법을 넘어 그 사이의 세계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도발적인 작품 속을 거닐다 보면, 이 섹션들을 관통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첫 번째 섹션 ‘살롱(Salon)’에서는 어린 시절 고티에에게 영감이 됐던 다양한 코르셋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소중했던 곰 인형 나나를 비롯해 할머니와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TV와 사진, 한복을 재해석해 원뿔형 브라와 조합한 작품도 설치돼 있다.

‘오디세이(Odyssey)’에서는 고티에의 작품 세계에 담긴 주요 스토리가 펼쳐진다. 그의 작품 속 핵심 인물들은 ‘오디세이’로부터 비롯됐다.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물들과 함께 줄무늬 선원복을 입은 고티에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인물에 투영된 선정적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섹션이다.

고티에는 ‘스킨 딥(Skin Deep)’ 섹션을 통해 성, 나체와 에로티시즘의 개념에 대해 탐구한다. 여러 면에서 인체는 고티에 작품의 기반을 이루는데, 신체와 피부는 그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제2의 피부와도 같은 소재를 다루는 고티에의 신선한 접근 방식은 기성복과 오트쿠튀르의 미적 관습을 거스른다. 극단적으로 성적화된 작품들은 로맨티시즘과 패티시즘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1년 가을, 여성 기성복 컬렉션의 제목이기도 한 ‘펑크 캉캉(Punk Cancan)’은 파리와 런던의 세계가 만나는 곳이다.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전통과 아방가르드의 조합은 파리의 우아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고티에는 라텍스와 깃털, 레이스, 격자무늬 체크, 스터드와 금속 징 등이 뒤섞인 독특한 조합들을 끊임없이 선보이고 있다.

‘도시 정글(Urban Jungle)’에서는 의상에 서로 다른 문화와 민족 간의 대화를 그대로 담아내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한 고티에의 패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정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털과 깃털, 악어와 뱀 가죽으로 장식된 반인반수 형태의 새로운 존재도 볼 수 있다. 스타일뿐 아니라 여러 문화, 인종의 조합을 중시했던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주류의 규율 대신 파격과 혁신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의 상징인 코르셋은 누군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장 폴 고티에의 현재는 바로 이 코르셋으로부터 비롯됐다.
공상과학, 뉴웨이브, 하우스 뮤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고티에의 작품 세계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비닐, 라이크라, 네오프렌과 같은 첨단 기술로 만든 소재들을 활용하고 네오프렌이 코팅된 가죽과 입체 원단, 공기를 넣어 부풀릴 수 있는 옷감 등 혁신적인 혼합물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섹션인 ‘결혼(Les Mariees)’에서 고티에가 강조하는 것은 강하고 개성 있는 신부의 모습이다. 여러 전통 문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헝가리 경기병복의 요소를 치마 장식에 사용하거나 족장 혹은 전사의 깃털 머리 장식을 활용하는 등 남성적인 요소를 드레스에 적용시켰다. 고티에의 신부들은 결혼식장보다는 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처럼 장 폴 고티에가 주류의 흐름과 규율 대신 선택한 것은 파격과 혁신이었다. 지난 46년간 고티에는 파격과 혁신의 디자인을 통해 다양성의 문법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을 직접 보고 해석하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차이와 다름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경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삶을 모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껴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 오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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