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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역사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역사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신간, 일반인의 증언 통해 소련 붕괴 당시를 새롭게 조명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지난 35년간 옛 소련 지역 곳곳을 돌며 수천 명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
벨라루스 출신 작가 겸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8)는 지난 35년 동안 옛 소련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통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시베리아의 건설 인부부터 우크라이나의 헬리콥터 조종사까지 수천 명과 나눈 대화를 녹음기에 담았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런 방식 덕분에 미국 역사가 스터즈 터클과 하워드 진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녀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아 논픽션 작가로는 1953년 윈스턴 처칠 이후 최초의 수상자가 됐다.

알렉시예비치가 옛 소련 지방을 돌며 인터뷰한 내용은 지금까지 다섯 권의 책으로 나왔다. 그녀는 이 시리즈를 ‘레드맨의 역사(가제, The History of the Red man)’라고 부른다. 이 시리즈의 최근작 ‘세컨핸드 타임: 소련의 종말(가제, Secondhand Time: The Last of the Soviets)’(이하 ‘세컨핸드 타임’)은 소련의 붕괴와 그 후의 혼란스런 과도기를 다뤘다. 10년에 걸쳐 완성된 이 책은 2013년 러시아어로 출판됐고 지난 5월 영역판이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됐다. 소련 붕괴를 다루는 동시에 러시아와 옛 소련 위성국가들의 미래를 제시하는 이 책은 알렉시예비치의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책 내용 중 익명을 요구한 옛 소련 정부 관리와의 인터뷰는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러시아인은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를 원한다”고 그는 말했다. “(공산당) 서기장이든 대통령이든 차르의 역할을 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알렉시예비치는 유감스럽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민주주의를 포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악마로 묘사하진 않는다. 그녀가 보기에 러시아의 문제는 집단적인 성격을 띤다. “푸틴은 대다수 러시아 시민의 감정과 정서를 상징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치적 사고가 결핍되고 반(反)서구적인 슬라브주의자들이 푸틴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 우익 정치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같은 사람들은 전체주의적 가치관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세컨핸드 타임’에서는 마치 ‘맥베스’에서 뱅코의 유령처럼 이오시프 스탈린의 망령이 출몰한다. 알렉시예비치가 인터뷰한 러시아의 나이 든 세대 대다수가 독재자가 절대권력으로 소련을 통치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87세 노인의 말은 알렉시예비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가끔 괄호 안에 당시 자신의 감정을 묘사했다). 부인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정치적 ‘재활’ 기간을 거친 뒤 공산당에 다시 들어갔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말했다. “오로지 신앙의 법칙에 따라서만 우리를 심판할 수 있다. 신념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념을 질투한다.”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알렉시예비치의 신념은 1990년대에 무너졌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러시아인에겐 이런 질문이 제기됐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가질 것인가? 강력한 국가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국가인가?’ 우리는 전자를 택했다. 그래서 또다시 힘으로 움직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러시아인은 그들의 형제인 우크라이나인과 싸운다. 내 아버지는 벨라루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가정이 많다.”‘세컨핸드 타임’은 소련 붕괴 후 옛 소련에서 발생한 이민족 간의 끔찍한 폭력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타지키스탄과 압하지아, 바쿠 등지에서는 한때 다정했던 이웃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러시아 정치인들이 시대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알렉시예비치는 말했다. “그들은 정치적 변화와 이런 사건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폭력과 살인뿐이다.”

세컨핸드 타임 : 소련의 종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랜덤 하우스 펴냄
알렉시예비치도 벨라루스에서 차별 받았다. 벨라루스 정부는 그녀의 책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알렉시예비치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당초 그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했지만 이틀 후 취소했다. “그는 내가 러시아를 비방했다고 비난하면서 내 책과 같은 서적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알렉시예비치는 말했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의 편지를 받고는 매우 기뻤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정치혁명 운동 페레스트로이카를 구상한 인물이다.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첫 번째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펴냄)가 출판될 수 있었던 건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고르바초프의 프로그램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에서 싸운 여군들의 이야기다. ‘영웅 없는 전쟁 이야기는 끔찍하다’는 비난과 함께 2년간 검열에 묶였다가 1983년 출간됐다(랜덤 하우스는 내년에 새로운 영역판을 출판할 계획이다).

알렉시예비치는 고르바초프에게 정치혁명을 주도한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답장을 보냈다. “고르바초프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정치인 중 한 명”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세컨핸드 타임’에 묘사된 고르바초프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고 인기가 없었다. 앞서 언급했던 옛 소련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소인이 아니며 상황에 놀아나는 사람도 아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첩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알렉시예비치는 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를 말살하기보다는 발전시키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소련 국민 대다수가 그런 희망을 공유했다고 믿는다. “난 옛 소련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누구도 이 나라가 자본주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컨핸드 타임’은 그녀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치면서 모자이크를 만들어낸다. 스웨덴 한림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노벨상 시상 연설에서 “알렉시예비치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인터뷰 질문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며 그저 사람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다고 밝혔다. “물론 나중에 버려야 할 부분이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인터뷰 대상 중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됐으며, 인터뷰(그녀는 ‘대화’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한다)가 몇 년씩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인터뷰하는 모든 사람은 단순히 내 조사 대상의 의미를 뛰어넘는다”고 그녀는 알려줬다.

알렉시예비치의 책들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러시아식 블랙 유머도 있다. 일례로 한 러시아인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는 우스꽝스런 단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자 푸틴’은 우리의 가장 짤막한 농담이다.”

그녀의 책들은 또 사랑과 인내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로 깊이를 더한다. 작가 마리아 보이테쇼녹(57)의 이야기가 그런 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원으로 간 보이테쇼녹은 문맹인 고모가 낯선 사람들에게 편지 대필을 부탁해 6개월 만에 시베리아의 고아원에 있는 그녀를 찾아내 데려왔다고 한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세컨핸드 타임’뿐 아니라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난 큰 사건을 중시하는 역사가들이 흔히 생략하는 역사를 다루려고 노력한다”고 알렉시예비치는 말했다. “내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역사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하는 점이다.”

- 토비어스 그레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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